건강, 바이오에 대한 욕망 (H)
건강, 바이오에 대한 욕망 (H)
호모 헌드레드 욕망
2021년 전 세계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는 약 300만 명이다. 하지만 암 사망자는 코로나의 3배가 넘는다. 매년 약 1,000만 명이 암으로 사망한다. 이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 노환으로 자연사할 확률은 5% 내외다. 나머지는 암, 심장병 등 만성질환으로 사망한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필요한 곳은 바이러스도 중요하지만 암, 심혈관, 치매, 만성질환 등 고령화에 따른 질병에 특히 더 필요하다. 바로 여기가 바이오헬스 기술이 집중하고 있는 분야다.
이제 전 세계는 바이오헬스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돈이 몰려 있는 곳은 바이오헬스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면 그다음은 건강과 장수가 사람의 근본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100세 시대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중요하다.
미국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바이오 의약품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비만 치료제와 mRNA 백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의약품 시장의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9년 12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의 대유행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세계 최초로 mRNA 백신을 상용화했다. 코로나19 mRNA 백신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개발된 백신으로 백신 개발사의 이정표를 세웠다. 또한, 알츠하이머성 치매 항체 치료제, 유전자 가위 기술 등의 혁신적 치료 기술 역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과학은 인류가 더 오래, 더 건강히 살 수 있도록 해줬다. 기대수명이 100세에 달한다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가 다가왔으니 인류의 가장 강렬하면서도 오랜 욕망인 ‘불로장생(不老長生)’ 중 ‘장생(張生)’에 이미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는 단지 더 오래 살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생명의 길이만큼이나 생명력, 즉 건강도 함께 욕망하기 때문이다. 오래 사는 것만큼이나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질환이 노화와 함께 찾아오고, 당뇨병은 끈질기게 우리를 위협하고, 비만은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건강과 수명 모두를 욕망하는 인류에게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바이오 사이언스, 즉 생명과학이 인류가 꿈꾸는 건강과 수명의 열린 문일 것이다. 이 문은 열리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과학의 발전과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그 좁았던 입구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바이오필리아 경향, 즉 인간의 생명 사랑
인간이 가진 생명 사랑의 본능은 수리남의 베른하르츠도르프나 브라질의 아마존 분지의 열대 우림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도시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저명한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 (Edward Wilson)은 이 증거들을 현대 과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 찾고 있는데, 특히 뱀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와 뱀을 모티브로 한 수많은 신화와 전설과 예술 작품들을 사례로 들며 바이오필리아 경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한다. 인간과 침팬지는 물론 긴꼬리원숭이나 베르베트원숭이 같은 인류와 가까운 영장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본능적인 뱀 공포증의 사례들은 생명에 대한, 또는 특정 생물에 대한 반응이 본능에 내장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의 반응들은 인간 사회 속에서 문화를 통해 승화된다. 윌슨은 힌두교, 유대교, 고대 그리스 다신교, 중남미의 고대 신화 속에서 뱀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신화와 전설로 승화되는지를 치밀하게 분석하며 바이오필리아를 입증해 낸다.
또 서식지 선택, 즉 생물이 서식지를 선택할 때 보여 주는 어떤 경향성에서 바이오필리아의 존재를 입증해 낸다. 세균에서 식물은 물론이고 고등 동물까지 모든 생물들이 적절한 서식지를 선택하지 못하면 생존에 실패하고 만다. 따라서 자연 선택은 생물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적합한 서식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적절한 서식지를 선호하는 경향을 심어 주게 된다. 윌슨은 여기에 근거해서 인류 역시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서식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앞에는 군데군데 나무가 있는 초원, 즉 사바나가 펼쳐져 있는 언덕 지형에서 우리의 조상이 진화했으므로 지금도 인류는 그것과 비슷한 지형 속에서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초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형에 집을 짓고(자신의 집을 어디에 지을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부자들은 반드시 그런 지형에 집을 짓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도심에 공원을 만들 때에도 인공 사바나라고 할 수 있는 경관을 만든다. 윌슨은 이러한 사례들과 현재 진행 중인 연구들을 통해 주거 또는 서식지 선택이 단순한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바이오필리아가 작동한 진화 심리학적 문제라고 주장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다른 생명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뇌는 존재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접촉뿐만 아니라 낭비처럼 보이는 수많은 접촉들로부터 마음을 엮어 가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낭비야말로 생명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연구실 우리 속에서 잘 자란 것처럼 보이는 원숭이들과 콩만 먹고도 살이 찌는 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동식물이 없는 환경에서도 겉보기에 정상적인 모습으로 자랄 수 있다. 이들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을 하면 아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도 잔디밭, 화분에 심은 식물, 새장에 가둔 잉꼬, 강아지, 고무 뱀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다른 생물을 알고 사랑하는 만큼 고귀해진다
윌슨의 바이오필리아 개념은 단순하게 인간의 심리적 기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윌슨은 이 바이오필리아 개념을 자연 과학과 인문?사회 과학을 연결하는 고리로, 그리고 환경 보존주의, 생물 다양성 보존과 개발을 위한 윤리의 기초로 발전시킨다.
윌슨은 생명을 둘러싼 자연 과학자와 인문학자의 논의가 유전자 조작이나 인공 장기 개발 문제 같은 피상적 주제를 논의하는 수준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윌슨은 생명이라는 논의 주제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른 논의로, 심지어는 종교를 대체하는 논의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라는 종이 침팬지는 물론이고 저 미세한 세균과 유전자적으로 극도로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과, 인류가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한데 아우를 수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 정신의 보호와 계발에 도움이 되는지, 자연을 세밀하게 분해하고 해부하고 분석함으로써 자연이 두르고 있던 신비한 아우라를 해체하는 과학이 어떻게 자연과 생명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관심을 부활시킬 수 있는지를 자연 과학자와 인문학자,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여 논의하지 않는 한 생명 보전의 담론은 한 단계 더 성숙하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슨은 “지식이 늘어나면 윤리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우리가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저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됨을 역설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한번도 세계를 정복한 적이 없었으며 세계를 이해한 적도 없었다. 우리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왜 특정한 방법으로 다른 생물들에게 반응하며, 왜 생물들이 다양하게 필요한지 우리는 그렇게 깊이 알지도 못한다. 인간들끼리 서로 죽이고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신화는 진부하며 믿을 만하지 못하고 파괴적이다. 마음 자체를 생존의 기구라고 이해할수록, 순수하게 이성적인 이유로 생물에 더욱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윌슨은 “다른 생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특별한 방법”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92년 생물 다양성 협약 체결에서 2010년 나고야 의정서까지 18년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18년이나 걸려 겨우 한 걸음 더 ‘인간적’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윌슨이 제안한 생명 사랑의 본능, 즉 바이오필리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공감이 깊어진 만큼 그 시간을 줄어들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지음,바이오필리아, 안소연 옮김 사이언스북스 발간 2010)
시간은 “우리가 주변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이며, 공간은 “생명체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한 가지 도구”라고 말하면서 “시간과 공간은 허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제기한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따를 때,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 에너지 또한 늘어나거나 줄지 않는” 이유 때문이다.
세상은 교과서에서 본 그대로가 아니다. 의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의식은 생물학의 핵심 연구 분야가 아니다. 의식은 물리학의 과제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어떤 분야도 두뇌를 이루는 분자들이 어떻게 의식을 창조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낙조의 황홀함, 사랑의 기적, 맛있는 요리의 축복 등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현대 과학에서 신비로 남겨져 있다. 과학의 어떤 영역도 물질이 어떻게 의식으로 전환되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 모형은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대처해왔다.
무지개에 대해 생각해보자. 산봉우리 사이에 펼쳐진 화려한 무지개는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식 주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 우리는 구성 요소 각각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거대한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식이 현실보다 상위 차원의 존재라면, 우리는 의식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분석만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식 주체는 늘 생명 연장을 꿈꾸고 있다.
유전자 재조합
DNA를 마음대로 잘라서 이어 붙이고 복제하는 일이 가능해지자 뒤이어 등장한 기술이 바로 유전자 재조합을 통한 의약품 생산기술이었다. 특히 인간에게 꼭 필요한 단백질로 이루어진 의약품 생산에 이 신기술이 바로 적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성과를 거둔 것은 유전자 재조합을 통한 인슐린 생산이었다. 인슐린은 췌장의 베타 세포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혈액 속에 존재하는 혈당의 양을 조절하는 매우 중요한 단백질의 일종이다.
가끔 언론에서 형광 빛을 내는 담배나 쥐, 심지어는 닭이나 돼지 같은 동물들을 형질전환을 통해 만들어 냈다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 기사를 접한 뒤, 도대체 형광 빛을 내는 닭 따위를 만들어서 무엇에 쓸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가? 닭이 형광 빛을 발한다고 해서 더 맛있는 것도 아니고, 돼지의 기름기가 적은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왜 닭이나 돼지를 반짝거리게 만드느냐말이다. (하리하라의 바이오 사이언스, 이은희 지음, 살림 출판 2009).
유전자 꼬리표, 후성유전학
NASA는 우주 공간에서의 생체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2015년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일란성 쌍둥이이자 NASA 우주 비행사인 마크 켈리 Mark Kelly와 스콧 켈리Scott Kelly를 대상으로 각각 지구와 국제우주정거장에서 1년을 보내게 한 뒤,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알아본 것이다. 스콧 켈리는 2016년 3월, 340일 만에 지구로 귀환했다.
쌍둥이의 몸에서 일어난 여러 변화 가운데 과학자들이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이들의 유전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쌍둥이의 유전자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주에서 1년 가까이 생활을 한 스콧과 지구에 남아있던 마크는 유전자 발현에서 차이가 있었다. 정리하자면 쌍둥이의 유전자는 같지만, 유전자 발현의 강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DNA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 이 두 가지 단계를 통상 유전자 발현이라고 일컫는다. 쌍둥이 우주실험의 경우에는 DNA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정도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어떤 RNA는 우주공간에서 더 많이 만들어지고 어떤 RNA는 우주에서 더 적게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많거나 적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단백질이 많이 만들어지거나 안 만들어지는 것은 DNA에 돌연변이가 생겨서인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DNA가 정상적일 때는
이 DNA가 암호화하는 단백질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DNA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 단백질이 아예 안 만들어지거나 과도하거나 적게 만들어지는 등 비정상적인 단백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DNA에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더라도, 유전자 발현이 조절될 수 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 돌연변이 없이 유전자 발현을 설명하는 것이 후성유전학, 이른바 유전자 꼬리표이다. 메틸기가 이런 유전자 꼬리표의 역할을 한다는 점도 앞서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유전자꼬리표가 붙고 떨어지는 것이 그 생명체가 처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주 공간과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 무엇을 먹고, 또 운동을 어느 정도로 하는지 등이 생명체에 영향을 끼쳐 유전자 꼬리표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한 번 붙은 유전자 꼬리표는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를 기존 유전과 구분해 후성유전epigenetic이라고 부르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유전자 꼬리표가 비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우마trauma도 비만처럼 유전될 수 있다. 이를 연구한 연구진은 수컷 쥐에게 특정 냄새를 맡게 하는 동시에 전기 자극을 주어서 냄새만 맡아도 공포감을 느끼도록 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특정 신호에 반응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쥐가 낳은 새끼 쥐에게 전기자극없이 특정 냄새를 맡게 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신기하게도 새끼 쥐 역시 같은 냄새에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빠 쥐가 느낀 냄새에 대한 공포의 기억이 유전자 꼬리표의 형식으로 새끼 쥐에게 전달된 것이다.
유전자 꼬리표의 예는 사실 자연계에 무수히 많다. 한 가지를 예로 들면 여왕벌과 일벌을 들 수 있다. 벌의 세계에서 모든 암컷의 유전자는 똑같다. 그런데 유독 로열젤리를 먹고 자란 암컷 유충은 나중에 여왕벌이 되고, 그냥 꿀만 먹고 자란 유충은 일벌이 된다. 쌍둥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쌍둥이는 유전자가 100% 같지만, 쌍둥이마다 병이 발생하는 정도나 건강 상태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이 바로 유전자 꼬리표이다.
유전자 돌연변이는 DNA 염기서열 가운데 일부 염기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꼬리표를 붙이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시간도 더 오래 걸린다. 그래서 이런 돌연변이는 오랜 세월을 거쳐 일어난다. 반면 유전자 꼬리표는 돌연변이보다 짧은 시간에 발현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처한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돌연변이를 일으키기에 시간이 다소 부족하다면 차선책으로 유전자 꼬리표를 활용하는 것이다.
유전자 꼬리표는 최근 다양한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 인간의 모든 세포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세포는 심장근육세포가 되고 어떤 세포는 뇌세포가 되는 등 각각의 운명이다 다르다. 이 같은 차이를 불러오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는 것이 바로 유전자 꼬리표다.
이 때문에 후성유전적 변화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현상이지만, 질병 연구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암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연구를 통해 대다수의 암에서 유전자 꼬리표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보고됐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특정암, 예를 들면 대장암, 위암 등에서 어떤 후성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만약 이들 질병의 발병에 어떤 유전자 꼬리표가 주요하게 작용했는지를 밝혀낸다면, 이 유전자 꼬리표를 떼어놓거나 반대로 붙이는 방식의 새로운 항암제 개발이 가능할 것이다.
치매
치매는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파괴돼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퇴행성 뇌질환이다. 이 병이 무서운 것은 환자 본인이 고통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환자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가족들이 겪는 고통도 크다는 것이다. 레이건이 담화문에서 아내 낸시에게 큰 짐이 지워졌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고령화되면서 치매 인구도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2050년이면 인구 85명당 1명 꼴로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발병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치매 근본치료제 개발은 매우 시급하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치매를 치료하는 근본적인 의약품은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이뤄진 치매 관련 연구에도 불구하고 치매 치료제가 개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차례 이뤄진 대규모 임상시험의 실패는 치매 치료에 대한 회의론으로 이어지게 될까? 수조 원의 연구개발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극복해 내지 못한 치매의 주요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치매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자.
치매는 크게 알츠하이머성 치매(알츠하이머병)와 혈관성 치매,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전체 치매의 약 70%를 차지하는 것은 알츠하이머성 치매로, 기억 세포가 파괴되는 치매를 이야기한다. 혈관성 치매는 남은 30% 정도를 차지하는데, 뇌혈관의 손상으로 야기되는 치매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신경세포 손상인지, 아니면 뇌혈관 손상인지와 관계 없이 그 기작 mechanism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치매라고 하면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1906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 Alois Alzheimer가 이 병의 증상을 처음으로 기술한 뒤, 그의 이름을 따 알츠하이머성 치매, 일명 알츠하이머병으로 명명됐다.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크게 65세 이상의 노인에서 발병하는 치매와, 이보다 훨씬 이른 2~30대에 발병하는 치매로 나뉜다. 이 중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알츠하이머 성 치매는 전체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약 5%에 불과하다.
젊은 층에서 일어나는 치매는 주로 유전적 요인에 기인한다. 쉽게 말해 젊은 층의 치매 환자 대부분은 부모로부터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일으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유전자는 21번 상염색체에 존재하는 유전자로,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 amyloid precursor protein 유전자이다.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은 줄여서 APP라고 부르는데, 유전적으로 APP에 결함이 있는 경우 20~30대에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발병하게 된다.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은 우리 몸 안에서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amyloid beta peptide로 전환되는 물질이다. 아밀로이드 베타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베타 시크리테이즈beta secretase와 감마 시크리테이즈 gamma secretase라는 2개의 단백질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이 2개의 단백질은 차례대로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을 절단하는데, 이 과정을 거쳐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이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로 전환되는 것이다.
젊은 층의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APP에 돌연변이가 발생해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만들어져 생긴다고 앞서 설명했다. 65세 이상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의 경우 APP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경우는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노령의 치매 환자가 사망한 이후 그들의 뇌를 분석했더니 이들에게도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많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젊은 층에서 발병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나 65세 이상 노인에게서 발병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 모두 아밀로이드 베타가 다수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노화
세포 노화 척도...'텔로미어'
지난 1997년 프랑스의 잔 칼망Jeanne Calment 여사가 122세의 일기로 숨져, 세계 최고령자로 기록됐다. 1875년에 태어난 칼망 여사는 122년 164일을 살았으며, 이 기록은 1999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칼망 여사는 85세부터 펜싱을 시작했고 110세까지 자전거를 타는 등 건강한 노후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칼망 여사의 사례는 이미 인류가 100세 시대에 진입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요즘 자주 언급되는 것이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이른바 100세 시대인 것이다.
100세 시대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데,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내기가 있다. 내기의 주인공은 스티븐 오스테드Steven Austad 앨라배마 대학 교수와 제이 올샨스키Jay Olshansky 일리노이 대학 교수다. 내기의 시작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태드 교수는 미국의 저명한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에 인간의 수명이 150세까지 가능할 것이란도발적인 글을 실었다. 이에 대해 올샨스키 교수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서 논쟁은 급기야 내기로 번졌다.
두 교수는 각각 150달러를 펀드에 투자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지금부터 150년 뒤 내기의 결과에 따라 그 후손에게 돈을 물려준다는 것이다. 물론 150세의 인간이 존재하게 되더라도 건강한상태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2000년 당시 300달러의 펀드는 현재의 주식상승률을 반영한다면 150년 후 수천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150세까지 생존한 인간이 존재한다면 오스태드 교수의 자손은 엄청난 횡재를 하게 된다.
2016년 과학 잡지 『네이처에 인간의 사망률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얀 페이흐Jean Vijg 박사 연구팀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연구팀은 인류의 수명이 192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했지만, 1980년 정점을 찍고 난 후부터는 아주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페이흐 박사는 사람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가 대략 115 세일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는 인간이 125 세를 넘게 살 확률은 만분의 1도 채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처럼 인간의 수명은 정말 한계가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한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생명체가 생명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세포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세포가 끊임없는 분열을 통해 병든 세포를 새 세포로 교체하는 활동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 생명체는 생명 현상을 이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세포가 세포 분열을 멈춘다면 노화가 시작되고, 생명 현상을 이어갈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개체가 죽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세포가 분열하는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말일까? 이 질문은 곧 "개체의 수명에 한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세포 분열은 곧 하나의 세포가 자신이 가진 DNA를 복제한 뒤, 분열을 통해 새로 생기는 세포에 이를 전달해 주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새로 생기는 세포가 기존 세포가 가진 것과 똑같은 DNA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새로 형성되는 세포가 유전정보인 DNA를 온전히 갖게 되어, 생명 현상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세포 분열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세포가 언제까지 DNA 복제를 할 수 있느냐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 몸에서 DNA는 매우 정교한 과정을 거쳐 복제된다. DNA는 워낙 중요한 물질이기 때문에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이를 바로잡는 장치가 우리 세포 안에 만들어져 있다. 이를 'DNA 복구 장치 repair system'라고 부른다.
또 복제되는 과정에서 DNA가 행여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일종의 보호 장치가 DNA 양쪽 끝에 존재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신발끈을 예로 들어 보자. 신발 끈의 양쪽 끝에는 끈을 보호하는 플라스틱이 감싸고 있다. 이 플라스틱은 신발 끈을 좀 더 쉽게 묶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하지만, 신발 끈의 끝이 닳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DNA의 양쪽 끝에도 신발 끈의 플라스틱처럼 DNA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특수 장치가 있다. 이 장치를 '텔로미어 telomere'라고 부른다. 엘리자베스 블랙번 Elizabeth Blackburn 교수가 이 텔로미어를 발견한 공로로 200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텔로미어는 신발 끈의 플라스틱처럼 DNA 양쪽 끝에 특정 물질이 감싸고 있는 형태는 아니다. 특정 염기서열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DNA의 양쪽 끝 짧은 부위를 말한다. 인간 텔로미어의 경우 6개의 염기서열이 대략 2,500배 정도 반복되어 이뤄진 DNA의 짧은 단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계산해보면 텔로미어의 평균 길이는 약 15,000(6X2,500)bp이다. bp는 'base pair'의 약자로, 쉽게 말하면 DNA 염기가 몇 개로 이뤄졌는지를 뜻한다. pair는 DNA 염기가 상보적으로 결합해 DNA가 2가닥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붙여진 단어다. 따라서 인간의 텔로미어는 15,000x2=30,000bp, 총 3만 개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DNA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텔로미어가 영구적으로 손상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DNA가 복제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진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텔로미어는 생물학적 노화시계인 셈이다. 세포가 분열과 DNA 복제를 계속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텔로미어가 닳아 없어져. DNA를 더는 복제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세포 분열도 멈춘다. 세포가 분열을 멈추면 세포 노화가 시작되는 것이고, 이것이 결국 개체의 노화로 이어지는 것으로 과학계는 보고 있다.
즉, 텔로미어는 DNA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노화와 관련한 질병의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것은 노화의 진행과 암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명체의 수명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의 근간에는 이처럼 텔로미어가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그 바탕에 자리한다.
텔로미어 역설・・・노화 억제하면, 암에 걸린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인위적으로 텔로미어의 길이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거나 줄어든 텔로미어의 길이를 원상으로 복구할 수 있다면 그 생명체는 계속해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주목한 것이 어떻게 하면 텔로미어의 길이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에 대한 해답을 블랙번 교수의 노벨상 수상에서 찾을 수 있다.
블랙번 교수가 노벨상을 받게 된 이유는 텔로미어뿐만이 아니다.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텔로머레이즈telomerase'라는 효소를 발견한 공로다. 이 효소는 텔로미어의 길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텔로머레이즈는 텔로미어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텔로머레이즈가 어떤 특정 세포에서 작용한다면 그 세포는 텔로미어의 길이가 줄어들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노화 연구에 많이 쓰이는 실험 동물인 예쁜꼬마선충 C. elegans을 대상으로 텔로머레이즈 실험을 한 결과, 예쁜꼬마선충의 텔로미어 길이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1998년 미국의 한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텔로미어를 제거한 인간세포에 텔로머레이즈를 도입한 것이다. 실험 결과 텔로머레이즈를 도입한 인간 세포는 평균적인 세포 수명을 넘어 20회 이상의 세포분열을 더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텔로미어가 줄어드는 것을 막는 것이 인류에게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 몸에는 평소 텔로머레이즈가 작동하고 있는 특별한 세포들이 있다. 첫 번째는 생식 세포인 정자와 난자 세포이다. 이들 세포는 한 생명체의 DNA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진화 관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몸의 모든 체세포는 텔로머레이즈의 작동을 꺼놓고 있지만, 유독 생식세포에서만은 그 기능을 켜놓고 있다.
그런데 이 텔로머레이즈가 상시 작동시키고 있는 또 다른 세포가 바로 암세포다. 텔로머레이즈는 정상세포에서는 작동하지 않지만, 이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바뀌면 작동하기 시작한다. 암세포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세포가 분열을 멈추지 않고 무한히 증식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암세포는 텔로미어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는 텔로머레이즈를 작동하는 전략을 이용한다.
암세포의 이 같은 특징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암세포의 텔로머레이즈를 공략하는 것이 새로운 항암 치료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텔로머레이즈가 암세포에서 더는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암세포는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정상세포에서 텔로머레이즈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정상세포가 암세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호 장치라고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우리 세포는 영원히 분열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생명체가 암에 걸리는 것을 방지하는 쪽을 진화적으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암에 걸리고 오래 살 것이냐, 암에 안 걸리고 적당히 살 것이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체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노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텔로머레이즈를 정상세포에서 활성화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예상치 못한 생물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병들어 오래 사느냐,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 이 두 지점의 적정선을 찾아내는 것이 노화 정복의 핵심일 것이다.
불로장생의 꿈, 수명 연장 '약'...그 정체는?
달에서도 보인다는 인류 최대의 건축물 '만리장성'을 짓게 한 진시황은 건강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실 진시황은 사람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기기묘묘한 곳에서 찾을 만큼 간절히 불로장생의 꿈을 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시황 시대 사람들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풀이나 약초에서는 영생의 묘약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광활한 중국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끝자락 탐라(제주도)까지 그의 손길이 뻗친 것으로 야사는 전하고 있다.
불로초와 같이 신비한 약이 어딘가 닿기 힘든 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진시황이 죽은 지 2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제법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오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약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약효를 가진다거나, 정말 구하기 힘든 특별한 약초를 성분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메트포민Metformin은 수많은 당뇨병 약 가운데 하나이다. 이 약의 성분은 1922년에 처음 발견됐다. 1950년 프랑스 의사 장 스턴Jean Sterne은 메트포민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7년 메트포민은 프랑스에서 당뇨병 약으로 승인됐고, 1995년부터는 미국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미국에서 사용이 늦어지게 된 배경에는 펜포민Phenformin 이라는 약이 관련되어 있다. 이 약은 메트포민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약인데, 인체 부작용이 보고되면서 당시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는 펜포민과 비슷한 메트포민의 사용이 프랑스보다 훨씬 늦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메트포민은 1950년대부터 오랜 세월 인류가 사용해 온 만큼 약의 안전성과 효능도 충분히 검증된 약이다. 부작용이 아예 없는 약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부작용은 물론 있지만, WHO는 메트포민을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한 약 중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비용도 별로 비싸지 않다. 한 마디로 당뇨병 환자가 병원에 가면 가장 흔하게 처방 받게 되는 당뇨병 약이 메트포민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메트포민이 불로장생의 가능성이 있는 약의 1순위로 꼽힌다는 점이다. 당뇨병 약이 진시황이 애타게 찾던 불로장생의 효험이 있다니, 잘 믿기지가 않는다. 이 약의 생명연장 효과는 우리 몸의 세포로 하여금 에너지를 덜 쓰게 만드는 데 있다. 메트포민은 우리가 칼로리를 제한해 먹은 것과 비슷한 효과를 세포에 일으킨다. 그러면 세포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ATP라는 물질보다, 에너지를 덜 쓰는 AMP라는 물질을 더 많이 만든다. 이런 차이가 몸의 신진대사를 변화시키는데, 그 변화 중 하나로 단백질 합성이 느려져 세포가 에너지를 더 적게 쓰게 되는 것이 있다. 세포는 이 여분의 에너지를 노화를 억제하는 데 사용한다.
TAME Targeting Aging with Metformin'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메트포민으로 노화를 공략하겠다' 라는 뜻이다. 미국 앨버트 아인슈타인의대 연구팀은 생쥐를 대상으로 메트포민을 투여한 결과, 생쥐의 수명이 약 40%까지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심지어 이 약을 먹은 당뇨병 환자는 당뇨병이 없는 일반인보다 평균 15% 정도 더 오랜 산 것으로 보고됐다.
이런 연구결과에 힘입어 메트포민이 실제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는지, 대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하겠다는 것이 바로 TAME 프로젝트다. 65~79세 노인 3천 명을 대상으로 메트포민을 복용했을 때 이 약이 심장마비, 암, 치매, 사망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만약 임상시험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미국 FDA가 승인하는 최초의 노화억제 약이 될 전망이다.
여기에 한 가지 재미난 점이 있다.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에는 대략 2년 정도가 걸리며 비용은 7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대략 750억원 정도가 소요될 전망이다. 그런데 어떤 제약회사도 이 같은 비용을 내면서까지 임상시험에 돈을 투입하려고 하지 않는다. 메트포민이 기껏해야 5달러(약 6,000원) 정도인데, 성공할지, 실패하지도 모르는 프로젝트에 750억 원을 선뜻 내놓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인슈타인 의대 그룹은 박애주의 단체로부터 절반 정도의 비용을 지원받았다.
메트포민 다음으로 오래된 당뇨병 약으로 '아카보스 acrbose'라는 약이 있다. 이 약 역시 생쥐 실험에서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확인됐다. 재미난 점은 수컷과 암컷에게 미치는 영향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수컷 생쥐는 평균적으로 22%의 수명이 늘어난 반면, 암컷 생쥐는 그 효과가 5%에 불과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이 약의 노화억제효과에 대한 소규모 임상시험을 지원하기도 했다.
메트포민만큼이나 불로장생의 명약으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약이 있는데 바로 '라파마이신rapamycin'이라는 약이다. 라파는 라파누이 Rapa Nui에서 따온 말로, 이 약의 출신지를 알려주고 있다. 라파누이는 이스터 섬을 뜻하는 원주민 말이다. 라파마이신은 스트렙토마이세스Streptomyces 라는 미생물이 만들어 내는 물질을 원료로 만든 약인데, 이 미생물이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의 흙 속에서 발견됐다.
라파마이신은 원래 항진균제로 개발되려고 했으나 면역억제제로 승인됐다. 그런데 라파마이신의 효능에 노화 억제가 추가됐다. 라파마이신을 20개월 된 생쥐(인간으로 치면 60대에 해당한다)에 투여한 결과, 수명이 약 10%가량 늘어났다. 또 워싱턴대 연구팀은 개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낮은 용량의 라파마이신을 복용시킨 결과, 그렇지 않은 개들보다 심장 기능이 향상되는 것을 확인했다. 같은 동물실험이지만개가 생쥐보다 인간과 더 가깝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한편 노화억제제로서 라파마이신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면역억제제로 쓰이는 라파마이신의 특성에 따라 면역 기능이 떨어져 감염 위험이 커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파마이신이 노화억제제로 폭넓게 사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나 미국 사람들이나 고기를 좋아하고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기는 마찬가지인데, 프랑스 사람들은 유독 심장병에 잘 걸리지 않아, 이를 '프랑스인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이 왜 그런지를 연구한 결과,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 흡연도 많이 하는 프랑스인들이 미국인보다 심장병에 덜 걸리는 이유가 '와인'에 있다는 것이다.
와인하면 프랑스를 떠올릴 정도로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을 즐겨 마신다. 그렇다면 와인에는 어떤 특별한 성분이 있어 건강에 이로운 작용을 하는 것일까. 그 주인공이 바로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이다. 레스베라트롤은 포도와 크렌베리, 라즈베리 등에 포함되어 있는데, 항암과 항산화 작용을 하는 우리 몸에 이로운 물질로 알려졌다.
이 레스베라트롤은 지난 2006년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이끌었는데, 생쥐 실험에서 생명 연장 효과가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기대였을까. 2011년의 연구에서 인간의 경우 레스베라트롤의 수명 연장 효과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레스베라트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레스베라트롤이 의미하는 것은 와인은 와인일 뿐, 결국 적당한 음주가 건강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노화를 억제한다', '수명을 연장한다, 이런 말들은 너무 거창해서 그 비결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물론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적의 명약이 차후 개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 조금만 실천한다면 굳이 약을 먹지 않더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 방법이 가까이 있다. 바로 주위에서 늘 하는 이야기인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다. 이것만큼 건강을 지키는 데 특효를 발휘하는 약이 또 있을까?
새 독감치료제 & 범용 독감 백신
독감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독감 바이러스의 아형이 많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 바이러스가 쉽게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돌연변이는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기존 치료제를 무력화하는 약물 내성 문제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처음에 신약이 개발되면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공격 무기가 등장한 셈이 된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바이러스 입장에선 방어 전략을 짜야 하는데, 그 방어 전략의 핵심이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켜 약물의 약효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바이러스는 인간 세포보다 상대적으로 유전자 돌연변이를 쉽게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약에 따라, 또 그 약을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에 따라 내성이 일어나는 정도가 다르다. 타미플루의 경우도 내성 독감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독감치료제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독감 치료제가 판매승인을 받았다. 이 치료제의 핵심은 독감 바이러스의 복제를 억제한다는 점이다. 독감 바이러스의 생활사를 잠깐 살펴보면, 인체 세포에 침입한 독감 바이러스는 세포 내에서 자신의 게놈을 복제한다. 바이러스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다. 이후 숫자를 불린 바이러스는 세포에서 나와 다른 인간 세포에 감염한다. 타미플루 바이러스가 세포에 나오는 이 마지막 단계를 차단하는 원리다.
그러나 새로 개발된 독감 치료제는 전 단계인 바이러스 게놈 복제를 차단한다. 이 치료제는 타미플루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타미플루 내성 독감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종 독감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독감 치료제는 질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한다는 점에서 질병을 예방하는 백신과는 다르다. 스페인 독감이나 신종플루 등 독감이 대유행할 때 치료제만으로 독감을 제압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 이 같은 이유로 백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환절기가 되면 독감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신을 접종받고도 독감에 걸렸다는 뉴스 역시 심심치 않게 들린다. 독감을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맞는 것인데, 이게 소용이 없다니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독감 바이러스는 그 아형이 많아 사실 어떤 독감 바이러스가 그해 유행할지 예측하는 것이 극히 힘들다. WHO는 매년 그해 초 유행할 독감 바이러스를 예측해 발표한다. 보통 A형 독감 바이러스 2종류와 B형 바이러스 1종류를 발표한다. 예를 들어 A형 H1N1과 H3N2, B형 빅토리아 이런 식이다. 그러면 백신 제조사들이 그에 따라 독감백신을 제조하는 것이다. A형 독감은 198가지의 아형이 존재하는 반면, B형 독감의 아형은 빅토리아와 야마가타 두 종류뿐이다.
백신은 보통 3가 백신을 접종받는데, 여기서 말하는 3가라는 것은 3가지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의미한다. 앞서 설명한 WHO의예측대로 백신이 만들어졌다면 A형 H1N1과 H3N2, 그리고 B형 빅토리아에 대한 백신을 백신 제조사들이 만들고, 그 백신을 접종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WHO가 예측한 독감 바이러스가 유행하면 백신의 효과가 있겠지만, WHO가 예측한 독감 바이러스가 아닌 바이러스가 출현할 경우 백신은 무용지물이 된다. 예를 들어 실제로 A형 H1N1 과 H3N2가 유행했지만, B형에서 야마가타가 유행했다면 백신 접종은 효과가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3가 백신에 B형 백신을 하나 더 추가하는 4가 백신에 대한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A형 바이러스 2개와 B형 바이러스 모두를 잡는 독감 접종이 가능해진다. 앞서 설명한 사례처럼 B형 바이러스에 대한 예측 실패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WHO도 독감 바이러스 대유행을 예방하기 위해 4가 백신 접종을 권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현재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국가 무료 접종은 3가에만 해당한다. 그래서 4가 백신에 대해서도 무료 접종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4가 백신이 3가 백신보다도 더 효과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독감 바이러스를 아우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해 유행할 독감 백신 예측과 실제 백신 제작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독감 바이러스의 종류에 상관없이 적용할 수 있는 이른바 '범용 백신universal vaccine'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일명 꿈의 백신이라고 불리는 범용 백신의 원리는 이렇다. 우리가 백신을 제조할 때는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특정 단백질을 활용한다. 이런 단백질을 항원이라고 부른다. 항원 단백질을 우리 몸에 접종하면 우리 몸에서는 이를 외부의 적으로 인지하고 이를 공격하는 항체를 생성한다. 이게 백신의 작용 원리이다.
지금까지는 바이러스의 항원 부분을 주로 HA의 일부분을 활용했는데, 이 부분은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난다는 단점이 있다. HA 일부를 항원 단백질로 활용해 백신을 만들었는데, 이 부분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독감 바이러스가 생기면 이 백신은 더는 효능이 없게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HA 중에서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지 않는 부위를 항원으로 쓰자는 것이다. HA 구조는 Y자 모양처럼 생겼는데, 윗부분이 주로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는 부위다. 이를 머리라고 부르는데 통상 백신은 이 머리 부분을 활용했다. 그런데 머리 아래 부위는 상대적으로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 부위를 몸통이라고 부르는데 이 부분을 항원으로 활용해 백신을 만드는 것이 범용 백신의 기본 원리다.
독감 바이러스가 유전자 돌연변이를 일으켜도 HA의 머리 부분이 바뀌지 몸통 부분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범용 백신은 이론적으로 모든 독감 바이러스에 적용할 수 있다. 현재 이를 활용하여 미국에서 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상용화되지는 않았다. 개발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제약사 입장에서는 범용 백신이 그렇게 매력적이지가 않다.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매년 만드는 것이, 한 가지 백신만 만드는 것보다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그럼에도 범용 백신이 상용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앞서 설명했지만, 4가 독감 백신을 접종한다고 해서 모든 독감 바이러스를 예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감 바이러스가 대유행할 경우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범용 백신 외에는 없다.
건강진단
의료 분야에서 르시클라주(recyclage)는 '건강진단'이다. 남자들에게는 헬스클럽인 '프레지당, 여자들에게는 몸을 돌보기 위한 절식요법,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휴가, 이것들은 육체와 근육 그리고 생리기능의 르시클라주(재훈련)라는 것이 되는데, 이 개념을 확장해서 더욱 광범위한 현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육체의 '재발견' 자체가 육체의 르시클라주이며, 거대한 도시에 포위되고 녹지대나 자연보호구역의 형태로, 아니면 별장의 배경으로 바둑판처럼 구획되고 '갇혀버린 채로 제공되며 견본 상태로 전락한, 전원형태로서 자연의 '재발견'도 사실 자연의 르시클라주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이제 더 이상 문화의 상징적 대립관계에 있는 본래적으로 특수한 존재가 전혀 아니라 하나의 시뮬레이션 모델, 즉 유통과정에 재투입된 자연 기호의 소비된 모습, 간단히 말하면 르시클라주된 자연이다.
'의료소비'의 과정.
생활수준 향상과 함께 건강에 대한 수요가 현저하게 증대하였지만, 그 결과 '근거있는' 수요 (그렇지만 생명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물학적 또는 심신상관적 균형을 어떻게 정의하여 '근거있다'고 말한 것인가)의 내과적·외과적 • 치과적 급부에 대한 소비충동 사이의 경계선이 소멸된다. 의료활동이 의사 그 자신의 활동으로 변화하고, 사물로서의 의사, 사물로서의 약품의 사치로 뽐내는 듯한 이용이 생활정도를 나타내는 파노플리 속에서 별장이나 자동차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 경우에도 약품, 그리고 보다 유복한 계급에게는 의사(발린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의료에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는 것은 약품이라기보다는 의사 그 자신이다)가 최종적인 선(善)으로 간주되어온 건강의 매체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최종적인 요소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객관적인 실용적 기능에서 물신적인 기호계산으로의 방향전환의 도식에 따라서 소비된다.
사실은 이 '소비'의 두 개의 수준을 구별해야 한다. 우선 약품의 투여와 고통을 경감시키는 의료적 배려에 대한 '노이로제적' 수요가 있다. 이 수요는 기관 질환에서 생기는 수요와 같은 정도로 객관적인 것인데, 이 수요의 수준에서 의사는 더 이상 고유한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의사가 고통을 경감시키는 사람(또는 심급)으로서 알코올이나 쇼핑, 수집(소비자는 의사와 약품을 '수집한다') 등의 모든 종류의 부분적 퇴행과정과도 대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수요는 '소비'로 통하고 있다. 전기세탁기가 안락한 생활과 지위의 기호로서 소비되는 바와 같이, 의사도 다른 여러 것들 가운데 하나의 기호로서 소비된다.
따라서 심층적으로 '의료소비'를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노이로제의 논리를 관통하는 사회적 논리이다. 이 사회적 논리가 의사를 객관적 급부 이상의 것, 다른 어떠한 가치있는 속성과도 대등한 것, 즉 기호로서 일반적 체계 속에 통합시켜버린다. 의료소비의 확립이 의료기능의 추상화 (축소)에 기인하는 것은 분명하다. 소비의 원칙 그 자체로서의 이 전면적인 방향전환의 도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헬스클럽 광고
프랑스 헬스클럽 '프레지당'의 광고 "관리직에게 정(情)은 무용인가?" 이다.
"40세 관리직, 현대문명은 그에게 젊음을 요구합니다. 전에는 사회적 성공의 상징이었던 뚱뚱한 배는 지금은 면직, 해고와 동의어입니다. 상사, 부하, 처, 애인, 아이들, 또는 혹시나 하고 생각하면서 카페 테라스에서 그가 잡담하는 초미니 스커트 아가씨...…이들 모두는 복장의 질과 스타일, 넥타이나 화장수의 선택법, 몸의 보들보들함이나 스마트함으로 그를 평가합니다."
"바지의 접는 선, 와이셔츠의 목덜미, 재미있는 화술, 그리고 춤출 때는 발걸음, 식사 중에는 절식요법, 계단을 오를 때는 발걸음, 무거운 것을 들 때는 척추, 모든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일할 때 효율성으로 충분하였지만 오늘은 같은 이유에서 몸의 형태와 우아함이 관리직에게 요구됩니다."
"자신과 여유로 가득 차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균형이 잡힌, 말하자면 반은 제임스 본드 같고 반은 헨리 폰다 같은 미국의 건강한 비즈니스맨 신화가 현대문명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박력'과 '정력'이 넘치며 다이내믹한 협력자를 발견하여 붙잡아두는 것이 모든 경영자의 첫 번째 관심사입니다."
“40세의 관리직이야말로 이 이미지의 공범자입니다. 현대의 새로운 나르시스인 그는 자신에게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또 자기만족하려고 애씁니다. 절식요법, 영양제, 체조, 그리고 금연의 괴로움을 그는 즐기고 있습니다."
"사회적 성공이 자신에 대해서 타인이 지니는 이미지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형태가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자각한 40세의 관리직은 젊음을 회복하여 제2의 청춘을 추구합니다."
'프레지'의 선전이 계속된다: 몸의 형태, 이 마법의 말, 이 '현대의 요정'(나르시스 다음은 요정이다!)을 추구하고, 회사의 사장, 상급관리직, 저널리스트,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밀어닥친다. '냉난방 완비한 쾌적한 분위기' "페달, 룰렛, 바벨, 바이브레이터, 레버, 강철선 등을 사용한 37개의 장치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여성미 추구와 '아름다움'과 같이, 남성미 추구와 '몸의 형태'도 가제트를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헬스 클럽과 등산, 트레킹 등 운동과 식생활은 오늘날 건강 유지에 두 가지 필수 사항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료숭배: '몸의 형태'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본래적 의미에서 육체라기보다는 기능적이며 '개성화된' 육체에 대한 현시점에서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 건강에 대한 태도는, 도구로서의 육체에 의해 나타나는 경우에는 육체 균형의 일반적인 기능으로 정의되지만, 위세를 가져다주는 재화로서의 육체에 의해 나타나는 경우에는 지위 향상 요구의 하나의 기능이 된다. 그 결과 건강은 경쟁의 논리 속에 들어가며, 의료 및 약에 대한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요구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그것은 부분품으로서의 육체에 대한 자기도취적 집착과 관련된 강박관념적 요구인 동시에 개성화 및 사회이동 과정과 관련된 지위 향상의 요구이지만, 어쨌든 자유 및 사적 소유에의 권리를 보충하는 기본적 인권의 현대적 발전으로서의 '건강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건강은 오늘날에는 살아남기 위한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지상명령 이상으로 지위향상을 위한 사회적 지상명령이 되고 있으며, 기본적 '가치'라기보다는 과시이다. 과시의 신비를 한 '형태(forme)'가 아름다움과 직접 결합된다. 아름다움과 건강의 기호는 개성화, 즉 육체의 기호화된 기능의 완전주의적이지만 조금 불안한 조작의 범위 내에서 서로 교환된다. 나르시시즘을 사회적 위세와 결합시키는 과시로서의 육체의 여러 증후군은, 현재로서는 극히 일반적이며 현대윤리의 본질적 요소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다음과 같은 사실 속에서도 완전히 반대의 형태로 보인다. 즉, 어떠한 사회적 위세의 실추도, 어떠한 사회적·심리적 실패도 바로 신체적 증후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날 의료(의사의 진료 태도도 포함해서)가 "신성하지 않게 되었다든가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보다 더 자주 의사의 진찰을 받으며 이 민주화된 사회적 서비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하고 남용하고 있기(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때문에, 누구도 의료와 의학의 '객관적' 실천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민주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의료는 그 성스러움과 주술적 기능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의료는 물론 옛날의 전통적 의료와는 다르다. 전통적 의료의 경우, 승려 겸 의사이며 주술사이고 치료사인 자신이 자신의 육체를 알 수 없는 운명이 노리는 실용적 · 도구적 육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취급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농민적이며 '유치한' 사고방식 속에 나타나고 있다. 그 경우 육체는 인격적 가치로서 내면화되거나 '개성화'되지 않는다. 영혼의 구제가 행해지는 것도 아니며, 육체를 통해서 지위를 과시하는 것도 아니다. 육체는 노동용구이며 마나(mana), 즉 효율적인 힘이다. 육체의 상태가 나쁘면 의사가 육체의 마나를 회복시키지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주술적 사고방식은 근대인의 '시각(vision)'에서 신체에 대한 객관적 표상에 자리를 양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나르시시즘적 열중과 과시. '심적' 차원과 신분적 차원 라고 하는 두 가지의 상호보완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의사와 건강의 지위도 이 두 가지 방향(의미)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진다. 육체의 '재발견'과 개별적 신성화를 통해서 의료제도는 간신히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사유물 성격을 지니는 이 개성화된 육체에 자애와 저주, 만족과 억압 등 모든 종류의 공희적 행동이 점차 세차게 집중되고, 치료 및 실용의 목적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 요청을 어길 정도로 이차적이며 '비합리적'인 일련의 소비가 육체를 대상으로 삼아 행해진다(의약품의 반은 사회보험가입자의 경우마저 처방전 없이 구입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것은, 건강을 얻으려면 그 대신에 어느 정도의 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또는 지불만 하면 된다)고 하는 뿌리깊은 사상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즉, 의료의 실제효과보다 의료를 받는다고 하는 의식적이고 공희적인 소비가 문제이다. 따라서 '하층계급'에게서는 의약품에 대한 강박관념적 수요가, 유복한 계급에게서는 의사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 의사는 상층계급에서는 오히려 '육체의 정신분석가이며, 하층계급에게는 물질적인 재화와 기호의 분배자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의사와 약은 치료기능보다도 문화로서의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잠재적'인 마나(mana)로서 소비의 대상이 된다. 이 소비는 물론 완전히 현대적인 윤리에 따라서 행해지는데, 이 현대적인 윤리란 육체는 봉사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윤리와는 반대로 각 사람은 육체에 봉사해야 한다 교양을 몸에 지니는 것과 똑같이 자신의 육체에 신경쓰는 것이 현대인의 의무이며 존경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현대여성은 베스타 (Vesta : 로마신화에 나오는 아궁이, 주방의 여신)를 섬기는 처녀인 동시에 자신의 육체 관리인이며, 육체를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보존하는 데 신경쓰고 있다. 기능성과 성스러움이 여기에서는 혼연일체가 되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의사는 전문가가 받아야 할 존경과 성직자가 받아야 할 공경을 한몸에 다 누린다.(소비의 사회)
날씬함에 대한 강박관념: '몸의 선’
몸의 선(線)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싶다는 강박관념도 건강의 경우와 똑같은 정언적 명령에 따라 설명된다. 물론 (그밖의 문화적 가치를 언뜻 보면 분명한 바와 같이) 아름다움과 날씬함은 그 어떠한 자연적인 친화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통통함과 뚱뚱함이 아름다움으로 간주된 곳도 시대도 있었지만, 소비사회의 입구에 만인의 권리 및 의무로 새겨져 있는 강제적, 보편적, 민주적인 이 아름다움은 날씬함과 떼어놓을 수 없다. 형태의 조화에 근거하는 아름다움의 전통적 정의에 의하면, 뚱뚱하든 또는 날씬하든, 땅딸막하든 또는 호리호리하든 상관없었는데,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사물의 기능성이나 도표중의 곡선의 아름다움과 똑같은 대수학적 조화에 지배된 기호의 조합의 논리에 따르는 이상, 현대적 아름다움은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몸이 지니는 아름다움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자연스런 살붙음을 부정하고 모드를 예찬하는 남녀 패션모델의 외형에서는 마르고 야윈 것도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이것은 기이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소비를 유행의 조합적 과정의 보편화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유행이 신식과 구식, '미(美)'와 '추(醜)', 도덕성과 부도덕성 등의 대립개념을 무차별적으로 차례차례 교대시킨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행이 뚱뚱한 몸과 날씬한 몸을 교대시킬 수는 없다. 그곳에는 절대적 한계 같은 것이 있다. 음식물이 과도하게 소비되는 사회에서 날씬함은 그 자체로서 차이표시 기호가 되기 때문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문화와 과거 세대의 사람들에 비해서, 또는 농민계급 및 하층계급에 비해서 호리호리함은 차이표시 기호로서 기능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로서 차이표시 기호가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형식적으로 대립하는 기호(신식과 구식, 치마 길이의 길고 짧음 등)가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대립된 기호들은 차이 표시 기호로서, 차이표시 용구를 갱신하기 위해 서로 교대하는 일은 있어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결정적으로 배척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특히 유행에 지배된 영역인 '몸의 선'의 영역에서는 역설적이지만 유행의 주기적 변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이곳에는 차이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본 바와 같은 현대적 현상인 자기육체와의 공범관계 방식 자체와 관련된 그 무엇이 존재해야 한다.
육체 '해방'의 결과 육체는 배려의 한 대상이 되었다. 이 배려는 육체그 자체 및 육체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이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데, 육체는 항상 이 이중(重)의 배려(double sollicitude)의 대상으로 '해방된다. 그 결과 우리가 육체의 현대적 제도로 묘사한 욕구충족적 배려의 거대한 과정에는 똑같은 중요성을 지닌 억압적 배려에의 집착이 포개지게 된다.
육체에 관한 현대의 모든 집단적 강박관념 속에서도 이 억압적 배려가 표현되고 있다. 소독, 살균, 예방 등의 긍정적 환각만이 아니라 접촉, 감염, 오염 등의 부정적 환각을 수반하는 모든 형태의 위생관념은 '유기체로서의 육체를, 특히 그 배설 · 분비기능을 추방하는 경향이 있으며, 소거법에 따라서 매끈매끈하고 상처없고, 성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격리되고 또 그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보호된 사물로서 부정적으로 육체를 규정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위생의 강박관념은 육체를 부정하고 배척하며 억압하는 청교도주의적 도덕을 직접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윤리는 보다 교묘하게 육체로부터 위생관념만을 추출하여 망각되고 검열된 욕망의 단순한 기호형식으로 만듦으로써 육체를 신성화한다. (과장되고 강박관념적인) 위생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도처에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위생에 대한 강한 관심은 비장(悲壯)한 도덕보다 유희적 도덕의 기초가 되며, 육체에 대한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신앙의 힘을 빌려서 심층의 환각을 '멀리한다'. 즉, 육체에 신경을 써서 '황홀'하게 하여, 육체가 욕망과 직접 결탁할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막는다. 요컨대 위생에 대한 강한 관심은 청교도주의 시대의 억압적 윤리에 가깝다기보다는 미개사회에서 제물용으로 육체를 '준비하는' 기술 및, 육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유희적 성격을 지닌 기술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육체 그 자체와 동시에 '해방된, 육체에 대한 이런 종류의 공격적 충동은 위생에서보다도 절식요법의 고행 속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옛날 사회에서는 단식의 의례를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종교상의 축제와 관련된 집단적 의식이며, 육체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적 충동을 집단적 계율의 내부로 완전히 흡수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식량 및 '소비'에 대한 육체의 관계의 양면성은 모두 이 점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여러 가지의 단식 및 고행 제도는 육체의 전면적이고 민주적인 해방에 부합하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풍습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현대의 소비사회는 어떠한 억압적 규범도 참아내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규범을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육체를 해방시키고 그 욕구를 실질적으로는 모두 충족시킴으로써 소비사회는 인간과 그 육체 사이에 일찍이 당연한 것으로 존재하고 있는 조화 있는 관계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대단한 오해다. 왜냐하면 육체와 동시에 해방된 육체에 대한 공격적 충동이 오늘날에는 사회제도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엄청난 배려의 중심부로 역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진국 성인 인구의 3분의 1(여성의 경우에는 50%에 달한다. 미국의 어떤 조사에 따르면 미성년 여자 446명 중 300명이 절식요법을 하고 있다)을 연루시키고 있는 실제적인 자기억압의 시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이 공격적 충동이다. 이러한 충동은 유행의 영향보다더 강력하게 작용하며 (물론 유행의 영향도 부정할 수 없지만), 비합리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자기파괴에의 열중을 조장한다. 그렇게 되면 최초의 목적이었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매일 집요하게 반복되는 징벌적 훈련의 단순한 구실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 단계에서 육체는 갑자기 감시할 필요가 있는 위험한 사물이 된다. 《보그(Vogue)》지의 야윈 모델들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육체를 '미적' 목적에 굴복시키고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야윈 모델들의 모습에서 육체 예찬으로 나아가는 풍부한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성과 풍부한 사회 그 자체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몸의 선에 대한 숭배에서는 아름다움과 억압이 굳게 결합되어 있는데, 이 경우 육체는 물질성과도 또 성욕과도 관계없으며, 욕망충족원리와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논리 사회조직화의 원리인 유행의 지상명령과 정신적 조직화의 원리인 죽음의 지상명령 의 담당자가 된다. 아름다움과 억압의 이 결합은 우리 '문명'의 주요 패러독스 가운데 하나다. 몸의 선에의 신앙과 호리호리한 몸에 대한 매혹이 이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폭력의 표현형식이며, 육체가 그곳에서는 문자 그대로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으며, 완성된 상태에서 경직되는 동시에 공희가 한창 진행되는 경우에서처럼 격렬하게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이 육체를 통해서 이처럼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스칸디 사우나의 훌륭한 효과, 허리둘레, 히프, 넓적다리, 장딴지를 몰라볼 만큼 단단하게 해주며, 배를 쑥 들어가게 해주고 쓸데없는 지방을 없애주며, 피부를 미끈미끈하게 해주어 새로운 몸의 선을 약속합니다”.
“스칸디 사우나를 3개월 사용한 끝에.. 나는 군살을 뺐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몸매와 정신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저칼로리 식품' 및 '인공감미료', 무지방 버터, 게다가 절식의료용품 등이 대대적인 선전을 통해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어 식품회사와 투자가들이 큰 돈을 번다. 삼천만 명의 미국인이 뚱뚱하거나 또는 뚱뚱하다고 생각한다고 추정된다.
피로
현재는 배고픔이 세계의 문제인 것처럼, 앞으로는 피로가 세계적인 문제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이것들은 서로 배제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만성적이며 관리할 수 없는 피로는 앞에서 언급했던 관리할 수 없는 폭력과 나란히 풍요로운 사회에는 으레 붙어다니는 것이며, 특히 굶주림과 만성적인 빈곤이 극복된 결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前) 공업화사회에서는 이 굶주림과 빈곤이 아직도 주요 문제이긴하다. 따라서 피로는 탈공업화사회의 공통된 증후군으로서 극도의 이상현상이나 안락한 생활의 '역기능'과 같은 생활에 속하고 있다. '새로운 세기병'인 피로를 우리는 그밖의 아노미 현상과 관련시켜 분석해야 한다. 이 다양한 이상(異常)현상들은 그것들을 해결하는 데 모두가 협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재발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폭력이 목적이 없는' 것과 같이, 현대의 피로에도 '이유가 없다.' 그것은 근육의 피로나 체력의 소모와는 무관하며 육체의 혹사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정신적 소모'나 '우울 상태', 심리적 원인에 의한 전신피로 등이 언제나 화제가 되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종류의 설명은 현재 대중문화의 일부이며 모든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다. 누구나가 새로 발견한 사실이라고 말하고자 할 뿐 이 설명을 구실로 삼아 자신의 신경이라고 하는 올가미에 걸려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 같다. 맥이 풀리는 듯한 기쁨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피로가 폭력 및 비폭력과 똑같은 폭로 기능을 가지고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힘든 일을 하려 하지 않는 것, 긴장의 해소, 편리하고 자동화된 생활 등을 향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이 사회는, 사실 욕구의 충족을 총결산해보면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점점 더 많아지는 사회이며 개인과 집단의 균형상태를 실현하는 기술적 조건이 증가함에 따라 이 균형 자체가 더욱더 위험에 노출되는 사회, 즉 스트레스와 긴장 그리고 흥분제로 가득 찬 사회이다.
소비사회의 영웅들은 지쳐 있다. 소비사회는 '갈망, 욕구와 그 충족'을 짝지어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경쟁 및 사회적 상승의 강요와 동시에 개인적 쾌락의 극대화라는 앞으로 극도로 내면화될 지상명령과의 갈등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내부에 점점 증대하는 불균형을 낳는다. 이것은 숑바르드 로베(Chombart de Lauwe)의 견해인데, 우리도 그에게 동의해도 될 것이다. 무수한 상반된 강제를 받으면 개인은 자신의 통일성을 잃어버린다. 욕구와 갈망 사이의 내면적 불균형에 불평등이 초래하는 사회적 불균형이 겹쳐 이 사회는 점점 적대관계에 가득 차고 해체된, 즉 '살기 불편한 상태의 사회가 된다. 따라서 피로(또는 '무력증')는 이러한 생존조건에 대한 현대인의 수동적 거부형태의 반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동적 거부'가 사실은 잠재적 폭력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공공연한 폭력이 그러하듯이 있을 수 있는 몇몇 반응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또한 양면성의 원칙의 재구축이 필요하다. 피로, 우울상태, 노이로제는 공공연한 폭력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또한 그 반대로도 가능하다. 탈공업화사회에 사는 시민의 피로는 공장노동자의 잠재적인 파업, 작업 정지, '슬로잉 다운(slowing down)', 학교 학생들의 '지루함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살에 파고든 손톱'이라는 의미에서 '육체화된', 즉 몸속에서 내부적으로 전개되는 수동적 저항의 형태이다. 사실 피로에 관한 모든 단순소박한 견해는 뒤집어야 한다. 피로는 과다한 외면적인 사회활동과 상반되는 그러한 수동성이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사회관계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수동성의 강제에 대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형태이다. 피곤한 학생이란 교사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듣고 있는 학생이며, 피곤한 노동자나 관리란 작업상의 모든 책임을 빼앗긴 노동자나 관리이다. 현대시민의 카타토니(catatonie) (분열증의 특징인 무기력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 정치적 '무관심'만 하더라도, 진정한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고 웃음거리의 선거권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무관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벨트컨베이어에 의한 전송대 작업이나 데스크워크의 육체적·정신적 단조로움, 강요된 서서 하는 작업, 앉아서 하는 작업, 스테레오타입화된 동작 등 현대사회에서의 만성적 운동부족의 근육, 혈관, 내장의 카탈렙시 (catalepsy,강경증)에 기인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순진무구한 전문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병리적' 피로를 스포츠나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로란 잠재적 이의주장이다. 자기 자신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육체에 '깊이 파고드는' 이의주장, 그것이 피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일정한 조건하에서 그들이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의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흑인들이 우선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정한 수동성은 체계에의 자발적인 동조 속에서, 가령 쉴 틈조차 없이 일에 몰두하는, 생기에 가득 찬 눈빛과 탄탄한 체력을 지닌 '정력적인' 관리직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피로라는 것은 만성적 또는 무의식적인 반항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활동이다. 이렇게 해서 피로의 기능이 분명해진다. 모든 형태의 '슬로잉다운'은, 노이로제와 마찬가지로,진짜 완전한 '고장'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1968년의 5월혁명이 보여주었듯이, 피로는 잠재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공공연한 폭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5월혁명의 운동이 도화선을 달리는 불꽃처럼 금세 세계속으로 퍼져가고 있다는 사실도 이렇게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무기력상태, 막연한 불안, 일반화된 수동성 등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사실 체념, 피로나 운동의 후퇴에 있어서조차 활동적이기 때문에 곧 동원 가능한 잠재적 에너지였다. 따라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5월혁명 이후 운동의 퇴조만 하더라도 사회과정의 설명할 수 없는 '역전'이 아니라 공공연한 반항이라는 형태에서 잠재적인 이의주장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이다.’이의주장'이라는 말은 엄밀하게는 후자의 형태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거부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로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심리=사회학적 해석을 넘어서 피로를 우울상태의 일반적 구조 속에 위치지울 필요가 있다. 불면증, 편두통, 만성두통, 병적인 비관이나 식욕부진, 무력증 또는 강박관념적인 활동과다증 등의 증후는 형식적으로는 서로 다르거나 대립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교환되고 서로 대체되고 있다. 신체적 '전환'이 항상 모든 증후의 잠재적 '전환가능성'을 항상 동반하고, 심지어는 그것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우울상태의 논리 (증후가 기관상의 질환이나 실제적인 기능장애와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된 것)가 소비의 논리 그 자체(욕구와 그 충족이 물질의 객관적 기능과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다음에서 다음으로 서로 지시·교체하며 근본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는 것)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욕구의 흐름과 우울증적 증후군의 '유동성'을 조정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파악하기 힘들고 한계가 없다는 성격과 체계적인 전환가능성이다. 소비의 체계와 무의식적인 욕구불만을 벗어나려는 해제반응/신체화 (정신질환이 신체상의 질환으로 바뀌는 것)의 체계(피로는 그 일면에 불과하다)가 구조적으로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도 우리는 양면성의 원칙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 사회의 모든 과정은 욕망의 양면성을 해체하고 분열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향유와 상징기능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던 욕망의 양면성은 같은 논리에 따라서 두 방향으로 분열한다: 욕망의 긍정성은 모두 욕구와 그 충족의 연쇄 속으로 이행하고 그 속에서 일정한 목적에 따라 이끌려가면서 사라진다. 욕망의 부정성은 모두 통제 불능한 신체화 또는 폭력행위 속으로 이행한다. 이렇게 해서 욕망의 전(全)과정의 깊은 통일성이 분명해진다. (풍요, 폭력, 마약 따위에 의한) 행복감, 우울증 등) 다종다양한 현상의 출현은 이 욕망의 양면성을 이해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이 현상들은 일체가 되어서 '소비사회'를 특징지으며,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관통하는 논리를 해명하는 것은 고전적인 인간학의 시각으로는 불가능하다.
"정신신체의학 전문가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두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두통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결장염, 불면증, 가려움증, 습진, 성적 장애, 비만, 호흡기·소화기 · 순환기 계통의 장애...... 혹은 단순한 만성 피로. 이 마지막 것이 원인인 경우가 가장 많다.".
우울상태가 노동의 강제가 끝나고 충족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금요일 밤에서 월요일 아침까지 이어지는 사장들의 편두통, '정년퇴직자들'의 자살 또는 갑작스러운 죽음 등. 또한 오늘날 제도화되고 의례화된 '여가를 위한 시간'에 대한 요구의 배후에서 노동이나 활동에 대한 요구, 즉 '무엇인가를 하고' '활동한다'는 것에의 강박관념적 요구가 증대하고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 사실을 우리의 경건한 도덕주의자들은 곧 노동이 인간의 '태어나면서부터의 사명'이라는 것의 증거라고 보았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이러한 비(非)경제적 요구 속에 표현되어 있는 것은 오히려 욕구의 충족이나 여가 속에서는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공격성 그 자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 공격성은 노동에 대한 요구에 의해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욕망의 양면성의 심층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다시 노동에 대한 요구나 '욕구'가 되고, 이렇게 해서 다양한 욕구의 사이클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욕구의 사이클은 욕망에게 있어서는 일단 뛰어들면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치안을 잘 하기 위해서 폭력이 순화될 수 있듯이, 피로와 노이로제도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문화적 특성이 될 수 있다. 특히 지식인이나 특권계급 사람들 사이에서는 피로와 욕구충족에 관한 모든 형태의 의례가 행해지고 있다. 이 문화적 '알리바이'는 다른 계급 사이에도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단계에 들어가면 피로는 더 이상 아노미가 아니며, 지금까지 말한 것도 이러한 종류의 '불가피한 피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이 피로는 '소비되는' 피로이며, 교환 내지는 사회적 지위의 사회적 의례의 일부가 된다.
예술작품에 나타난 질병, 카뮈의 《페스트》
카뮈는 그의 책 《페스트》에서 프랑스 오랑 지방에 대해 질병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도시는 '아주 흥미진진하지는 못한 곳'으로, 활기차고 분주해 보이는 일상도 습관이 되면 만사가 순조롭다. 그는 게오르그 짐멜이 사회학적으로 묘사한 대도시 삶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짐멜은 1903년에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그는 이 글에서 현대의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이 급속도로 바뀌는 외적·내적 자극들에 의한 심리적 영향으로 신경과민을 겪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삶은 급속도로 교체되었고 외부 환경의 흐름과 모순은 삶을 위협한다. 외부 상황에 대해 제대로 반응할 능력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무감각해졌지만, 이 무감각은 오히려 개인들을 방어해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이제 삶에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바로 무감각이다.
시민들은 권태에 절어 있었지만 또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낌새가 없는 도시였지만 거센 기후와 사업 거래, 그리고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황혼과 쾌락 때문에 그들은 건강해야 했다. 이와 꼭 같은 정서가 오늘날의 도시를 지배한다. 빠르고 분주하게 돌아가는 현대 도시에서는 조금만 주춤하면 그 속도로부터 밀쳐지면서 외톨이가 되고 만다. 병을 앓는다는 것은 삶의 속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도시는 건강한 몸만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쥐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말이 안 나게 조용히' 처리해야 할 문제이다. 병 자체보다 사람들에게 불안과 동요를 유발해서 도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의사 리유는 진찰실을 나서다가 죽어있는 쥐를 발견한다. 재미있는 것은 건물 수위의 반응이다. 이 건물에는 절대 쥐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의심이나 의문도 배제하려는 '단호함'이다. 다음날 피투성이가 된 쥐 세 마리를 본 수위는 누군가 쥐덫으로 쥐를 잡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아예 쥐덫을 놓은 '범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쥐의 출현은 다른 누군가의 탓, 즉 책임질 누군가를 먼저 지명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소홀함을 이유로 자신이 지명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수위에게는 쥐가 나타나거나 죽어 뒹굴고 있을 가능성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반면, 리유는 왕진을 돌면서 죽은 쥐들을 목격한다. 병원으로 돌아온 리유가 수위에게 또 쥐를 보았느냐고 묻자 수위는 "제가 지키고 있단 말씀이에요. 그래서 그 나쁜 놈들이 감히 가져오지 못하는 겁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한다.
전염병이 생기기 전 유럽은 위생 상태가 아주 불량했다. 길거리에 오물들이 넘쳐났고 목욕은 거의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전염병의 발발로 인간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게 되었고 또 사적 공간이 증가하게 하였다. 전염병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격리였기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수위에게 쥐 '따위'가 중요했던 것은 건물의 명성에 손상을 입히는 일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관리인의 책임에 대한 문제지쥐 자체가 아니다. 건물의 이미지를 책임져야 하는 자신이 관리하는 건물에서 죽은 쥐가 발견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틀 또는 사흘 만에 사람이 사망하는 일이 20건에 달해도 병명은 삼가는 상황이었다. 확증은 없으나 증세가 불안한 상황만이 계속되고 의사끼리 주고받는 대화에는 “분석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페스트가 확실하다"고 언명되었다. 그들이 '페스트'를 입에 올리기를 삼간 것은 페스트의 원관념이 가진 '속수무책'의 성격 때문에 '재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지방, 즉 오랑은 열광이나 쾌락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해도 권태와 무심함, 습관이 팽배한 도시다. 이곳 사람들은 어떤 무언가의 낌새 때문에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재앙의 존재 따위를 믿지 않는다. 재앙이란 비현실적인, 그저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인 리유에게는 페스트가 멈추거나, 혹은 계속되더라도 병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대비 조치와 싸워 이기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있었다. 그는 문득 창밖 공장으로부터 나오는 노동의 소리를 듣는다. 질병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해 가야 할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명된 '페스트'는 의사끼리 주고받은 말이고, 관청 직원에게조차 알려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을 삼간다. 주목할 점은 어떤 것에 대한 명명이다. 단정적으로 진단을 내리는 것, 그래야만 조치가 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리유의 동업자인 리샤르는 병 자체가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법률에 규정된 중대한 예방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그 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성이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심사숙고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국은 행정 처리를 위해 '공식적으로’그것을 페스트라는 유행병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표한다. 현청의 지사는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리유는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문제가 아닌 시간문제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리유는 “표현에는 관심없다", "다만 시민의 반수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한 후 물러난다. ‘페스트’는 이미 중세를 휩쓸었던 흑사병으로서의 시니피앙signifiant*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인 재앙으로서의 상징성 때문에 페스트가 선포된다는 것은 페스트의 과거 이미지를 전부 끌어오는 것이다.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 몰살을 의미하는 이 병은 따라서 명명하는 순간, 명명한 사람과 그를 지지한 모든 사람이 후 사물에 대한 명칭인 시니피에 signifié에 상응하는 것으로, '기의'라고 하는 시니피앙은 표현된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를 뜻한다.
피스트의 창궐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병이 생겼다. 바로 '믿음'과 '불신'라는 단어다.. 사람들은 유행병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열 명쯤 죽어 나가면 이 세상이 끝장이라도 난 듯이 떠들어댄다. 환자 가족 그리고 환자들과 옥신각신 담판이 이어진다. 환자들은 의사가 하는 일의 힘을 덜어주고 자신들의 몸을 그에게 완전히 맡겼다가 점차 꺼려하고 불신으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멍울의 절개 수술이 효과를 보인 것은 불과 몇 명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원하면 의사들의 실험 재료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갈 뿐이었다. 사망자 수가 의미하는 것은 '우려'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마침내 공문이 전보로 내려진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참고문헌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2004
질병정복의 꿈, 바이오 사이언스, 이성규 지음, MID, 2019
질병, 실재하는 추상, 최은주 지음, 은행나무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