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제품학
기호(기호 記號 또는 기호(嗜好))에 대한 욕망 (I)
퍼스 기호 개념 : “모든 사고는 기호이다."
퍼스 (Peirce 1931-1958)는 기호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해 놓았다. 그에 의하면 기호에는 도상 icon, 지표 index, 상징 symbol 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논의된 것과는 다른 기호의 성격을 갖고 있다.
도상
대상체와 유사한 기호를 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상은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대상체와 비슷하게 보이거나 비슷한 소리를 내거나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꽃님의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는 중명사진은 꽃님의 얼굴과 닮았기 때문에 꽃님의 도상이다.
지표
대상체와 실존적 연결을 이루고 있는 기호를 지표라고 한다. 지표와 대상체 사이에는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연기는 불의 지표다. 손가락에 낀 반지의 다이아몬드는 부의 지표이다. 문고리에 남긴 지문은 도둑의 지표이다. 콧물, 재채기, 미열 등은 감기나 알레르기 같은 병의 지표이다. IQ 수치는 지능의 지표이다. GNP는 국가의 경제적 힘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통계 수치들은 어떤 현상들의 지표이다.
대명사 일반과 지시대명사(<여기>, <저기>, <이것>, <저것> 등), 그리고 시제 (<어제>, <내일> 등)는 모두 지표이다. 지표는 우리 주변에도 수없이 많다. 도상과 마찬가지로 지표도 더러는 진실을 말하고 더러는 거짓을 말한다. 누더기 (걸인의 지표)를 걸친 <거지 왕자>가 있는가 하면 무일푼인 주제에 빌려 입은 옷, 빌려 탄차로 재벌 아들을 흉내내는 자가 있다.
상징
윤리의 상징은 임의로 만들어진 기호이다. 그래서 기호와 대상체 사이에 어떤 연관이나 유사성이 없이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하면, 약속 또는 사회적 계약이 상징이 지니는 의미의 원천이다. 세계 각국의 말(언어)이 모두 상징이다. 학교 마크들은 상징이다. 아라비아 숫자 <8>은 상징이다. <8> 기표 속에서 <여덟>이라는 개념 (기의)과 비슷한 무엇도 찾을 수 없다. 단지 약속으로 8모양은 <여덟>을 의미한다고 기호 사용자들이 서로 동의한 것에 불과하다. 8자를 90도 회전시키면 무한수를 나타내는 ∞가 된다. ∞에는 8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어 있다. 두 가지 기호가 사실은 똑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약속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말로<개>라고 써놓은 글은 상징이다.<개>자에 개 같은 데라곤 전혀 없
다. 약속으로 그렇게 배웠을 뿐이다. <꽃님>이란 이름은 상징이다. 꽃님을 직접 만나보면 꽃 같은 데라곤 한구석도 없는 얼굴이다. 다만 약속으로 얻게 된 상징일 따름이다.
기호는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다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 사이에 관계를 맺어 주는 '제3의 어떤 것, 기호는 바로 이 '세번째 것'에 해당한다. 기호의 특징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기호는 두번째 것, 즉 어떤 대상과 세번째 것 사이에서 인식관계를 맺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두번째 것을 첫번째 것과 관계 맺는 작용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인식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떤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 또한 알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결합관계를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관습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구분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심리적인 것이다. 전달되는 기호와 하는 전달되지 않는 기호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정말 기호를 통해 이해하는가?와 같은 단순한 질문이라면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열거한 우리의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물고기를 척추동물로 분류하려고 '물고기'에 대한 의미를 탐색하는 동물학자와 같은 상황에 우리가 놓인 셈이다.
기호의 근본적인 기능은 상관관계가 없는 관계에 상관성을 부여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기호는 관계를 직접 실행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이루어지도록 보편적인 규칙과 습관을 구축한다.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직선상을 일정한 빠르기로 나아가는 운동과 입자들이 자리이동을 하는 가속도운동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관계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인식이란 어떤 면에서 볼 때 그 관계에 상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란 그 이상의 무엇이다. 기호의 경우, 인식내용에 대한 지식을 제외한다면(이런 지식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스럽지만), 우리의 모든 지식과 사고는 기호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기호란 한쪽에는 대상이, 다른 한쪽에는 해석내용이 존재하는 것이며, 해석내용과 대상 사이에는 고유한 상응관계가 유지된다. '고유한 관계'라고 말한 이유는, 유사성에 근거하는 상응관계가 기호의 경우, 보다 밀접한 특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 세상은 기호로 가득차 있다
세상은 기호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 기호들은, 알파벳 문자나 교통신호 표지판, 또는 군대의 제복처럼 모두 단순한 것은 아니다. 기호는 보다. 복잡하게 뒤틀려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기호에서 '자연스런 정보를 취하게 된다. 체코산 기관총이 콩고 반란군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볼 때, 그 거기에는 명백한 정보가 들어 있다. 그러나 체코 정부군이 미국 무기를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다 상기하지 못한다면, 이 정보는 이차적인 기호가 되며, 정치적인 선택가능성을 드러낸다.
세상의 기호들을 해독하는 일은 언제나 대상에 대한 무지와 싸우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 모두에게는 불어가 아주 자연스런 것이어서, 불어가 기호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아주 복잡하고'자연스럽지 않은 체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언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언의 표현양식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부단한 관찰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기호학자도 언어학자처럼 '의미의 조리실'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기호해독은 거대한 사업이다. 왜일까? 어떤한 의미라도 결코 고립된 방식으로 분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청바지를, 청소년들이 멋에 대한 취향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설정한다면, 또는 고급 잡지에 사진으로 등장한 수프냄비를 대단한 촌스러움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규정한다면, 그래서 이와 비슷한 다양한 해석을 모아서 사전의 인용항목처럼 나만의 기호목록을 만든다면,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호는 차이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기호학이 생기기 시작한 초기에 사람들은 소쉬르의 말을 따라, 기호학은 사회생활 속에 존재하는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데 있으므로 본질적인 임무는 여러 대상들(의복, 음식, 이미지, 의식, 예법, 음악 등)의 의미체계를 구성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해볼 만하다. 그러나 원래부터 방대한 이 계획이 진전되어 가면서 기호학은 새로운 임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임무란 전언 속에 감추어진 '내포의미, 즉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는 2차원적인 의미를 수수께끼를 풀 듯이 밝혀 내는 것이다. 내가 신문에서 '사치스럽지도 않고 자신에 차 있지도 않지만 열기로 가득한 봄베이 식당의 분위기'라는 기사의 제목을 읽는다면, 분명히 나는 그 정보를 통해 문자 그대로 국회 만찬식의 분위기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부정형의 미묘한 균형이 만드는 신문문장의 상투적인 형태 또한 느낄 수 있고, 이 형태에서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감지할 수도 있다. 이 같은 현상(내포의미)은 항상 존재하므로 이제부터는 모든 언어학적 연구성과와 더불어 이런 현상들을 연구해야 할것이다.
기호학의 임무가 끊임없이 증가한다면,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의미작용의 범위와 중요성을 보다 잘이해하게 될 것이다. 근대에 증명 가능한 '사실'이 실증과학적 사고방식을 만들었듯이, 기호화는 현대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 롤랑 바르트 《기호학의 모험》, 1985년
기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똑같이 빈민굴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한 사람은 채플린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은 히틀러가 되었다. 양자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겠지만 자신이 맞은 가난이란 텍스트를 어떻게 읽었느냐의 차이이다. 가난을 '박탈감'으로 읽은 아이는 비행 청소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가난을 '복수심'으로 해독한 사람은 히틀러 같은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난하면서도 누구보다 의연하고 정의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소년도 있다. 아주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가난을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심연의 고통이나 의미에 다다르는 길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 쯤으로 읽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떤 이보다 깊고 맑은 눈으로 가난한 이를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의 소외와 고독을 읽는다. 가난에 담긴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를 읽어 내린다. 이처럼 환경이나 조건이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만, 거기 깊이 있는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해독이 있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넘어선다. 우리는 우리 앞의 텍스트를 읽는 만큼, 그 만큼의 세계를 형성한다.
현실은 사라지고 해석만 남는다면, 삶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라면, 그 해석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앞의 텍스트를 읽는 만큼 세계를 형성한다면 올바로 깊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고는 기호이고 기호에서 벗어난 삶이, 기호에서 자유로운 '나', 기호가 없는 물 자체(物體)가 절대 없다면, 우리는 기호(학)적으로 사고하고 사랑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 자리에 기호학이 존재한다.
욕망의 기호
라캉은 욕망과 욕구 그리고 요구를 구분한다. 욕구가 생리적인 유기체의 필요에서 비롯된다면 요구는 이것을 언어로 표현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욕구와 요구는 불일치할 수밖에 없는데 욕구를 완전하게 요구로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욕망은 욕구와 요구 사이의 차이로 나타난다. 달리 말해 어떤 욕구를 시니피앙 연쇄 속에서 대타자를 향한 요구로 전환시킬 때 불가피하게 소외되는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욕망의 토대가 된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데, 하나는 대타자의 위치에서 어떤 것을 욕망한다는 의미로서 문자 그대로 '대타자의 욕망'이란 말이다. 주체는 대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자신의 욕망처럼 생각하면서 욕망한다. 또 하나는 대타자를 대상으로 삼는 욕망이란 뜻으로 '대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 자체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다.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은 욕망이 순수하게 주관적인 갈망이 아니라 대타자로부터 오는 언어적인 것을 매개로 구성됨을 일컫는 말이다. '대타자의 욕망' 혹은‘대타자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대타자의 인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인정에 대한 욕망이 되며, 욕망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언어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면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라캉은 대상 a를 가리킨다. 대산a 는 간단히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이다. 내 욕망의 직접 대상이 아니라 내 욕망의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대상a는 당나귀 코앞에 매단 당근처럼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유인물 또는 미끼다. 내가 욕망하거나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작동시키고 나의 욕망에 견고성을 부여하는 형식적 프레임이다. 따라서 대상 a는 욕망의 뒤에, 욕망의 오프스테이지(off stage, 무대 뒤편)에 있다. 완전하게 규정지을 수도 없고, 전체도 아니며, 근본적으로 결핍, 공허, 혹은 텅 빈 지점이다. 우리가 욕망의 정확한 대상을 즉각 발견하거나 그것(it)을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공허를 메울 수 있을 텐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욕망하는 주체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불가능성이다.
기호와 상징
일상언어에서 기호는 상징보다 훨씬 자유롭게 사용되며, 그 개념 또한 유동적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상징은 기호가 될 수 있지만 모든 기호가 상징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결론은, 지금까지 그 예들을 살펴본 것처럼 기호라는 용어의 일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에 근거할 때만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베르틸 말름베르(기호와 상징》, 1977년)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는 단순히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원본과의 연결을 잃은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나 기호를 의미한다.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가 원본을 대체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인식되는 "하이퍼리얼리티 (hyper-reality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시뮬라크르"는 라틴어 simulacrum에서 유래하여, "닮은 것"이나 "복제물"을 뜻한다.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진실을 왜곡하는 그림자"로 간주했지만, 보드리야르는 이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시뮬라크르의 기반이 되는 개념은 시뮬라시옹(Simulation), 영어로 시뮬레이션이다. 현실을 흉내 내거나 대체하는 과정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이 현대 사회에서 원본과 복제의 구분을 없애며, 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하는 데 시뮬라크르는 3단계로 나뉜다.
1차 시뮬라크르: 현실을 재현하는 초기 형태로, 원본과 유사성을 유지한다. 예: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2차 시뮬라크르: 산업화 이후,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원본의 맥락이 희미해진 상태.예: 대량 생산된 사진이나 인쇄물.
3차 시뮬라크르: 원본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복제. 예: 가상현실, 디지털 콘텐츠.
시뮬라크르의 적용 사례를 보도록 하자.
먼저 현대 미디어와 대중문화 즉 텔레비전, 영화, 소셜 미디어 등은 시뮬라크르가 지배적인 공간이 되는 데 예를 들면 광고 속의 이상적인 이미지(완벽한 몸매, 이상적인 라이프스타일)를 들 수 있다. 이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새로운 기준을 창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에서의 하이퍼리얼리티도 있다. 예를 들어 SNS 프로필이 그럴 것인데, 이는 개인의 디지털 정체성은 현실과 다른 과장된 이미지로 구성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메타버스가 있는데, 이는는 가상현실 속에서의 경험은 현실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경제와 소비문화 부문에서는 상품 소비 현상을 들 수 있다.상품은 이제 실질적 효용보다 기호적 가치(브랜드, 명품)로 소비된다.
예를 들어 루이비통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뮬라크르이고, 디올백은 저 높은 곳에 사는 여인이 받을 수 있는 시뮬라크르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시뮬라크르가 현실을 대체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현실을 상실하도록 하여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이 결과 가짜 뉴스나 조작된 영상은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 소외를 겪을 수 밖에 없다.하이퍼리얼리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이미지와 기호에 의존하게 된다. 또한 디지털 아바타나 가상 정체성은 인간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시뮬라크르는 예술, 기술, 문화의 새로운 창조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은 시뮬라크르의 대표적 응용 사례로, 창의적인 경험과 상호작용 을 제공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
소비에서의 기호
우리는 기호로서의 소비를 두가지 측면에서 수행한다. 하나는 소속된 집단에의 동일화인데 제복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차별화인데 한정판 구매가 대표적이다.
옛날에는 출생, 혈통, 종교의 차이는 교환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유행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소비되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에서의 차이, 복장, 이데올로기 및 성(性)의 차이조차도 소비의 거대한 연합체 속에서 서로 교환된다. 그것은 기호들의 사회화된 교환이다. 모든 것이 이처럼 기호의 형식을 통해 교환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습속의 어느 정도의 '자유화' 덕분이 아니라 모든 차이를 승인의 기호로 통합하고 질서에 따라서 차이가 계통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또한 차이들은 서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계급의 상하, 우익과 좌익의 차이 이외에는 서로간에 긴장도 모순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스먼에 따르면 동년배집단(peergroup)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선호를 사회화하고 평가를 교환하며 서로간의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집단의 내적 상호성과 자기도취적 응집력을 보증한다. 그들은'경쟁'을 통해 집단에 '협력'하는데, 이때의 경쟁이라는 것은 더 이상 시장경쟁이나 투쟁과 같은 공공연한 폭력적 경쟁이 아니라 유행의 코드에 의해 여과된 유희적인 추상적 경쟁이다.
이상과 같이 하여 현대의 사회정치체제에서 소비체계가 지니는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적 기능은 차이적 가치의 일반화된 코드의 제도화로서의 소비의 정의와 이미 본 바 있는 교환 및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기능으로부터 추론된다.
현대의 사회체계(자본주의적, 생산지상주의적 '탈공업화 체계)는 평등주의적 및 민주주의적 대원칙, 즉 도처에 퍼져 있으며 또 작용하고 있는 이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가치체계에 근거해서 사회적 통제를 행하는 것도 아니며, 또 체계를 저해하는 정치적, 경제적 모순의 이데올로기적 규제도 행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 및 사회적 훈련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내면화되었다 하더라도, 권리, 정의 등의 이 의식적인 평등주의적 가치들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허약하며 사회의 객관적 현실과 너무나 분명하게 모순되기 때문에, 사회를 통합하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이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는, 모순이 언제든지 새롭게 폭발할 위험이 있을지라도 체계는 통합 및 규제의 무의식적 장치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믿을 수 있다. 이 장치는 평등이라는 장치와는 반대로 개인들을 차이의 체계와 기호의 코드에 끌어들인다. 문화, 언어활동, 가장 깊은 의미의 '소비'가 그러한 것이다. 정치적 유효성은 모순이 있는 곳에 평등과 균형이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있는 곳에 차이가 있도록 한다. 사회적 모순의 해결이라고 하는 것은 평등화가 아니라 차이화이다. 코드의 수준에서는 혁명이 있을 수 없다 아니, 혁명은 매달 일어난다. 그것은 '유행의 혁명'이며 무해한 혁명인데, 다른 혁명들을 실패하게 한다. (장 보드리야르)
개성화, 즉 지위 및 명성의 추구는 기호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 달리 말하면 사물 및 재화 그 자체가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실이 과소소비(underconsumption)'나 '비(非)과시적 소비(inconspicuous consumption)'의 역설을, 달리 말하면 위세의 초(超)차이화(la surdifférenciation de prestige)라는 역설을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베블렌에 따르면 과시적인conspicuous) 뽐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태도와 검소함, 겸손함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런 행동들은 결국은 그 반대로 바뀌는 한층 더한 사치, 과시의 증가이며 따라서 보다 교묘한 차이이다. 차이화는 이 경우에는 사물거부, '소비'거부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소비 중에서도 최고의 소비이다.
"당신이 대(大)부르주아라면 포시즌스(뉴욕의 고급 레스토랑)에 가지마세요.………… 음식의 가격을 보고 질겁할 젊은 커플, 비참한 생활이 지겨운 학생, 비서, 여점원, 노동자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에 진절머리가 나서 아름다운 가구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또한 뽐내는 아파트에 대해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소박한 가구류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포시즌스를 개방해주세요." 윤리에 어긋난 이러한 권유에 누가 응할 것인가? 아마도 자신의 계급으로부터 낙오되고 싶은 일부 대부르주아나 몇몇 지식인 정도가 응할 것이다. 기호의 수준에서는 절대적인 부도 절대적인 빈곤도 없으며, 부의 기호와 빈곤의 기호 사이의 대립도 없다. 그것은 차이의 건반상의 샤프(#, 반음올림표)와 플랫(b. 반음내림표)에 불과하다. "부인, 모(某) 미장원은 세계에서 제일 머리를 잘 흐트러줍니다!" "이 심플한 옷은 고급의상실이 주는 인상을 없애줍니다."
이러한 반(反)소비(anti-consommation)의 매우 '현대적인' 증후군은 어디나 있는데, 그것은 결국 메타소비(méta-consommation)이며 계급의 문화지수(文化指數)로서의 역할을 한다. 중간계급은 오히려 이점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공룡의 상속자인데 과시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는 그들이 문화적으로 순진하다. 계급의 전략 전체가 이러한 상황의 배후에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리스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회적 이동을 하는 사람의 소비가 겪는 제한 중의 하나는 상류계급이 과시적인 과소비의 전략을 통해 출세제일주의자들에게 행하는 저항이다. 이처럼 이미 도달한 사람들은 동료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경계선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이 현상은 실로 다양한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는데, 현대사회를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호의 이 형식상의 역전에 속아서 계급간 거리의 변신에 불과한 것을 민주화의 결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검소함은 사치라는 기반 위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수준에서 다시 발견된다. 지적(知的)'미제라빌리즘(misérabilisme) (가난한 자인 체하는 것과 '프롤레타리즘(prolétarisme)' (무산자無인 체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조건에 의거해 완성되는 것이다. 마치 수준은 다르지만 사라진 영웅적 과거에 의거해서 현대의 미국인들이 집단적인 오락으로서 서부의 하천으로 사금을 찾으러 가는 것과 같다: 역전된 효과, 사라진 현실, 모순된 표현에 의한이 '마귀를 쫓는 것(exorocisme)'은 도처에서 소비 및 과잉소비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효과는 어디에서나 차이 표시 논리(une logique de la distinction)에 통합된다.
이 차이화의 사회적 논리를 분석의 기본적인 축으로 결정적으로 파악하고, 차별적인 것으로서의 그리고 기로호서의 사물의 개발 (이수준만이 소비를 독자적으로 정의한다)이 그 사물들의 사용가치(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욕구')의 추방 위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리스먼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소비에서 기호(嗜好)라는 것은 개인과 이러저러한 문화적 대상물 사이에 의식적인 관계를 세우는 인간능력의 개발이 아니다. 기호라는 것은 타인과 접촉할 때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나타낸다. 요컨대 문화적 대상물은 모든 인간적 의미를 상실했다. 그 소유자는 그 문화적 대상물들을 말하자면 어떤 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물신(神)으로 만들고 있다." 리스먼이 '문화적' 사물(그런데 이 점에서는 '문화적 사물'과 '물질적 사물 사이에 차이가 없다)에 적용하고 있는 이것, 즉 차별적 가치의 우선성先性)은 퀘벡의 침엽수림지대에 있는 광산마을의 예로 설명되었다. 보고자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숲이 가까이 있어 자동차가 거의 이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 가정은 자가용차를 갖고 있다고 한다: "깨끗이 씻고 닦아놓은 이 차는 가끔 마을 주변의 군용도로 (다른 도로는 없다)를 수킬로미터 달리는 데 쓰일 뿐이다. 자가용차는 미국식 생활의 상징이고 차주인이 기계문명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의 기호이다(그리고 리스먼은 이 호화로운 리무진이 세네갈의 어느 미개간지 마을에 돌아온 흑인 퇴역 하사관의 집에서 발견한 완전히 불필요한 자전거와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 더 좋은 예로, 유복한 관리직 간부들이 시가지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 똑같은 과시적 욕구의 반사작용에서 자신들의 비용으로 별장을 지었다. 그렇지만 넓고 통풍이 잘되며 기후가 건강에 좋고 도처에 자연이 존재하는 이 마을에서는 별장만큼 불필요한 것이 없다! 이러한 예에서 위세를 위한 차이화가 순수한 상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자동차나 별장을 갖는 객관적' 이유는 결국 그 이유들보다 더 기본적인 규정성(과시의 차이효과)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
쇼핑센터는 상품을 종류별로 늘어놓지 않는다. 그것은 기호의 혼합을, 즉 소비대상으로서의 기호의 전체 중 그 일부분으로 간주된 재화의 모든 종류의 혼합을 행한다. 또한 문화센터는 상업센터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문화가 그곳에서 '몸을 팔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자: 그것은 너무 단순하다. 문화센터에서는 문화가 교양화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품(의류, 식료품, 레스토랑 등)도 역시 교양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상품이 유희적이며 차이표시적인 물품으로, 사치스러운 액세서리로, 그리고 소비재의 일반적인 파노플리 중 한 가지 요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 완전히 들어온 광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생활지혜, 새로운 생활방식, 그것은 냉난방시설을 갖춘 상점에서 쾌적한 쇼핑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되시는 분과 자녀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매일매일의 식료품, 아파트와 전원의 별장을 위한 물품, 의류, 꽃, 신간 소설이나 가제트를 구입하실 수 있으며, 그후에는 같은 장소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등." 카페, 영화관, 서점, 강당, 값싼 잡화, 의류, 그밖의 많은 사물이 상업센터에 있는데, 쇼핑센터는 그것들 모두를 만화경(萬華鏡)식으로 보여준다. 백화점이 노점시장적 광경을 제공한다면, 쇼핑센터는 소비 그 자체의 섬세한 리사이틀을 제공한다. 이 리사이틀의 모든 '예술성'은 사물의 모호한 기호에 따라 연주되고, 사물의 유용성 및 상품으로서의 지위가 승화되어 '분위기'의 게임, 즉 일반화된 새로운 문화가 되는 것 속에 존재한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일류식료품과 화랑(畵廊), 《플레이보이지와 《고생물학개론》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 오늘날 쇼핑센터는 "회백질' (두뇌, 지능)을 제공할 정도로까지 현대화되려고 한다. “물품을 파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품에 약간의 회백질을 첨가하여 팔고자 합니다...... 4층 건물, 바, 댄스홀, 그리고 몇개의 매장, 잡화류, 레코드, 문고판, 지적인 책 어느 것도 조금씩 갖추어놓습니다. 그렇지만 손님에게 아첨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손님에게 진실로 '무언가'를 제공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학실험실은 3층에 있으며, 빠짐없이 모은 레코드와 책에서는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위대한 사조(思湖)를 찾아볼 수 있고, 전위음악, 그리고 현대라는 시대를 해설하는 책도 있습니다. 이것이 물품에 첨가된 '회백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더 지닌, 아마도 약간의 지성과 약간의 인간적 따뜻함을 지닌, 새로운 스타일의 쇼핑센터가 되겠지요."
멜라네시아 원주민들은 하늘을 지나가는 비행기에 넋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 사물은 결코 자신들에게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백인들이 그것을 잡는 데 성공한 것은 그들이 지상에 빈터를 만들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유인하는 비슷한 사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나뭇가지와 리안(liane : 열대 아메리카산 칡의 일종)잎으로 모형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빈터를 구획하여 밤에는 정성껏 불을 지며 밝게 하면서 진짜 비행기가 그곳에 착륙하기를 열렬히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현대도시라고 하는 밀림을 헤매는 수렵채집자인 유인원(類人猿)들을 원시적이라고 비난하지 않고서도(그렇게 비난해도 좋지만)이 이야기 속에서 소비사회에 대한 우화(萬話)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라고 하는 기적을 받은 자도, 역시 행복의 모조품과 그 특징적인 기호의 장치를 만들고는 진정한 행복이 그곳에 착륙하기를(필사적으로라고 도덕주의자는 말할 것이다)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풍요라든가 '윤택함'이라는 것은 행복의 기호가 축적된 것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의 점차 많은 기본적인 면이 의미작용의 논리와 기호 및 상징체계의 분석영역에 속하고 있다
기호의 작용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기능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즉, 기호(힘, 현실, 행복 등)를 통해 잡기 위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하고 억압하기 위해 무언가를 불러내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주술적 사고는 자신이 만든 신화 속에서 변화와 역사를 쫓아내려고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지 및 사실 그리고 정보에 의해 일반화된 소비도 현실을 현실의 기호 속으로, 역사를 변화의 기호 속으로 쫓아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현실을 사전에 또는 사후에, 어쨌든 거리를 두고서 소비하는데, 이 거리는 기호가 만들어내는 거리다. 예를 들면 장군(드골) 호위 사명을 지닌 비밀경찰부대가 파리 경시청 지하실에서 자동소총 사격훈련을 하는 사진을 《파리 마치 (Paris-Match)》 (사진이 들어 있는 프랑스 최대의 보도지)가 게재했을 때 이 사진은 '뉴스'로서, 즉 정치적 배경을 해명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도 그 사진은 멋진 테러행위와 굉장한 폭력사건에의 유혹을 지니고 있었다. 테러행위는 일어날 것이며, 그것도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것이다. <파리 마치>의 사진은 그것의 전조이며 미리 예상된 향유이고, 이렇게 하여 모든 사악한 행위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 되어버린다. 비극적 결말인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는 항상 현기증을 일으키는 효과를 수반하고 있다. 확실히 이미지 속에 표현되고 소비되는 것은 우리의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심리적 측면은 이미지 속에 등장하지만, 그곳에서 소비되는 동시에 억압되는 것(즉, 현실세계, 사건, 역사)만큼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현기증 또는, 말장난은 아니지만, 현기증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아마존 밀림의 핵심, 현실의핵심, 정열의 핵심, 전쟁의 핵심, 매스커뮤니케이션이 묘사하는 기하학적 장소이며 매우 심한 감상벽의 원천이기도 한 이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이다.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열과 사건의 비유적인 기호이며, 기호는 이렇게 하여 안심시켜주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메시지의 내용, 즉 기호가 의미하는 것은 대체로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의 내용과 관계맺지 않으며, 미디어는 우리에게 현실세계를 지시하지 않는다. 기호를 기호로서, 그렇지만 현실에 의해 증명된 것으로서 소비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소비의 실천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이 점에서다. 현실세계, 정치, 역사, 문화와 소비자의 관계는 이해(利害), 투자 및 책임의 관계가 아니며, 또한 완전한 무관심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호기심(curiosité)의 관계이다. 똑같은 도식에 따르면, 우리가 여기서 정의하려고 한 소비의 차원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아니며, 완전한 무지의 차원도 아니다. 그것은 몰이해의 차원이다.
호기심과 몰이해는 현실에 대한 동일한 전체적 행동,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일반화되고 체계화된, 따라서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이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기호에 굶주리고 또 기호에 의해 증폭되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기초한 현실의 부인이다.
울타리, 은거로서의 일상성은 모조의 세계와 세계에 참여한다고 하는 알리바이가 없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일상성은 이 초월성의 증대된 이미지와 기호를 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평온무사한 일상생활은 현실과 역사의 현기증을 필요로 하며, 흥분하기 위해서는 소비된 항상적(恒常的)인 폭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일상성의 외설이다
사람들은 결코 사물 자체를 (그 사용가치에서) 소비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준거로서 받아들여진 자기집단에 대한 소속을 나타내기 위해서든, 아니면 보다 높은 지위의 집단을 준거로 삼아 자신의 집단과는 구분하기 위해서든,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짓는 기호로서 사물을 조작한다.
미개사회의 특징인 집단 전체로서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음과 '낭비성'은 진정한 풍요의 표시다. 우리는 풍요의 기호(signes)만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생산기구를 통해, 빈곤과 희소성의 기호를 쫓아낸다. 그러나 살린스도 말한 바와 같이 빈곤은 재화의 양이 적은 데 있지 않으며, 또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도 있지 않다: 빈곤은 무엇보다도 인간들 간의 관계이다. 미개인들의 '신뢰'를 뒷받침해주고 또 그들이 기아 상태에서도 풍부하게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사회관계의 투명성과 상호부조다. 그것은 자연, 토지, 도구 또는 '노동'의 생산물 등에 대한 그 어떠한 독점도 교환을 저지한다든가 희소성을 만들어낸다든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물은 대체될 수 있는 그 객관적 기능의 영역 밖에서는, 그리고 그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는, 달리 말해서 사물이 기호가치를 지니는 암시적 의미의 영역안에서는 다소간에 무제한적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표시적 요소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욕구와 더 이상 관련되어 있지 않다. 바로 그 이유는 사물이 전혀 다른 것(그것은 사회적 논리일 수도 있고 욕망의 논리일 수도 있는데)에 대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의 무의식적이고 불안정한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낙원은 그것이 꿈일 때 아름답지만 현실이 되었을 때 진부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질화한 유토피아에는 의미나 정체성, 초월성이나 미학은 어디에도 없다. 건물들은 오로지 “거대한 현대적 수직성”만이 있다. 그것들은 초현대적이고 초기능적이지만 아름다움도 초월의 숭고함도 찾아볼 수 없다.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물질로 빚어 현실로 이끌어낸 ‘아메리카’라는 현상은 유럽인의 눈으로 보자면 불가사의할 수밖에 없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 자동차 전용도로, 마천루, 속도, 모텔들, 광물성의 지표면들, 사막 등을 보고 난 뒤 이것들은 단지 “기호들의 영속적인 현실성”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과거도, 기원도, 창립의 진리도, 시간의 축적도 없이 그렇게 낙원으로 급조된다. 초현대성과 속도와 물량적 소비와 절대적 자유에서 그렇다. 미국이 무지막지하게 현실로 만들어버린 유토피아의 본질은 “풍요의, 권리의, 자유의, 사회계약의, 그리고 재현의 유토피아”다.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그 매혹적인 ‘유토피아’가 숨긴 진실은 밋밋함과 지루함이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을 대표하는 기표다. 퇴폐의 거울이고, 극사실적인 활력으로 넘치고, 그러나 진짜가 아닌 것. 그게 바로 캘리포니아다.
보드리야르는 캘리포니아에서 “시뮬라크르와 진위불명성의 세계적 장소”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유럽의 절대적 반테제”에서 찾아낸다. “캘리포니아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유럽에서 가져와서는, 왜곡되고 의미를 박탈당하고 디즈니랜드의 금박으로 덧칠된 상태로 그것들을 다시 차려냈다.” 이게 아메리카다! “꿈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할리우드의 영화 세트장 같은 모사물로서의 유토피아다.
보드리야르가 ‘극실재’라고 부른 것, 그것은 “처음부터 마치 실현된 것처럼 체험되어온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극실재”이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조된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에 미국은 “세계 권력의 독점적인 중심”으로 제국의 지위를 차지했다. 제국의 위세를 떨칠 때 미국 내부에서는 자신들이 제국이라는 사실을 완강하게 부정했다. 21세기로 접어들며 쇠락의 기운을 드러내고 “물렁물렁한 세계 질서, 물렁물렁한 세계적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며 급격하게 제국의 힘과 광영(光榮)을 잃자, 미국 내부에서 오히려 제국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 주장은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제국’과 ‘유토피아’는 이미 황혼이다. 보드리야르는 지구상의 유일한 ‘제국’이자 ‘유토피아’가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장엄한 광경을 주시한다.
사물은 대체될 수 있는 그 객관적 기능의 영역 밖에서는, 그리고 그 명시적(明示的) 의미의 영역 밖에서는, 달리 말해서 사물이 기호가치를 지니는 암시적 의미의 영역 안에서는 다소간에 무제한적으로 대체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표시적 요소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욕구와 더 이상 관련되어 있지 않다. 바로 그 이유는 사물이 전혀 다른 것(그것은 사회적 논리일 수도 있고 욕망의 논리일 수도 있는데)에 대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의 무의식적이고 불안정한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점을 고려하면 사물과 욕구는 이 경우 히스테리적인 또는 심신의학적인 전환의 징후와 마찬가지로 대체될 수 있다. 그것들은 미끄러짐, 전이, 자의적으로 보이는 무한한 가변성이라는 바로 이 논리에 따르고 있다. 어떤 병이 기관(器官)에 관한 것이면, 증상과 기관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마찬가지로 도구로서의 사물의 경우 사물과 그 기능 사이에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히스테리성 또는 심신의학적인 전환에서 증상은 기호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자의적이다. 두통, 결장염, 요통, 구협염, 전신피로등의 신체적 기표의 연쇄가 있는데, 증상은 이 연쇄 따라서 '거닌다(se balade)' – 기호로서의 사물 또는 상징으로서의 사물의 연쇄가 있는데, 욕구(사물의 합리적 합목적성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라 욕망)이 그 연쇄를 따라서 거니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게다가 무의식적인 사회적 논리가 미치는 결정작용이라는 다른 어떤 결정도 있는 것이다.
또 욕구를 어느 한 장소에서 추적한다면, 달리 말하면 욕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러저러한 사물에 대한 욕구로서 그것을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증상이 나타나는 기관에만 전통적인 치료를 행할 때와 똑같은 오류를 범한다. 그 기관을 치료하면 그 증상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 및 욕구의 세계는 보편화된 히스테리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이 전환 속에서 증상이 약해지는 거대한 패러다임이 되는 것과 같이, 소비 속에서 사물은 또 하나의 언어가 거절당하고 다른 무엇인가가 말하는 광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의 경우 병의 객관적 특성을 정의할 수 없는 것(객관적 특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과 마찬가지로 욕구의 객관적 특성도 정의할 수 없게 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소멸, 그러한 계속적인 이동성, 달리 말하면 어느 한 기표로부터 다른 기표로의 이러한 도주는 결핍에 근거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표층적 현실에 불과하며, 또한 바로 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되는 사물 및 욕구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표출되는 것이다.
사물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원망(願望)에는 목적이 없다 (리스먼이 말하는 '목적없는 갈망objectless craving'). 겉보기에는 대상과 향유에 쏠리고 방향 잡혀진 소비행동이 사실은 욕망의 은유적 또는 우회적인 표현, 차이 표시 기호를 통한 가치의 사회적 코드의 생산이라는 전혀 다른 목적에 대응한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사물의 모음을 통한 이해관심의 개인적 기능이 아니라 기호의 모음을 통한 가치들의 교환, 전달 분배라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기능이다.
재화와 차이화된 기호로서의 사물의 유통, 구입, 판매, 취득은 오늘날 우리의 언어활동이며 코드인데, 그것에 의해서 사회 전체가 의사소통하고 서로에 대해 말한다. 이것이 소비의 구조이며 그 랑그(langue)이다. 개인의 욕구 및 향유는 이 랑그에 비하면 파롤효과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이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다
"제아무리 요구가 많은 여성이라도, 메르세데스-벤츠로 개성적인 취향과 욕망이 만족되지 않는 여성은 없습니다! 시트와 차체의 색부터 바퀴 그리고 표준적인 또는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편리한 장치에 이르기까지 부속품 일체가 그녀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남성도, 차의 기술적 특성 및 성능을 특히 염두에 둔다 하여도, 역시 기꺼이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벤츠를 선택한 당신의 훌륭한 취향에 아내가 넋을 잃는 것을 보고 당신은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의 취향에 따라 76가지 색과 697가지 종류의 내장(內) 중에서 당신의 벤츠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여 발휘하는 것, 그것은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되는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종종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찾았는데, 머리카락에 조금 밝은 색을 주는 것으로도 나의 얼굴 및 눈빛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블론드색을 나는 레시탈의 모발염색제 시리즈에서 찾았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이 레시탈의 블론드색으로, 나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나 자신이 된 것이다."
(많은 선전 중에서 선택한) 이 두 문장은 《르몽드》지와 어느 여성주간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각각 다루고 있는 상품의 위세와 수준은 큰 차이가 있다. 호화로운 메르세데스 300SL과 레시탈 모발염색제의 '조금 밝은 색' 사이에는 사회 전체의 위계가 소용돌이친다. 이 두 문장에 나오는 두 여성은 아마도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지중해클럽에서 만날지도 모르지만). 사회 전체가 두 사람을 분리시키지만, 차이화와 개성화라는 똑같은 강제가 두 사람을 결합시킨다. 한쪽이 'A'라면 다른 쪽은 '비(非) A'인데, '개성적' 가치의 도식은 양쪽에게 똑같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optionnelle)' 상품의 '개성화된' 밀림 속에서 길을 개척하고, 얼굴색의 자연스러움을 나타내주는 파운데이션, 즉 우리의 깊은 곳에 잠재해 있는 특질을 드러내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우리를 바로 우리 자신이게 하는 차이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다.
소비의 기본적인 이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말의 절망적인 곡예에서, 또한 주술적이고 불가능한 종합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시도 속에서 이 주제가 내포하는 모순 모두가 눈에 뜨인다. 어떤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의 개성을 찾을 수 있는가? 이 개성이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을 때 당신 자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면 '진실', 자기 자신일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그 어떤 사람이 거짓된 '자기 자신으로 인해 이중적이 되었다면 존재의 기적적인 통일을 회복하는 데 조금 밝은 색'으로 충분한가? '이처럼' 자연적인 이 블론드색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이 블론드색은 자연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또 내가 나 자신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나 자신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었는가? 나는 2제곱으로 고상하게 될 수 있는가? 기업자산 중의 일종의 잉여가치처럼 나 자신에게 가치를 부가할 수 있는가? 이런 종류의 비논리적 표현, 즉 오늘날 개성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좀먹고 있는 이 내재적 모순에 대해서는 수많은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리스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기계도, 재산도, 일도 아니다. 바로 개성이다." 개성화를 주문(呪文)처럼 지루하게 늘어놓는 태도는 다음의 슬로건에 의해 절정에 도달한다.
당신의 아파트를 당신이 직접 개성 있게 꾸미세요!
이처럼 자신이라는 말을 '겹겹이 포개는 표현(자신이 직접 자기 자신을 개성화한다……!)이 현재 진행중인 사태의 진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진상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는 이 수사 모두가 말하는 것은 바로 개성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질과 특별한 무게를 지닌 절대적 가치로서의 '개성'(이 개념을 서양의 전통은 정열, 의지, 특성 또는 평범함을 지닌 주체를 창조하는 신화로 꾸며냈다), 그러한 개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죽었고, 또 우리의 기능적 세계로부터 쫓겨났다. 그런데 이 존재하지 않는 개성, 잃어버린 심급)이 지금 '개성화되려고 한다. 이 잃어버린 존재는 차이의 점차 줄어드는 다양성 속에서, 즉 메르세데스벤츠와 '조금 밝은 색'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집중적 혹은 산재적인 기호 속에서 기호의 힘을 통해 추상적인 형태로 부활하여 종합적인 개성을 재창조하고, 결국은 완전한 익명 속에서 나타내려고 한다. 왜냐하면 차이라는 것은 원래 이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엌에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것과 똑같은 타일을 까세요. 아니면 브리짓바르도의 것과 똑같은 가스레인지를 설치하세요. 아니면 당신 이름의 머리글자가 들어간 토스트를 만들어 주는 빵굽는 기계를 사용하세요. 또는 바비큐에는 프로방스산 숯을 쓰세요 등에 이르기까지 벼락부자의 호사스런 별장에서 수수한 고급옷에 이르기까지 한계적인 차이는 모두 차이 표시용구의 분배에 일반적 법칙에 따라 가장 엄격한 사회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아무것이나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유동적이면서 하나의 의례이기도 한 이 차이의 코드에 대한 침범은 벌받는 것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흥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영자와 똑같은 벤츠를 산 어느 세일즈맨이 해고되었다. 소송을 건 결과 그는 노사분쟁조정위원회에서 보상은 받았지만 복직은 되지 못했다. 사용가치로서의 사물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엄하게 등급이 매겨진 기호 및 차이로서의 사물 앞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상층계급보다 사람수가 많은 계층이 어떤 범주의 기호를 손에 넣으면 상층계급측에서는 그 수가 적은 다른 기호를 통해 차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들의 기호라는 것은 진짜 물건의 골동품이나 그림과 같이 기원에 의해서건, 호화로운 책이나 특별히 제작된 자동차와 같이 계획적인 것이건 간에 처음부터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개성화, 즉 지위 및 명성의 추구는 기호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 달리 말하면 사물 및 재화 그 자체가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실이 과소소비'나 '비(非)과시적 소비'의 역설을, 달리 말하면 위세의 초(超)차이화라는 역설을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베블렌에 따르면 과시적인) 뽐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태도와 검소함, 겸손함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런 행동들은 결국은 그 반대로 바뀌는 한층 더한 사치, 과시의 증가이며 따라서 보다 교묘한 차이이다. 차이화는 이 경우에는 사물거부, '소비'거부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소비 중에서도 최고의 소비이다.
기호의 수준에서는 절대적인 부도 절대적인 빈곤도 없으며, 부의 기호와 빈곤의 기호 사이의 대립도 없다. 그것은 차이의 건반상의 샤프(#, 반음올림표)와 플랫(b. 반음내림표)에 불과하다. "부인, 우리 미장원은 세계에서 제일 머리를 잘 흐트러줍니다!" "이 심플한 옷은 고급 의상실이 주는 인상을 없애줍니다."
기호 (記號) 또는 기호(嗜好)
리스먼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소비에서 기호(嗜好)라는 것은 개인과 이러저러한 문화적 대상물 사이에 의식적인 관계를 세우는 인간능력의 개발이 아니다. 기호라는 것은 타인과 접촉할 때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나타낸다. 요컨대 문화적 대상물은 모든 인간적 의미를 상실했다. 그 소유자는 그 문화적 대상물들을 말하자면 어떤 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물신으로 만들고 있다." 리스먼이 '문화적' 사물(그런데 이 점에서는 '문화적 사물'과 '물질적 사물 사이에 차이가 없다)에 적용하고 있는 이것, 즉 차별적 가치의 우선성은 퀘벡의 침엽수림지대에 있는 광산마을의 예로 설명되었다. 보고자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숲이 가까이 있어 자동차가 거의 이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각 가정은 자가용차를 갖고 있다고 한다: "깨끗이 씻고 닦아놓은 이 차는 가끔 마을 주변의 군용도로 (다른 도로는 없다)를 수킬로미터 달리는 데 쓰일 뿐이다. 자가용차는 미국식 생활의 상징이고 차주인이 기계문명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의 기호이다(그리고 리스먼은 이 호화로운 리무진이 세네갈의 어느 미개간지 마을에 돌아온 흑인 퇴역 하사관의 집에서 발견한 완전히 불필요한 자전거와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 더 좋은 예로, 유복한 관리직 간부들이 시가지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에 똑같은 과시적 욕구의 반사작용에서 자신들의 비용으로 별장을 지었다. 그렇지만 넓고 통풍이 잘되며 기후가 건강에 좋고 도처에 자연이 존재하는 이 마을에서는 별장만큼 불필요한 것이 없다! 이러한 예에서 위세를 위한 차이화가 순수한 상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자동차나 별장을 갖는 객관적' 이유는 결국 그 이유들보다 더 기본적인 규정성(과시의 차이효과)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순응이라는 것은 지위의 평등화 및 집단의 의식적 균질화가 아니라 동일한 코드를 공유하고 어떤 사람들을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구별하게 하는 바로 그 기호들을 나누어갖는 것이다. 어떤 집단 성원들의 순응이라기보다는 동질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집단과의 차이이다. 따라서 차이표시로 합의가 만들어지며, 순응효과란 그 결과로서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따라서 이 차이화 체계의 기능은 위세과시 욕구의 충족을 넘어선다. 체계는 개인간의 없앨 수 없는 독특한 실제적인 차이에 근거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체계가 체계로서 성립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각 개인의 (어쩔 수 없이 다른) 고유의 내용 및 존재를 없애고 그것을 차이표시 기호로서 산업화될 수 있고 상업화될 수 있는 시차적 형태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체계는 일체의 독특한 성질을 제거하고 차별적 도식과 이 도식의 체계적 생산만을 보유한다. 이 단계에서 차이는 더 이상 배타적이 아니다: 여러 차이들이 다른 색깔들이 서로 '놀고있는 것처럼 유행의 조합 속에서 논리적으로 서로 포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는 여러 차이의 교환이 집단의 통합을 공고하게 한다. 이렇게 코드화된 차이는 개인들을 분할하기는커녕 반대로 교환용구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기본적인 사실이며, 소비는 이 사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소비는 더 이상 사물의 기능적 사용 및 소유등이 아니다.
2) 소비는 더 이상 개인이나 집단의 단순한 위세과시의 기능이 아니다.
3) 소비는 커뮤니케이션 및 교환의 체계로서, 끊임없이 보내고 받아들이고 재생되는 기호의 코드로서, 즉 언어활동으로서 정의된다.
기표와 기의의 혼동
기호를 기표(表, signifiant)와 기의(記, signifié)의 결합체라고 본다면 다음 두 종류의 혼동의 본질이 분명해진다. 첫번째 유형은 어린아이와 '미개인'에게서 볼 수 있는 혼동인데, 기의 때문에 기표가 소멸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어린이나 스크린에서 사라진 인간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아프리카의 텔레비전 시청자의 경우가 해당된다.
두 번째 유형의 혼동은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수렴되는 이미지나 코드에 수렴되는 메시지의 경우 기표가 스스로 기의가 된다. 이때 두개의 것이 하나의 원환(圓環)을 만들며 합쳐지면서 기표만이 눈에 띈다. 즉, 기의의 소멸과 기표의 동어반복이다. 이 두 번째 유형의 혼동이야말로 소비를 매스미디어 수준에서의 조직적인 소비의 효과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매체로 하여 현실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쪽이 세계를 회피하여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즉 기의의 부재 증명의 배후에서 기표가 자신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기의에 수렴되는 메시지. - 타율적 메시지 - 에서 기표로 수렴되는 메시지로 이행한다. 가령 텔레비전의 경우 이미지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사건에서 이미지로서의 이미지로 이행된다. 이미지로서의 이미지라는 것은 바로 이 기의로서의 사건들과는 다른 이미지, 구경거리가 될 만한 이미지다. 그것은 브레히트(Brecht)의 말을 빌리면 '요리와 같은' 이미지여서, 흡수되면서 소멸해버리며 그 이상의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사건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독자성을 인정하려고도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적 구조인 동시에 기술적 구조인 동일한 코드에 따라서 모든 사건을 무차별적으로 재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에서도 사건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서 말하는 코드라는 것은 텔레비전의 경우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 코드(도덕적, 사회적 및 정치적 가치체계) 및 미디어 자신의 절취 (切取), 분절화의 양식인데, 미디어의 다면적이고 유동적인 내용을 중화하고 메시지가 가지는 의미의 명령적 강세로 대체하는 일정한 유형의 언설성을 강요한다. 미디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심층적 논변성은 이미지의 명시적 언설과는 반대로 시청자에 의해 무의식중에 해독된다.
상품의 기호
제품 기호화 과정의 특이점은 소비자 측면에서 제품에 이입된 기호를 지속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과정이, 일방적이거나 일회적이기보다는 상호작용적이거나 연속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상품은 단지 산업과정뿐만 아니라 관계, 제도, 이전, 문화 등의 과정들의 교차점이다. 조직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단순히 상품만을 교환하지 않는다. 상품이 교환되는 경우 그들은 상징, 의미작용, 서비스, 정보를 동시에 교환한다. 각각의 상품은 대상을 한정할 수 없는 여러 서비스의 중핵(中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서비스들이 상품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라는 페루의 말은 확실히 옳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꾸로 뒤집어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떠한 교환도 급부도 '무상(無償)'이 아니라, 가장 욕심이 없어 보이는 교환을 포함해서 모든 교환에 언제나 금전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의 기호 하에서 생산성이 가속도로 상승하는 과정 전체의 역사에서 도착점이라고 할 만한 소비의 시대는 근원적인 소외의 시대이기도 하다.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노동과정이나 물질적 생산물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 성행위, 인간관계, 환각, 개인의 충동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모든 기능과 욕구가 객체화되고 이윤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작된다고 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구경거리가 되는, 즉 소비 가능한 이미지, 기호, 모델로서 환기, 유발, 편성된다고 하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이다.
소비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쾌락주의적 및 퇴행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비과정은 더 이상 노동과정도 지양의 과정도 아니며, 기호를 흡수하고 기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마르쿠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소비를 특징짓는 것은 초월성의 종언이다. 소비의 일반적인 과정에서는 혼도 그림자도 거울에 비친 모습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의 모순도, 존재와 외관의 대립도 더는 없다. 기호의 발신과 수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 속에서 소멸한다.…소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구와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을 직시하는 일도 없으며, 자기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이 늘어놓은 기호의 내부에 존재한다. 초월성도 목적성도 목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사회의 특징은 '반성'의 부재, 자기 자신에 대한 시각의 부재이다. 따라서 부와 영광을 손에 넣기 위해 파우스트적 계약을 교환할 상대인 악마처럼 불길한 심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성적이며 행복한 분위기, 즉 풍요사회 그 자체에 의해 처음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사회 전체가 주식회사가 되어 악마와 계약을 교환하고 풍요를 대가로 초월성과 목적성을 팔아넘겼기 때문에, 이제는 목적의 부재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소비라는 특수한 양식 속에는, 상품이 가지는 물신적 초월성도 포함해서, 더 이상 초월성이 없으며 모든 것이 기호질서에 둘러싸여 존재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존재론적 분열이 아니라 논리적 관계가 있듯이, 인간존재와 그 신적 또는 악마적 분신 (인간존재의 그림자, 혼, 이상) 사이에도 존재론적 분열이 아니라 기호의 논리적 계산과 기호체계 속으로의 흡수과정이 있을 뿐이다. 행복한 때에도 불행한 때에도 인간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장소였던 거울은 현대의 질서에서는 사라지고, 그 대신에 쇼윈도가 출현했다 거기에서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기호화된 사물을 응시할 따름이며, 응시하는 것에 의해서 그는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기호의 질서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 따라서 쇼윈도는 소비 그 자체가 그리는 궤적을 반영하는 장소이며, 개인을 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흡수해서 없애버린다. 소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기호의 질서이다. 이것을 구조적으로는 코드의 심급으로, 경험론적으로는 사물이 초래하는 일반적 분위기로 규정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주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철학적 및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소외' 본질, 즉 소외시키는 심급에 의해 자아를 상실하였다가 되찾은 자신에 대해 타자가 된 본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하면 '동일한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서의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동일한 것의 타자성도 본래 의미에서의 소외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잠자기 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입맞춤하는 아이들과 약간 비슷하다. 아이들은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미 '식별하였기 때문에 그 모습을 자기 자신과 혼동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모습은 자기 자신과 무관한 분신도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타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거울 속의 모습을 가지고 논다'. 소비자도 마찬가지로 항목이나 기호를 차례차례로 바꾸어 자신의 개성화를 '연출한다. 아이와 그 모습 사이에는 공모와 질서 있는 상관관계가 있고 절대적인 대립관계는 없는 것처럼, 기호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 소비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델의 '세트'와 그 선택방식에 의해, 즉 이 세트와 자신을 조합함으로써 자기규정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는 유희적이며, 소비의 유희성이 자기인식의 비극성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귀로드(Guiraud, Pierre)는 대상과 사용자가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호를 크게 사회적 기호(Social Code), 심미적 기호(Aesthetic Code) 및 논리적 기호(Logical Code)로 분류하고 있으며 제품의 고유 특성상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제품과의 접촉과 관련한 물리적 기호(Physical Code)를 추가하고자 한다. 다음의 내용은 제품과 사용자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이러한 기호의 특성을 기술한 것이다.
사회적 기호해석은 상당히 포괄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석과정으로, 제품기호가 지니는 문화적이고 역사적, 종교적 측면들이 기호해석과정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되어진 사회적, 문화적 기호가 자연스럽게 제품에 이입되어 그 의미가 해석되며 제품 사용자의 성별, 연령별, 계층별, 사용행위별 구분을 가늠하게해준다. 또한 이러한 구분들이 서로 중첩되어 여아용 제품, 남성용 고급 브랜드 여성용 일회용 제품 등으로 제품을 세분화하게 된다.사회적 기호의 유형으로는 한국의 전통주 포장.에어 쿠션 소파. 폭스바겐 사의 뉴비틀(New Beetle)을 들 수 있다.
심미적 기호는 제품 기호가 지니는 조형적 특성 중 하나이다. 심미적 기호는 주로 예술 작품의 주된 기호적 속성이기도 하지만, 제품의 경우에도 심미적 경험에 속한 감성적 속성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와 정신적 교감을 하게 된다. 본래 심미성이라 함은 철학적 개념으로 무생물인 대상에서 정신적 가치를 찾고자 하는 정신적 노력이며 이를 통해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싫음, 쾌적함과 불쾌감을 구분하게 된다. 심미성에서의 감성이란 제품의 기호 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심미적 체험을 대상에 투영시켜 그러한 감성 속성을 제품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무생물인 대상에 인간 특유의 감성을 이입(empathy)하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감성은 대상을 볼 때 즉각적으로 지각되며,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없으며 매우 주관적이다. 또한 문화에 따라 감성의 폭과 깊이가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심미적 기호의 유형으로는 아이템사의 우편함. 데카틀론사의 잠수부용 오리발, 스텐리사의 쇠톱. 카즈사의 정수기를 들 수 있다.
제품에서의 논리적 기호는 주로 일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상을 사용할 때 주로 발생하는 속성이다. 다른 제품 기호의 속성과 다르게 논리적 기호에는 일정한 규칙과 원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제품과 사용자 간에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또한 대상의 인지 심리적 측면이 활발히 작용하게 되며, 사용경험이 축적되어 일정한 인지 모형(Mental Model)"이 형성되어 이를 통해 기호해석이 이루어진다. 논리적 기호의 유형으로는 가스오븐렌지. 전기 조리기기. 승용차 좌석조정 버튼. 전기 플러그 등을 들 수 있다.
물리적 기호, 일반적인 인공물 중에 제품이 가지는 고유의 특징 중 하나는 제품의 사용을 통해 사용자와의 접촉이 직·간접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는 제품을 잡거나 들거나, 누르거나, 맞추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물리적 접촉뿐만 아니라 제품의 표면과 질감에 시각적으로 반응하는 간접적 접촉까지도 포함된다. 이렇게 물리적, 시각적 접촉을 통해 사용자는 제품이 지니는 기호적 속성을 이해하게 된다. 물리적 기호의 유형으로는 팔꿈치 보호대. 유아용 카시트. 샌들.일명 '소시지 소파'등이 있다.
제품 기호의 외연과 내포
기호의 외연 (Denotation)과 내포(Connotation)는 기호학의 매우 기초적인 두 가지 개념이다. 외연이란 언어기호의 측면에서는 기호의 의미전달이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짐을 의미하며, 이는 사전적으로 정의되어진 내용들이다. 즉 외연은 그 기호가 일차적으로,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전달되어진다. 제품 기호의 경우에도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전화기로, 의자로, 노트북으로 지각하게 되는 것은 대상이 지니는 기호의 외연적 특성 때문이다. 이는 기표의 도상성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어 도상성을 지닌 기호는 그 대부분이 외연적 기호로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지각되어진다. 간혹 낮선 대상을 볼 때,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용도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 대상이 외연적 기호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대상을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용과 관련한 그 어떠한 단서조차도 발견하지 못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난감해 하는데, 이는 대부분이 제품 기호의 외연적 특성이 결여되어 비롯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포적 기호는 기호가 이차적으로, 은유적으로,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내포적 기호는 그것이 단독적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외연이라는 기호의 문을 일차적으로 통과한 다음 해석되어지는 기호의 또 다른 특성이다. 물론 모든 기호가 내포적 기호를 반드시 포함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포적 기호에는 외연적기호가 마치 빙산의 일각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 뉴비틀(New Beetle)을 예로 들자면, 대부분의 제품기호와 마찬가지로 뉴비틀 역시 외연적 기호로는 "폭스바겐사(Volkswagen)에서 제조하며 가격은 만8000~2만4000달러이며 5인승이고 1998년부터 판매되었고......" 등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동차가 지니는 내포적 기호에는 외연적 기호와는 대조적으로 문화적, 사회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어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대신하는 일종의 표상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 한 예로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단단해 보이는 핸드폰'에서의 기호 층위는 핸드폰이라는 외연 기호와 '단단함'이라는 내포 기호로 결합되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하나의 기호에는 여러 층위(layer)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차층위에는 외연적 기호가 존재하며 그 기호의 성질이 변화하여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면서 그 기호는 2차 층위에 머물게 된다. 기호의 의미가 더욱 더 확장되게 되면 그 기호는 또 다른 3차적 층위를 획득하게 된다. 3차적 층위의 기호는 극히 개인적인 차원으로서 개인과 소규모의 집단들이 지니고 있는 기억과 경험이 이에 해당된다.
제품 기호에는 내구성이라는 속성이 있다. 제품기호 내구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호가 소멸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통용되어지는 성질인데, 주로 기호의 유전인자에 의해 결정된다. 50여년 이상 장기적으로 판매되는 제품을 간추려 본다.
[표] 50여 년 이상 장기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제품 (출처 : 제품기호학, 조영식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1915,코카콜라(Coca Cola)의 컨토(Contour)용기,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을 연상케 하며 잡을 때 미끄러지지 않고 보기보다 내용물이 많아 보이도록 디자인되었다.
1925,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바실리(Wassily) 의자. 건축용으로 사용되었던 금속 소재를 외부로 노출시켜 금속의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
1926,정밀 기계 제조로 대표되는 스위스의 롤렉스(Rolex) 오이스터(Oyster) 시계. 세계 최초로 완벽한 방수 기능과 자동태엽 기능이 더해져 초기의 형태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1931,영국의 에드워드 존스톤(Edward Johnston)의 런던 지하철 지도 알아보기 힘든 기존의 지하철 지도를 개선하여 그래픽 디자이너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2,죠지 카와딘(George Carwadine)의 앵글포이즈(Anglepoise)작업용 램프, 구조적이고 경제적인 외관을 지니고 있어 대표적 기능주의의 제품의 효시가 되었다.
1933,뚜껑과 몸체를 일체형으로 만들기 시작한 지포(Zippo) 라이터는 철저한 품질 관리와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제품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8,독일 폭스바겐사의 비틀(Beetle). 80년대 후반까지 생산된 대표적인 국민차로서 뉴비틀(New Beetle)로 다시 원형을 복원하여 생산되고 있다.
1941,파커(Parker) 51 만년필. 실용성과 상징적 가치로 인해 만년필의 정형적을 이루고 있으며, 제품과 관련한 다양한 사건으로 인해 홍보효과가 극대화되었다.
1941,타파웨어(Tupperware)의 용기류, 저급한 소재로 인식되었던 플라스틱 소재의 탄성을 이용하여 냉장고 전용 용기를 제작함으로서 플라스틱 소재의 고정관념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0,유니버스(Universe) 서체, 아드리안 프르티거(Adrian Frutiger)에 의해 디자인되었으며 서체의 시인성과 가독성에 대한 많은 실험을 거쳐 만들어졌다.
1952,안네 자콥슨(Arne Jacobson)에 의해 디자인된 일명 개미의자(Ant Chair). 비니어 합판으로 성형된 이 의자는 합판의 탄성만으로 편안함을 느끼며, 포개어 쌓을 수 있어 공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1953,일회용 필기도구의 효시였던 빅(BiC) 볼펜, 단순한 기능적 형태와 투명한 소재의 사용으로 초기 시장에 소개될 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8,덴마크의 목수였던 올레 커크 크리스챤(Ole Kirk Christiansen)에 의해 만들어진 레고 블록 완구. 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어지다가 58년부터 본격적으로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었다.
1958,폴 헤닝센(Paul Henningsen)이 디자인한 아티쵸크(Artichoke) 조명등, 빛의 굴절량을 섬세하게 계산하여 조명 갓을 디자인함으로서 빛의 효율을 극대화하였다.
1959,루스 핸들러(Ruth Handler)에 의해 제작된 바비(Barnie)인형, 시대 상황에 맞춰 여러 유형의 인형이 제작되었으며, 70여 가지가 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1963,모나미 153 볼펜, 구조의 단순성과 생산의 용이성, 기능의 편리성, 저렴한 가격 등으로 오랜 기간 동안 원형을 유지하며 판매되고 있다.
기능/기호, 사물/기호, 존재/기호, 관계/기호, 이념/기호
참고문헌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2004
퍼스의 기호학, 찰스 샌더스 퍼스 지음, 김동식 이유선 옮김, 나남출판사 2008
현대의 신화, 롤랑 바르트 지음,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동문선 1997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2002
제품 기호학, 조영식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김경용 지음,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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