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그 날 유민기와 헤어지고 집에 온 후 태용은 고시원 방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동네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로봇이 한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다.
‘먹으면 위대한 소설을 쓰는 구슬이라니.’
그는 웃음이 나왔다.
‘근데 진짜 그런 게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것도 그냥 뛰어난 소설이 아니라 무한히 위대한 소설이라잖아. 내가 그런 소설을 쓴다면 더 이상 출판사들도 거절하지 않겠지. 그리고 아마 난 그 책 한 권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닐 거야.’
그는 유민기가 한 말을 떠올렸다.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창조한 예술가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된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고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무한한 위대함이라니.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씩은 있을 것이다. 그게 소설이든, 영화든, 자동차든 말이다. 태용에게도 그런 욕심이 있었다. 사실 그는 그런 욕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사람이었다. 위대한 작품을 발표해서 부와 명예를 얻고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받는 것, 그는 매일같이 그것을 꿈꿨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해졌다.
그런데 만약 무한히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만약 어떤 예술가가 그런 작품을 만든다면 그는 무한한 칭송을 받을 것이다. 무한한 부는 얻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무한한 명예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예술가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성공이로군. 그런데 그런 성공을 고작 구슬 하나가 이뤄줄 수 있다고? 작은 구슬 하나를 삼켜서 말이야?
태용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웃음을 그치고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로봇 같으니. 5천년을 살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지만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무한에 대해 생각할수록 가슴속이 행복으로 가득 차올랐다.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쓴 작가.’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난 무한을 창조한 작가로 불리는 거야. 그는 기분이 좋아서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고시원으로 돌아간 그는 그 날 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음 날 아침 벌떡 일어나서 유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어제 저에게 장난치신 거 아니죠? 정말 무한의 소설구슬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 맞아요?”
“물론이죠. 무한의 소설구슬을 제가 곧 가져다 드릴 테니 기다리세요. 제가 머지않아 기계도시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럼 저랑 같이 가요.”
태용이 말했다.
“저도 기계도시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기계도시는 태용이 사는 나라인 마한의 서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태용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짐을 꾸리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제 곧 고시원 방도 빼려는 참이었다. 기계도시에 갔다 온 뒤에는 다른 거처를 찾을 생각이었다. 새로운 집은 유민기가 구해주기로 했다.
사흘 후 태용은 유민기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집에서 기다렸다. 그 날 아침 그는 고시원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태용은 유리창 옆에 붙어있는 탁자 앞에 서서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으며 생각했다.
‘무한히 위대한 소설을 쓰고 나면 이런 것도 더 이상 안 먹어도 되겠지. 근데 그런 소설을 쓰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소설구슬을 삼키자마자 머리속에서 걸작이 튀어나오는 걸까? 아니면 반대로 오래 걸리려나? 위대한 작품을 쓰는 데는 일반적으로 긴 시간이 걸리는데. 어쩌면 10년이나 20년이 걸릴 수도 있겠군. 어쩌면 남은 평생이 걸릴지도 몰라. 그럼 나는 평생 소설 한 편만을 쓰고 죽는 것이구나. 하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평생 하나의 작품만을 남긴 작가들도 꽤 있잖아. 그리고 그게 무한히 위대한 소설이라면, 그 작품 하나에 인생을 다 바친다 해도 전혀 아깝지 않아. 인생이 아무리 길어도 100년 정도인데, 유한한 인생을 바쳐서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한 입 무는데 유리창 너머 먼 곳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어떤 남자가 보였다. 몸집이 크고 비대한 남자였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계속 태용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용은 처음에 그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남자는 똑바로 태용을 보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태용은 그 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용이 그를 더 자세히 보려고 하는데 남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용은 자신이 착각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샌드위치를 마저 다 먹은 뒤 음료수를 들이켰다. 마침 그 때 익숙한 차 한 대가 고시원 앞에 서더니 유민기가 내렸다. 태용은 재빨리 쓰레기를 버린 뒤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유민기도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로봇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출발 준비는 다 되셨나요?”
“그럼요. 가방 갖고 나올게요.”
“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태용은 고시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위에 남자 둘이 서 있었다. 태용이 그들을 지나쳐 가려 했지만 남자들은 비켜주지 않았다.
태용은 고개를 들고 그들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둘 중 하나가 말했다.
“네가 이태용이지?”
“네?”
태용은 의아해서 물었다.
“저를 아세요?”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태용의 머리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억센 팔들이 태용을 끌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태용은 버둥거렸지만 남자들은 훨씬 힘이 셌다.
태용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천이 목을 휘감아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캑캑거리면서 끌려갔다. 그를 잡고 있는 팔들은 굵은 밧줄 같았다. 남자들은 태용을 끌고 가더니 어떤 차 안에 집어 던졌다.
차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태용의 머리에서 천이 벗겨졌다. 태용은 신음하며 두리번거렸다. 그의 양 옆에는 덩치 큰 남자 둘이 앉아서 그를 꽉 붙잡고 있었다.
“이 새끼 맞습니까?”
두 남자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더니 태용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누구세요?”
태용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차가 출발했다. 태용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다가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조수석에 탄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그는 지난주에 도박장에서 태용에게 카드게임으로 크게 털렸던 비대한 남자였던 것이다.
“왜 이러세요? 내려주세요.”
태용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옆에 앉은 덩치가 호통 쳤다.
“입 닥쳐!”
“이러시면 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덩치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태용은 신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양 옆의 덩치들이 그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과 휴대폰을 꺼내 가져갔지만 그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용이 탄 차는 오래 달리지 않아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태용은 지하주차장에서 밖으로 끌어내려졌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그러자 덩치가 태용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태용은 억 하면서 고꾸라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들이 태용을 붙잡고 끌고 갔다. 그는 눈물이 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통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는 버둥거리는 다리로 끌려가다가 이윽고 차가운 바닥 위에 던져졌다. 천장에서 나오는 얕은 불빛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남자들이 그의 옆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집어던졌다. 로봇 유민기였다.
유민기는 태용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태용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이 로봇은 뭐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태용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비대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이 놈이랑 같이 있어서 끌고 왔습니다.”
“요즘 세상에 로봇이 있다고? 살아 움직이는 로봇이?”
“그러게 말입니다.”
비대한 남자가 이곳의 대장인 모양이었다. 그가 물었다.
“로봇, 넌 뭐야?”
유민기가 그에게 몸을 돌렸다.
“당신들이야말로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건 폭행죄에 납치 범죄입니다. 지금 당장......”
“시끄러워.”
대장이 짜증을 내자 옆에 있던 덩치가 몽둥이로 유민기를 내려쳤다. 로봇은 허리가 꺾이면서 쓰러졌다.
대장이 태용에게 걸어와 구둣발로 그의 몸을 건드리며 물었다.
“이 로봇도 도박으로 딴 거냐?”
“네?”
“네가 내 노예들을 다 털어갔잖아, 이 새끼야. 설마 벌써 잊었냐? 말해봐, 무슨 속임수를 쓴 거야?”
태용은 덜덜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 속임수도 쓰지 않았어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러자 대장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진짜에요. 전 속임수 같은 거 쓸 줄도 몰라요. 도박도 그 날 처음 해본 거예요.”
“이 새끼 말귀를 못 알아듣네. 야, 좀 문질러라.”
그러자 다른 덩치들이 몽둥이로 태용을 후려졌다. 태용은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온 몸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태용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서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쓰러져 있던 유민기가 벌떡 일어나서 절뚝이며 태용에게 다가왔다. 로봇은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밀치며 태용의 몸 위로 엎드리며 외쳤다.
“그만하세요! 그만!”
“야, 저 로봇 치워!”
대장의 말에 덩치들이 유민기를 잡아당겼지만 유민기는 온 힘을 다해서 버텼다. 그러자 덩치들이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태용은 자신의 몸 위에 얹힌 로봇의 몸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제발 그만해!”
유민기가 외쳤다.
“저 새끼 치우라고!”
대장이 외치자 남자들은 유민기를 강제로 끌어냈다. 로봇의 몸에서 금속 조각들이 떨어져나갔다. 비대한 남자가 쓰러진 태용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빨리 말하라고. 무슨 속임수를 썼어? 혼자 한 거야, 아니면 다른 새끼랑 짠 거야?”
태용은 잘 굴러가지 않는 혀로 말했다.
“아니에요, 전 아무 속임수도......”
“개소리하지 마! 도박을 처음 하는 놈이 나를 털어먹었다고? 그리고 왜 내 노예들을 다 풀어준 거야?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이 불쌍해서......”
“불쌍해? 뭐가 불쌍해?”
“노예들이요. 불쌍해서 풀어준 건데......”
대장은 태용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기껏 딴 노예를 불쌍해서 한 놈도 남김없이 다 풀어준다고? 지랄하지 마! 너, 이런 짓을 전문으로 하는 타짜지?”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태용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전 그 날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노예들을 풀어준 거예요. 선생님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진짜에요, 믿어 주세요.”
“이 새끼가 진짜!”
대장이 태용의 뺨을 후려치자 태용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야, 계속 쳐라.”
그러자 남자들이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태용은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 때 유민기가 다시 기어와서 태용을 감싸 안았다. 로봇은 온 몸으로 태용을 막으며 외쳤다.
“그만하세요! 이러다 사람 죽겠어요!”
그러자 남자들이 유민기를 끌어내더니 로봇의 머리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민기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 돼......”
태용은 유민기를 향해 손을 뻗다가 자신도 머리에 몽둥이를 맞았다. 그 순간 그의 의식이 꺼져버렸다.
태용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차가운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태용은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뒤통수가 화끈거려서 그는 옆으로 눕기 위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 유민기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선생님......”
태용은 고통으로 신음하며 유민기에게 기어가 로봇을 흔들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로봇은 몸 여기저기가 부서진 상태였다. 태용이 유민기를 흔들자 로봇의 머리에서 파편 몇 조각이 떨어졌다. 유민기의 머리에는 길게 금이 가 있었다.
태용은 로봇을 내려놓고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선생님?”
그 때 유민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용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 계세요?”
“네, 저 여기 있어요.”
태용이 힘겹게 대답했다.
“여기가 어디죠?”
유민기가 물었다.
“어떤 창고 같아요.”
“그렇군요. 전 앞이 안 보입니다. 아무래도 시각 회로가 손상된 것 같습니다.”
“맙소사......”
유민기의 목소리에서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로봇다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잘 들으세요. 전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됐습니다. 곧 시스템이 정지되고 작동을 완전히 멈출 거예요. 그러니 선생님 혼자서 기계도시에 가셔야 합니다.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무한의 소설구슬이 들어있는 금고가 기계도시의 어느 곳에 있는지, 금고의 비밀번호가 무엇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잘 듣고 기억하세요.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유민기는 금고의 위치와 16자리의 비밀번호를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태용이 비밀번호를 외웠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저희 로봇들은 무한의 소설구슬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 미래에도 금고를 열 수 있도록 일부러 아날로그 잠금장치가 있는 금고에 넣었습니다. 그 금고는 오늘날의 기술로는 절대 파괴할 수 없습니다. 오직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유민기는 그렇게 말하다가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태용이 물었다. 유민기는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러다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쥐어짜냈다.
“선생님, 꼭 훌륭한 작가가 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유민기는 말을 멈췄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태용은 조심스럽게 유민기를 흔들었다.
“괜찮으세요? 일어나 보세요.”
하지만 로봇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완전히 작동을 정지한 것이다.
태용은 지쳐서 뻗어 버렸다. 그는 유민기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