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태용은 희미한 진동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떴는데도 눈을 감았을 때와 다르지 않는 어둠이라서 자신이 눈을 뜬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여태까지 살아있다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뭐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가?’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컨테이너의 문이 열렸다. 그와 함께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며칠 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노예들은 갑작스러운 햇빛을 받자 비명을 질렀다. 태용도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렸다.
“빨리 나와!”
누군가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컨테이너의 열린 문으로 노예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태용은 사방에서 몸을 옥죄는 느낌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역시 사슬에 묶인 채 밖으로 끌려나왔다. 며칠 만에 몸을 움직이자 다리가 굳어진 것만 같았다.
그곳은 긴 선착장이 있는 부두였다. 태용과 다른 노예들은 부두에 내려 끌려갔다. 부두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해안에는 수많은 노예들이 서 있었다.
채찍을 든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노예들을 후려쳤다. 그들은 노예들에게 빨리 움직이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태용은 다른 노예들과 함께 육지 안으로 줄지어 끌려갔다.
그리 높지 않은 수풀이 우거진 작은 숲을 지나자 평야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천막들이 세워져 있었다.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철창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이 있었고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태용이 묶인 줄의 노예들은 그 중 하나의 우리 안에 집어넣어졌다. 태용은 우리에 갇히자 창살을 잡고 밖을 내다봤다. 채찍들은 계속해서 노예들을 여러 우리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산 채로 잡은 짐승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것만 같았다.
태용은 뒤를 돌아봤다. 우리 안에는 태용처럼 손발이 묶인 사람도 있었지만 묶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태용보다 우리 안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그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아예 반벌거숭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태용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 잡혀온 분들이군.”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져가는 중늙은이였다. 태용이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해적 소굴이네.”
그 말에 태용은 맥이 탁 풀렸다.
“결국 해적이 이겼구나.”
태용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선에 실려서 끌려가다가 해적의 습격을 받은 모양이로군.”
“맞습니다. 여긴 어디에 있는 곳인가요? 육지에요, 섬이에요?”
“섬일세. 베니토 해적단의 본거지가 있는 군도지.”
“베니토 해적이요?”
태용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서쪽 먼 나라의 해역에서 활개 치는 악명 높은 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놈들한테 잡혀 오다니.”
태용은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베니토 해적단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해적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지나가는 배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여객선이든 화물선이든 노예선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이 해적단이 위치한 활동 영역이 대부분 소규모 왕국들이 인접한 해역이었고, 이들의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작은 왕국들은 그들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태용은 다음 날부터 바로 해적들이 시키는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이곳 군도는 해적들과 노예들이 있는 중앙의 큰 섬을 중심으로 주변에 몇 개의 작은 섬이 있는 형태였다. 해적들은 태용과 다른 노예들을 배에 태워서 작은 섬들 중 하나로 데려갔다. 그리고 물안경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바다 속에 잠수해 들어가서 뭔가를 찾으라고 시켰다. 그들이 찾으라고 한 것은 칼 한 자루였다.
“여기 해변 어딘가에 그 칼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긴 칼이든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가져와라!”
태용은 수영을 조금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물속에서 오래 잠수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는 물속에 들어간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고, 그럴 때마다 보트를 타고 물 위에서 감시하는 해적의 채찍을 맞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태용과 다른 노예들은 하루 종일 물속에서 일하다가 해가 지면 다시 중앙의 큰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에 갇혀서 해적들이 주는 약간의 음식을 받아먹었다.
첫 날 일이 끝나고 태용은 우리로 돌아오자마자 너무 힘들어서 흙바닥 위에 쓰러졌다.
“괜찮은가?”
안금성이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그는 처음 이곳에 온 날 태용에게 말을 걸었던 중늙은이였다.
“너무 힘들어요.”
“하루 종일 물질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자네처럼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금방 죽더군.”
그렇게 말하며 안금성은 태용에게 자신의 빵 한 조각을 떼어줬다. 태용은 고맙다고 말하며 빵을 씹은 뒤 피곤해서 곧장 곯아떨어졌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태용은 다시 다른 노예들과 함께 끌려나와 배를 타고 작은 섬으로 갔다. 그리고 해안에서 다시 잠수를 하고 하루 종일 칼을 찾아야 했다. 해적들은 노예들에게 그 칼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칼을 찾으면 무조건 가져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태용은 그렇게 며칠 동안 그곳의 해안을 뒤졌지만 칼 비슷한 것도 전혀 찾지 못했다. 그는 하루 종일 물속을 헤엄치다가 해가 지면 탈진한 상태로 다른 지친 노예들과 함께 배에 실려 큰 섬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우리에 들어온 뒤 저녁으로 주어진 빵 한 조각을 먹다가 태용이 말했다.
“도저히 못하겠어요. 이대로는 일주일도 더 버틸 수가 없어요.”
“이거 먹게.”
안금성이 자신의 빵을 한 조각 떼어줬다. 하지만 태용은 손을 저었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자네는 머지않아 죽을 걸세. 죽기 전에 밥이라도 많이 먹어둬야 덜 억울하지.”
“아니요, 그냥 빨리 죽고 싶어요.”
“진심인가?”
그는 진심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렇게 죽는 건 너무 억울해요.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죠?”
그는 한참을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노예들도 태용이 우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한동안 빵을 씹는 소리만이 들렸다.
한참을 울던 태용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전 위대한 작가가 되어야 해요. 그게 제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어 이곳에 온 거예요. 제가 뭐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라고요. 전 단지, 단지 도박으로 노예들을 풀어줬을 뿐인데......”
묵묵히 듣고 있던 안금성이 물었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태용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 전 작가 지망생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평생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근데 이제 작가는커녕 책을 만지지도 못하고 여기서 물질하다가 죽게 생겼네요.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힘든 삶을 살았던 모양이군.”
“일이 잘 풀리지 않았어요. 열심히 글을 써도 출판사들이 받아주지 않았으니까요.”
안금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게.”
“고맙습니다.”
태용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빵을 안금성에게 내밀었다.
“이거 선생님 드세요.”
“아닐세. 자네가 먹게.”
“전 입맛이 없어요.”
“그래도 먹어야 하네. 이거라도 먹지 않으면 내일 자네는 지쳐서 죽고 말 거야.”
“젠장, 어차피 죽을 건데 뭐 어떻습니까?”
“이대로 죽기는 억울하다고 하지 않았나? 작가로 성공하지 못하고 죽으면 말일세.”
그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태용은 유민기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 꼭 훌륭한 작가가 되세요.’
그는 그 말을 떠올리자 가슴이 메이는 것만 같았다.
안금성이 말했다.
“혹시 모르지. 계속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나. 그러니 먹고 버티게.”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태용이 묻자 안금성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인생에는 워낙 특이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니까. 나도 내가 해적에게 끌려올 줄은 몰랐네. 자네 역시 노예가 될 줄은 몰랐을 거 아닌가.”
“그렇긴 하죠.”
태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국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선생님은 어쩌다가 이곳에 오시게 된 건가요?”
태용이 빵을 씹으며 물었다.
“난 여객선의 승객이었는데 해적들이 여객선을 습격해서 잡혀 왔네.”
“그럼 그 전에는 뭘 하셨어요?”
“난 알타이의 공무원이었네.”
“알타이이라면.......”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작은 왕국이지. 나는 알타이 왕국에서 평생을 공무원으로 일했네. 정년퇴직한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끌려온 거야.”
“가족 분들은 어떻게 됐어요?”
“습격 당시에 모두 해적에게 죽었네.”
“저런......”
태용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 안에는 사람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났다. 어떤 사람은 밥을 먹고 바로 곯아 떨어져 코를 골고 있었다.
“칼은 찾았나?”
갑자기 안금성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칼이요? 아, 해적들이 우리한테 찾으라고 하는 거요?”
“그래, 아마 못 찾았겠지.”
“맞아요. 그래서 아마 내일도 가서 잠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태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 칼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아세요? 베니토 놈들은 왜 그걸 찾는 걸까요? 비싼 건가?”
“아마 비싸겠지. 나도 어떻게 생긴 칼인지는 모르네. 하지만 여기에 있던 다른 노예한테 들어서 그 칼의 정체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어.”
“정체가 뭔데요?”
“자네 혹시 김용이라는 이름을 아는가?”
태용의 물음에 안금성이 되물었다. 태용은 고개를 저었다.
“김용?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아마 그럴 거야. 서쪽 대륙에서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나도 어렸을 때 몇 번 이름만 들어봤어. 자네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안금성은 흙바닥에 있는 작은 자갈 하나를 줍더니 만지작거렸다.
“수백 년 전 서쪽 대륙에는 무림의 여러 분파가 서로 싸우고 있었네. 그런데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싸우던 무림을 통일시킨 사람이 바로 김용이야. 그는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무인이라고 전해지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사람으로 변신한 용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가 천 년을 산 여우라고도 하더군. 어떤 사람은 그가 불로불사의 도술을 익혀서 천 년 동안 수련을 했다고도 하고. 아무튼 그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서 혼자 힘으로 무림을 통일하더니, 무림에 평화가 오자 다시 홀연히 사라졌네.”
가만히 듣고 있던 태용이 물었다.
“무림이라고요? 그런 게 진짜 있었던 겁니까?”
“먼 옛날의 일이야. 중세의 서쪽 대륙에는 그런 게 있었네.”
“동쪽 대륙의 역사에는 그런 게 없어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네. 어차피 무림은 서쪽 대륙에서도 수백 년 전에 사라졌어. 그렇지만 무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그리고 무림의 수십 분파를 혼자 힘으로 통일한 절대무공의 주인공이 바로 김용이라고 전해진다네.”
“그렇군요.”
태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해적들이 찾는 칼이랑 무슨 상관인 거죠?”
“그들이 찾는 칼이 바로 김용의 칼일세.”
태용은 눈을 치켜떴다.
“진짜요?”
“그렇다네. 김용이 무림을 통일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김용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 군도의 작은 섬 중 하나라는군. 이곳에서 김용은 죽기 전에 자신이 평생 썼던 검을 바다에 던졌다고 전해지네. 해적들은 그 검을 찾는 거야.”
“그렇구나. 하긴 그런 게 진짜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이겠네요.”
“그렇겠지.”
안금성은 그렇게 말한 뒤 덧붙였다.
“하지만 내 생각에 해적들이 김용의 검을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뭔데요? 찾아서 팔려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안금성은 앉은 자세로 태용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김용이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무공을 그 검에 봉인했다는 말이 있어.”
태용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자네는 무공이 뭔지 모르나?”
“무공? 그건 뭐, 무인들이 가진 무술 실력, 뭐 그런 거 아닌가요?”
“비슷하네. 쉽게 말해서 무인들이 가진 능력이라고 보면 되네. 오랫동안 수련하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무인은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네. 그러니 김용 정도의 무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무공을 갖고 있었을 거야.
중요한 건, 김용이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모든 무공을 그 검에 봉인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는 걸세. 그래서 그 검을 얻은 자는 김용의 무공을 흡수해서 절대무공을 가진 무인이 된다는 거라네.”
태용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야 모르지. 나도 그냥 들은 말이네.”
안금성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밤이 깊었군. 난 그만 자겠네.”
그러더니 그는 순식간에 코고는 소리를 냈다.
태용은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안금성의 말을 듣고 나자 해적들이 어떤 목적으로 김용의 검을 찾는 것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설마 저 놈들은 절대무공을 갖고 싶어서 그 칼을 찾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멍청한 해적들 같으니. 그런 전설이나 믿고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거란 말이야?
그러나 다음 순간 태용은 자신 역시 유민기가 말해준 소설구슬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에이, 그건 이거랑 다르지. 유민기는 죽는 순간에도 구슬에 대해서 얘기했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누군가에게는 절대무공의 검이 자신이 원하는 무한히 위대한 소설만큼 간절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용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잠이 쏟아졌다. 그는 흙바닥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같은 날이 이어졌다. 태용은 우리에서 끌려나와 다른 노예들과 함께 작은 섬으로 보내졌다. 그는 이제 잠수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운이 빠졌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태용은 물속과 물 밖을 오가면서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다 속의 돌멩이를 들추고 바위 사이를 뒤져봐도 칼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날도 태용은 채찍에 맞지 않기 위해 형식적인 잠수를 하면서 바다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바위들 틈을 대충 훑으면서 헤엄치고 다녔다. 그리고 폐 속의 공기가 다 떨어질 즈음 수면으로 올라가 정신없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노닥거리지 마라!”
보트 위에 앉아 있던 해적이 노를 저어 와서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수면에 맞고 물방울이 튀었다. 태용은 재빨리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태용은 바다 속으로 내려가서 바위들 틈을 훑으며 손으로 돌멩이들을 대충 치우며 다녔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다음 날이면 자신이 치운 돌멩이들은 파도에 밀려서 위치가 바뀔 것이다. 그는 그저 빨리 시간이 흘러서 오늘의 일을 마치고 큰 섬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앞에 있는 돌멩이 하나를 옆으로 치웠을 때였다. 돌 밑에 깔려 있던 칼 손잡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갈색의 칼자루 같은 물건이었다. 자루와 연결된 칼날 부분은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 밑에 깔려 있었다.
태용의 눈이 커졌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서 몸으로 바위를 힘껏 밀었다. 바위는 생각보다 쉽게 움직였다. 바위가 움직이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태용은 흙과 먼지를 손으로 헤쳤다. 점점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모래 사이에 묻혀 있는 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칼집에 꽂혀 있는 긴 칼이었다. 태용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칼을 들어올렸다.
칼은 태용의 키보다 조금 짧은 정도의 길이였다. 칼집의 두께나 너비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양 손으로 들어 올리니 상당히 묵직했다. 칼집은 연한 녹색의 금속으로 되어 있었고, 칼집이나 칼자루는 모두 아무 장식도 없이 단조로운 형태였다.
태용은 한 손으로 칼집을 잡고 다른 손으로 칼자루를 당겼다. 그러자 부드럽게 칼이 뽑혀 나왔다. 칼날은 한 군데도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길고 날카로운 칼날의 표면은 거울처럼 깨끗했다.
그 때 태용은 순간적으로 칼날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 것 같다고 느꼈다. 물안경을 쓴 태용의 얼굴은 아니었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뭐지? 내가 잘못 봤나?’
태용은 칼날을 눈앞에 대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칼날에 누군가의 눈이 비쳤다. 태용은 그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칼날이 번쩍 하고 빛났다.
칼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태용은 순식간에 온몸이 불에 댄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는 깜짝 놀라 몸부림을 치다가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기운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바닷물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발버둥 치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태용은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구역질을 했다. 입에서 짠 바닷물이 쏟아져 나왔다.
“괜찮아요? 죽은 줄 알았네.”
다른 노예들 몇 명이 태용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태용은 머리가 아파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주변을 둘러봤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정신을 잃고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우리가 발견했어요. 우린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두통이 서서히 가셨다. 태용은 흐릿했던 눈앞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칼은요? 칼은 어디 있어요?”
태용이 묻자 노예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칼이요?”
그 때 저쪽 바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칼이다! 칼을 발견했어요!”
젊은 남자 노예가 물속에서 머리와 팔만 내놓은 채 외치고 있었다. 그는 긴 칼 한 자루를 들어 올린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태용의 옆에 있는 노예들이 벌떡 일어났다. 칼을 든 남자가 태용이 있는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이것 보세요, 제가 칼을 찾아냈어요.”
노예들이 몰려들어 남자가 들고 있는 칼을 살펴봤다. 태용도 그쪽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들고 있는 칼은 태용이 방금 전에 찾아낸 바로 그 칼이었다.
“저쪽 바다 속에 있더라고요.”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칼은 칼집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남자가 칼을 뽑으려 하자 태용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안돼요, 위험해요!”
다른 노예들이 모두 태용을 쳐다봤다. 남자가 물었다.
“왜요?”
“그게..... 그 칼을 뽑으면 기절할지도 몰라요.”
남자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태용을 보다가 칼을 뽑았다. 칼날은 여전히 거울처럼 깨끗했다. 칼날에 닿은 햇살이 반사되어 태용은 눈이 부셨다.
“와, 진짜 멋지다.”
남자가 칼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태용과 달리 칼을 뽑았는데도 기절하지 않았다.
다른 노예들이 손을 뻗어 칼을 만져보며 신기해하고 있는데 채찍을 든 해적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노예들을 쫓아낸 뒤 남자에게서 칼을 빼앗았다.
“제가 찾은 거예요.”
남자가 재빨리 말했다. 해적들은 칼을 살펴보더니 칼집에 칼을 꽂았다.
“잘했어. 넌 오늘 특식이다.”
그렇게 말한 뒤 해적들이 외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시 돌아간다.”
일이 일찍 끝난 노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용은 다른 노예들과 함께 다시 보트를 타고 큰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우리에 들어왔다. 태용은 우리에 들어오자마자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나?”
안금성이 묻자 태용이 말했다.
“칼을 발견해서 일찍 끝내줬어요.”
“칼을 발견했다고?”
안금성이 놀라며 물었다.
“드디어 김용의 칼을 발견한 건가?”
“그게 김용의 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칼 하나를 발견한 셈이죠.”
“누가 발견했나? 자네가 발견했나?”
“그게 그러니까...... 제가 발견하긴 했는데 그 칼을 만지고 나서 저는 기절했어요. 다른 노예들 말이 물에 둥둥 떠 있었대요. 그리고 칼은 다른 사람이 찾아서 해적한테 줬고요.”
안금성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태용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자네가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태용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가 이상해요. 기분이 아주...... 혼란스러워요.”
“무슨 기분인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건 그러니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요.”
태용은 자신의 두 손을 펴고 들여다봤다.
“뭐가 보이는 것인지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물의 움직임 같은 게 전보다 훨씬 느려 보여요.”
그는 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정말 신기한 기분이에요. 마치 전에는 몰랐던 문자를 배운 것처럼 세상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만 같아요. 그리고 또 기운이 크게 솟아나는 것 같고요. 예전보다 힘이 더 세진 것 같아요.”
그는 바닥에 있는 탁구공만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 그 돌을 세 손가락으로 쥐고 손가락에 힘을 줬다. 그러자 돌멩이는 뚝 하고 몇 조각으로 부서졌다.
안금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부서진 돌멩이들을 주워 힘을 줘서 부서뜨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돌멩이는 아주 단단했다.
“자네 지금...... 이 돌을 손가락으로 깨뜨린 건가?”
“그러게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태용은 팔을 뻗어서 옆에 있는 쇠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힘을 줬다. 그러자 쇠창살이 맥없이 구부러졌다. 태용이 힘을 주자 창살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안금성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태용은 그에게 끊어진 창살을 보여줬다.
“보세요, 힘이 아주 세졌어요. 신기하지 않아요?”
안금성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자네, 아무래도 김용의 무공을 흡수한 것 같군.”
“설마.”
태용은 가볍게 웃었지만 안금성은 엄숙하게 말했다.
“아냐, 분명해.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는 없어. 자네는 김용의 검을 처음으로 만지고 그의 무공을 흡수한 거야. 자네는 이제 절대무공을 갖게 된 거지.”
“그럼 전 이제 싸움을 잘하게 되는 건가요?”
“그 정도가 아니지. 자네는 이제 혼자서 무림을 통일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거야.”
그 때 우리의 문이 열리면서 노예들이 먹을 음식이 담긴 바구니가 들어왔다. 우리 안의 노예들은 바구니에 달려들어 빵과 감자를 집어갔다. 안금성도 간신히 빵 한 조각을 잡은 뒤 태용에게 돌아와 물었다.
“자네는 안 먹나?”
“별로 생각 없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네요.”
그러면서 그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전 잠을 좀 자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죽은 듯이 잠에 들었다.
그날 새벽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혼란스러운 기분은 이제 사라졌고, 오히려 정신이 맑게 갠 것만 같았다.
“일어났나?”
고개를 돌리니 안금성이 옆에 있었다.
“자네, 이리 좀 와보게. 할 얘기가 있네.”
태용은 안금성을 따라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가운데에는 남자들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태용은 안금성과 함께 그들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시죠?”
다른 노예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태용이 물었다. 그러자 그 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김용의 무공을 얻었다면서요?”
태용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그러자 안금성이 쇠창살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힘을 한 번 보여주게.”
태용은 창살로 다가가서 창살 한 조각을 잡아당겨 손쉽게 끊어냈다. 그 모습을 본 노예들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이었군요.”
노예 한 명이 중얼거렸다. 먼저 말을 건 남자가 말했다.
“이태용 씨라고 하셨죠? 전 강주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반란을 준비해오고 있었습니다.”
강주원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 밖에 있는 다른 노예 우리를 가리켰다.
“다른 구역의 노예들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얘기한 일이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죠. 하지만 태용 씨가 있다면 반란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우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태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뭐든 도울게요.”
그러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용이 물었다.
“그래서 계획이 어떻게 되죠?”
그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반란 계획을 이야기했다. 계획은 아주 단순했다. 해적들이 잠든 밤에 무기 창고에 숨어들어 무장한 다음 해적들이 자고 있는 천막을 습격하자는 것이었다.
“저 쪽에 있는 커다란 천막이 무기 창고입니다. 해적들은 저곳에 대부분의 무기들을 보관하죠. 저 안에는 특히 총이 많이 있습니다.”
강주원은 멀리 떨어진 천막 하나를 가리켰다.
“문제는 무기 창고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태용 씨가 있으니 이제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아요.”
“그럼 바로 끝내죠.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납시다.”
태용의 말에 강주원이 미소를 지었다.
“좀만 참으세요. 일단 제가 내일 우리 밖으로 나왔을 때 다른 구역의 노예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들은 계획을 좀 더 의논한 뒤 날이 밝아오자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태용도 자신의 자리로 와서 흙바닥 위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