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슬> 소설 연재
“씨발 새끼!”
태용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술잔을 쾅 내려놓았다.
“아, 진짜 존나 때리고 싶네. 뭐 그렇게 재수 없는 새끼가 있어?”
태용과 승민, 그리고 은찬은 학교 앞에 있는 술집에 있었다. 태용이 자기 잔에 술을 따르자 은찬이 혀를 찼다.
“천천히 마셔.”
하지만 태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만 화 풀어. 다온이 원래 성격이 그렇잖아.”
승민이 다독였다. 그러자 승민의 옆에 앉은 은찬이 말했다.
“근데 솔직히 다온이가 오늘 좀 심하긴 했어. 너무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한 거 아니야?”
“말했잖아, 걔 원래 그런 애라고. 아마 태용이가 쓴 글을 까기 위해서 싱글벙글하면서 학교까지 왔을 걸?”
승민의 말에 은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하나 몰라.”
태용은 자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려다가 술병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는 눈이 충혈된 채 중얼거렸다.
“씨발놈...... 지는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등단하면 다냐? 책 한 권도 출간해보지 않았으면서.....”
“태용아, 너무 화내지 마. 다온이가 한 말은 잊고 다시 좋은 작품을 쓰면 돼.”
승민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다정한 말에 태용은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태용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얘들아, 내 소설이 진짜 그렇게 별로였니?”
은찬과 승민은 서로를 쳐다봤다. 은찬이 먼저 말했다.
“난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도. 나름대로 잘 쓴 소설이야.”
“나름?”
태용이 중얼거렸다.
“나 그거 쓰는데 3년 걸렸어. 첫 번째 소설은 2년 동안 썼고. 근데 둘 다 출간이 안 돼. 왜 내 책을 출간해주지 않는 걸까? 난 진짜 열심히 썼는데, 내 책이 그렇게 쓰레기 같나?”
태용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씨발, 다온이 말이 맞아.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등단도 못하고......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태용은 눈물을 닦다가 곧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승민과 은찬도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흐느끼던 태용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아.”
“에이, 그런 말 하지 마.”
은찬이 말했다. 승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망한 인생이 어디 있냐? 다 각자 소중한 인생이지.”
하지만 태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 인생은 망했어. 나도 성공하고 싶었는데, 나도 글 잘 쓰고 잘 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는 다시 탁자에 고개를 박고 흐느꼈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그는 급기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은찬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태용아, 슬픈 건 알겠는데 조금만 조용히 울자.”
“내 인생은 망했어.”
태용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흐느꼈다.
그 날의 술값은 승민이 전부 냈다. 은찬은 고맙다며 다음에는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태용 역시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 내가 나중에 반드시 성공해서 갚을게.”
“괜찮아.”
승민이 웃으며 말했다. 승민은 다른 두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해서 술집을 나오자마자 작별인사를 했다.
“태용아, 오늘 마음고생 많이 했다. 그래도 난 네가 쓴 소설이 좋아. 다온이가 한 말은 그냥 흘려들어.”
태용은 그 말에 감동해서 승민의 두 손을 잡고 힘껏 흔들며 고맙다고 말했다. 승민은 크게 웃으며 조심히 가라고 말한 뒤 발길을 돌렸다.
태용은 멀어지는 승민의 뒷모습을 보다가 은찬에게 눈을 돌렸다. 은찬 역시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태용이 물었다.
“집에 갈래? 아니면 우리끼리 한 잔 더?”
“아냐, 난 술은 그만 먹을래.”
은찬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골목을 나와서 천천히 밤길을 걸었다.
“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
태용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날씨가 선선하고 참 좋다. 내 마음도 이 날씨처럼 맑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자 은찬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문학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네. 넌 천생 작가다.”
“작가 지망생이지 뭐.”
“그래도 곧 작가가 되겠지.”
태용은 고맙다고 중얼거린 뒤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뒤 한동안 말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태용은 자신만의 생각 속에 빠져 있었고 은찬 역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버스가 오자 그들은 버스에 올라탔다.
좌석에 나란히 앉은 뒤에도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은찬이 불쑥 말을 꺼냈다.
“넌 집에 갈 거지?”
태용은 그에게 얼굴을 돌렸다.
“왜? 넌 어디 들렀다 가려고?”
“응. 난 갈 데가 있어서.”
태용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그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너 설마 아직도 도박하냐?”
은찬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은찬은 대학생 때부터 도박장을 들락거렸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과 용돈을 모두 도박에 쏟아 부었다. 태용은 그가 걱정되어 도박을 끊으라고 잔소리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은찬은 알겠다고만 할 뿐이었다.
태용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시생이 된 후로는 도박을 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 알았던 모양이다.
“야, 그만 하라고 했잖아. 끊는다며.”
태용의 말에 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만 마지막으로 할게.”
“나 참, 너 맨날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공부 시작했으면 돈도 아껴야지.”
“그래서 조금만 할 거야.”
태용은 혀를 차면서 턱을 괴고 잠시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은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그럼 나랑 같이 가.”
그 말에 은찬은 살짝 놀랐는지 눈을 치켜떴다.
“왜?”
태용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심심해서.”
“넌 하지 마.”
“넌 도박하면서 나보고는 하지 말라는 거냐? 치사하네.”
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자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용도 그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은찬은 그런 태용을 뜨악한 표정으로 잠시 쳐다봤다.
“진짜 너도 가려고? 난 이미 손을 댔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넌 시작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러자 태용은 웃으면서 은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그냥 따라가서 구경만 할게. 뭘 그렇게 심각하냐?”
그러자 은찬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따라 와.”
태용은 앞장서는 은찬을 따라 휘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도심의 번화가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태용은 거리에 가득한 네온사인 때문에 눈이 부셨다. 이곳은 그가 사는 고시원이 있는 동네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수없이 많은 술집과 다양한 유흥업소들이 밝은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태용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구경하다가 하마터면 앞서가는 은찬을 놓칠 뻔했다.
은찬은 태용과 달리 주변의 구경거리들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걸어가고 있었다. 태용은 은찬의 단골 도박장이 이렇게 화려한 거리에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런 화려함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는 은찬의 뒷모습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계속 걸어가던 은찬은 어떤 건물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태용은 잠시 서서 그 건물을 올려다봤다. 화려한 거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그 하얀 건물은 실로 거대한 크기와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태용은 잠시 입을 벌린 채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은찬을 따라 달려갔다. 그는 은찬과 나란히 정문을 통과하며 물었다.
“여기가 네가 다니는 곳이야? 진짜 크다. 무슨 도박장이 이렇게 커?”
은찬은 말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건물의 1층 로비는 바닥에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 경비원이 서 있었다. 태용은 은찬을 따라 커다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은찬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드넓은 도박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탁자에서 사람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고 다양한 게임기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태용은 그곳의 밝고 요란한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은찬을 찾았다. 은찬은 도박장 한쪽에 있는 환전소 앞에 서 있었다. 태용이 그에게 걸어갔을 때 은찬은 이미 돈을 칩으로 바꾼 상태였다. 은찬이 칩이 담긴 플라스틱 통을 한 손에 든 채 물었다.
“너도 게임할 거야?”
태용이 뭐라 말해야 할지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은찬이 그에게 칩 몇 개를 내밀었다.
“이거 줄게. 돌아다니면서 구경 좀 하고 있어. 난 저기서 하고 있을게.”
그러더니 은찬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면서 점점 멀어져갔다.
태용은 은찬이 준 칩을 들고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도박장 안을 구경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도박장에 온 거라서 모든 게 신기했다. 태용은 이상하게 생긴 게임 머신들을 구경하다가 탁자에서 펼쳐지는 카드 게임들도 구경했다. 물론 대부분의 게임들은 태용이 잘 모르는 게임들이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나이대의 남녀였지만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태용은 한동안 도박장 안을 걸어 다니다가 구경하는 게 싫증이 나자 자신도 게임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룰렛 게임이 있어서 그는 그 앞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진 칩 중 하나를 숫자 28 위에 올려놓았다.
딜러가 룰렛판을 돌리자 색색의 작은 구슬 몇 개가 회전하는 판 위에서 춤을 췄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태용 역시 턱을 괸 채 화려한 판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판이 서서히 느려지다가 멈춰섰다. 구슬들은 각자 숫자가 써있는 칸에 하나씩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태용은 구슬들의 위치를 눈으로 좇다가 깜짝 놀랐다. 파란색 구슬 하나가 숫자 28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딜러가 태용의 칩을 가져가더니 그에게 황금색 티켓 한 장과 다른 색깔의 칩 몇 개를 내밀었다. 태용은 티켓을 들여다봤다. 티켓에는 사람 모양의 간단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에요?”
태용의 물음에 정장을 입은 딜러가 짧게 대답했다.
“이걸로 손님은 3층에서 게임을 하실 수 있습니다.”
“3층이요?”
태용은 새로 받은 칩과 티켓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은찬을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은찬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태용은 그냥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펼쳐진 실내는 처음 들어간 곳만큼 넓었지만 보다 조용하고 어두웠다. 이곳에서는 좀 더 차분한 분위기에서 게임을 이뤄지는 모양이었다. 태용은 앞에 있는 테이블의 딜러에게 가서 황금색 티켓을 보여줬다. 그러자 딜러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특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태용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특실?”
딜러가 가리킨 곳에는 벽에 녹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태용이 커튼을 걷자 게임 테이블 하나가 있는 방이 나왔다. 방 안에는 딜러 한 명과 중년 사내 한 명뿐이었다. 태용이 딜러에게 걸어가 티켓을 내밀자 딜러가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마침 먼저 오신 손님 한 분이 계시니 지금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태용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탁자 앞에 앉았다. 태용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딜러가 그와 사내에게 카드를 나눠주면서 간단하게 게임의 규칙을 설명했다. 다행히 태용도 할 줄 아는 게임이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에게 배웠던 게임이었던 것이다.
태용은 팔을 뻗어 카드를 잡으며 앞에 앉은 중년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몸이 비대하고 머리가 벗겨진 외모였다. 남자의 가느다란 입술과 그보다 더 가늘고 긴 눈은 사나운 느낌을 줬다. 태용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딜러가 비대한 남자에게 먼저 시작하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카드 몇 장을 내려놓더니 칩 한 줌을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태용은 한 시간 정도 그곳에서 게임을 했다. 그는 그 카드 게임을 할 줄 알기는 했으나 평소에 딱히 즐기지도 않았고 그리 잘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오늘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칩이 다 떨어질 때까지만 게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용은 별 생각 없이 계속 판돈을 걸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그는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판돈이 크게 걸린 판에서는 예외 없이 그가 이겼다. 태용은 점점 신이 났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딴 칩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많은 판돈을 걸면 다시 그만큼 땄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태용은 앞에 앉은 남자의 표정은 별로 살피지 않았다. 그저 남자가 내민 카드만 보면서 져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계속 판돈을 올렸다.
태용이 계속해서 자신의 돈을 갉아먹자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는 연신 이마를 문질렀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점점 조바심을 내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마지막 판에서 태용이 남자의 칩을 모두 가져가자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태용을 잠시 노려보더니 밖으로 성큼 나가버렸다.
태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딜러가 작은 가방 안에 태용의 칩을 담아주었다. 딜러가 내민 가방을 받으며 태용이 물었다.
“이걸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4층으로 가셔서 환전하시면 됩니다.”
태용은 딜러에게 고맙다고 한 뒤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면서 묵직한 가방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지? 나 이제 부자 되는 건가?’
그는 술기운과 졸음과 함께 기분 좋은 몽롱함을 느꼈다. 그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이 돈으로 뭘 할지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용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뒤돌아보자 태용과 게임을 했던 남자가 다른 남자와 대화를 하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태용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 그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서자 그의 앞에는 앞선 방들과 달리 좁은 복도 형태의 공간이 나타났다. 태용은 의아함을 느끼며 복도 가운데에 있는 환전소의 직원에게 걸어갔다.
태용이 가방을 내밀자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직원은 가방을 열어 칩을 세어보더니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지금 전부 찾아가실 건가요?”
“네, 그럴게요.”
그러자 직원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 뒤 복도 벽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용은 돈다발이 가득 쌓여 있는 방을 상상하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문 너머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직원이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의 불이 켜지면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순간 태용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돈다발 같은 것은 없었다.
그곳은 감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물 우리처럼 생긴 철창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태용이 놀라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직원은 태연하게 철창 사이를 걸어갔다. 태용은 주춤거리며 직원을 쫓아가서 물었다.
“저기요, 이 사람들 다 뭐에요?”
그러자 직원은 그를 돌아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예들입니다.”
“노예요?”
“예, 판돈으로 쓰이는 노예들이요.”
그 말에 태용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노예도박을 하고 있었구나.’
그는 이제야 이 건물이 왜 이렇게 큰지 깨달았다. 판돈으로 쓰일 수많은 노예들을 가둬놓아야 했으니 클 수밖에 없었다.
충격을 받은 태용을 내버려둔 채 직원은 철창 우리 한곳으로 걸어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태용은 그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몸이 결박된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게, 그러니까......”
더듬거리는 태용에게 직원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손님이 가져가실 노예들입니다. 차량으로 실어가실 거라면 직원을 불러서 차에 싣는 걸 돕겠습니다.”
태용은 말없이 노예들을 내려다봤다. 남녀노소 다양한 노예들은 한 눈에 봐도 백 명이 넘어보였다. 태용의 바로 앞에 있던 노예 한 명이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봤다. 젊은 여자인 그 노예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온몸에 구타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태용은 여자의 초점 없는 흐릿한 동공과 눈이 마주치자 술이 확 깨는 것만 같았다.
태용은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제가 데려갈 수 있는 게 전부 몇 명이에요?”
“154명입니다.”
태용은 노예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전부 풀어줄게요.”
“네?”
“이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킬 겁니다. 지금 당장이요.”
그 말에 직원은 처음으로 놀란 얼굴로 태용을 쳐다봤다.
“이 사람들은 지금부터 모두 자유에요. 그렇게 할 수 있죠?”
“하지만.....”
“제 소유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다음 태용은 허리를 숙여 묶여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지금 여러분을 풀어드리면 가실 곳은 있나요? 여러분 혹시 집 있어요?”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모두 같은 마을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우리 집이 있어요.”
“그럼 풀어드리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는 건가요?”
“네.”
태용은 고개를 끄덕인 뒤 직원에게 말했다.
“전부 풀어줄게요.”
직원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태용의 재촉에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환전소로 향했다. 그리고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더니 태용에게 태블릿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태용이 서명을 하자 직원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잠시 후 도박장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니 노예들이 수감된 곳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태용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예들의 결박을 풀어줬다. 노예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철창 밖으로 나갔다. 그 중 몇몇 사람들은 태용을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태용은 마지막 사람까지 전부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의 복도에는 풀려난 노예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건물을 나가고 있었다. 태용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몇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은 태용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태용이 물었다.
“어쩌다가 노예가 되신 건가요?”
“마을 사람들이 공동 투자한 회사가 망해서 마을 전체가 큰 빚을 지는 바람에......”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되신 거군요.”
태용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 중 중년 남자 한 명이 물었다.
“선생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이태용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태용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태용 선생님,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전 단지 친구를 따라서 오늘 처음 이곳에 왔는데, 제가 한 게임이 노예를 걸고 하는 도박인지 모르고 판돈을 많이 땄을 뿐이에요.”
중년 남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꼭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태용은 그 말에 당황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닙니다.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괜찮은데......”
그들이 계속 알려달라고 졸라서 태용은 그들에게 휴대폰 번호를 말해줬다. 풀려난 노예들은 휴대폰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태용이 말해준 번호를 듣고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마침 태용의 휴대폰이 울렸다. 태용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태용아, 어디야?”
은찬이었다.
“나 다 털렸다....... 우리 그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