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애국가가 연주된 9월 7일의 역사 이야기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로 통용되는 애국가는 1936년 안익태가 작곡한 것으로,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1948년 8월 15일 남한 정부가 수립되며 대한민국 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애국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최초의 애국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애국가가 있기 이전, 시기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 대한제국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과 1896년 독립협회 결성 이후 민간에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많은 애국가가 작사되었습니다. 이는 약 10여 종에 이르렀는데요,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립신문에 그 가사들이 게재된 바 있습니다.
한편,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국가상징물로 애국가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에 1900년 12월, 고종은 군악대 설치를 법령으로 공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애국가 제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당시 국내에는 서양식 악대 지휘 및 작곡을 할 수 있는 이가 없었는데요. 이에 주한 독일 공사관의 추천으로 독일 음악가 프란츠 폰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를 초빙하였습니다. 에케르트는 독일 해군군악대장으로 재직하던 중, 1879년에 일본에 초빙되어 일본해군군무국 등에서 근무하여 양악을 보급한 인물입니다. 그는 23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1900년 3월, 독일로 귀국하였다가 주한 독일공사관의 추천으로 1901년 2월 7일, 50인조 정규 군악대의 각종 악기를 가지고 내한했습니다.
에케르트가 내한한 1901년, 고종은 국가 제정을 명했는데요. 제정 명령이 있고 약 1년 후인 1902년 7월 1일,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이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음계를 바탕으로 완성된 이 곡은 같은 해 8월 15일에 '대한제국 애국가'로서 제정·공포되었습니다. 국가에서 정식으로 애국가를 제정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습니다. 에케르트는 애국가를 작곡한 공로로 태극 3등급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사ᆞ 셩슈무강(聖壽無疆)하ᆞ사ᆞ
하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글치사
오 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하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 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작사자는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낸 민영환(閔泳煥, 1861~1905)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훗날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자결하였는데요.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이 추서된 바 있습니다.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에는 당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일으켜 세우려 했던 충정공의 애국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는 표지 1장과 본문 6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앞면 좌측 가장자리에 2개의 색실로 엮은 형태입니다. 앞표지에 '大韓帝國愛國歌', '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HYMNE.', 'Dach Koreanischen Motiben von FRANZ ECKERT, Königlich Preussischem Musikdirektor.' 문구 등이 인쇄되어 있고, 본문은 제작 경위를 밝히는 민영환의 서문과 국어와 독일어로 표시된 애국가 가사 및 악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악보 표지의 상단 태극문양 부분에는 '윤치호·YUNCHIHO' 글자가 각인된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보아, 윤치호(尹致昊, 1865~1946)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 1면에는 애국가 제정 경위를 밝힌 민영환의 서문이 있고, 2면에는 한글 가사와 이를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가 있으며, 3~6면에는 애국가 악보가 실려있습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는 세계 오십여 개국에 선포, 발송되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의 ‘기미가요’가 불리면서 애국가는 금지곡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에케르트가 일본의 ‘기미가요’작곡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식국가로 채택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케르트는 정부와의 계약이 끝난 후에도 백우용(白禹鏞, 1883~1930)을 비롯한 한국 양악의 선구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는데요. 1910년 한일합방 후에도 우리나라에 머물던 그가 1916년 8월 6일, 65세를 일기로 숨진 곳도 회현동 자택이었습니다.
비록 대한제국 애국가는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지만, 한국에서 작곡된 최초의 서양음악이며 최초의 국가 제정 애국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혼란스러웠던 시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경쟁 속에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는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입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양여진
참고문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누리집 https://much.go.kr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http://www.nl.go.kr/news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