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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혜 Aug 07. 2021

당신을 기억합니다.

첫 아이는 유학 시기 미국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선천성 기형이 있어 대도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나와 남편은 다행히 병원 근처에 어느 복지재단이 운영하는 보호자 장기 숙소를 구했다. 한국에선 아이가 어떻냐고 묻는 전화가 걸려왔는데 정확히는 아이 기형과 의사 면담을 물었다. 아이는 눈이 크고 울음이 앙칼졌고 의사는 확언을 피해 별말이 없는데도 전화 너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싶은 것만 듣고 싶어 했다. ‘애미란 그런 거다.’, ‘잘 해라’는 말과 함께. 애미가 어떤 건지 무얼 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쪽잠을 자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몸이 고되면 이게 애미 노릇인가 싶어 힘을 더 들였다.

 


 낯선 새벽, 병원에서 듣게 될 영어 단어를 연습하고 유학생 살림에 마트서 산 옷들을 단정히 입고 파마 안 한 동양인 머리가 초라해 보이지 않게 빗질을 수십 번 했다. 그 날도 긴 준비를 마치고 면회 시간에 맞춰 봉사자 차에 탔다. 나는 부모니까 차량 봉사자에게도 어른답게 굴려고 했다. 연습해 본 문장에서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가까이 사시나요?”

“네. 외곽에 삽니다.”

“주말인데 봉사하시네요.”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겁니다.”

앞만 보며 그가 말했다. 나는 영어가 짧아 대화를 잇지 못했다. 정적 속에서 ‘네’는 ‘아니요.’로 ‘외곽에 삽니다.’는 ‘내가 왜 궁금한가요?’로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겁니다.’는 ‘댁이 불쌍해서 봉사하는 게 아닙니다.’로 바뀌었다.

 


 그때였을까? 마음이 기지개를 켠 것은. 그는 ‘너에게 관심 없어. 내 할 일 하는 거야.’라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힘내라고 하지도 과잉친절을 베풀지도 않았다. 그의 무심함에 실려 병원에 가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평범한 아기 엄마가 되어 봤다. 불편을 견디던 극기훈련 산모에서 아이를 보러 가는 초보 엄마로, 쾌적하면 좋고 도움받으면 더 좋은 삼칠일이 안 된 여느 산모로. 그럼 나 이 순간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면회 때 줄 모유를 유축하는 틈틈이 병원을 놀이공원처럼 누볐다. 대기실의 공짜 커피를 마시고, 옆에 놓인 빵들을 종류별로 맛보고, 유아 환자 놀이방에 가서는 내 감각을 닮을 아이를 상상하며 진지하게 색칠공부를 했다. 수술 보호자 대기실에서 주는 퀼팅 깔개를 꼬박꼬박 챙겼다. 아이가 잘 자란다는 뜻의 기념품이니까. 죽상을 하고 있던 남편도 꾀었다. 남들은 돈 내고 영어마을 가는데 우리는 공짜로 미국병원 체험 중이다, 하나도 놓치지 말고 누리자. 세 번째 수술을 마칠 즈음에는 남편 눈빛에서 이제 좀 진정하자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6년 후, 한 달에 두 번 아동 시설 청소를 하러 다녔다. 두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시간이 남아서였다. 간혹 새 봉사자들이 활동을 이내 그만두기도 했는데 실망감을 이유로 들었다. 관리자가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거나, 내 집보다 좋아서 도울 필요가 없어 보인다거나, 헌 옷을 챙겨왔는데 새 자전거를 기부하는 이를 보고 위화감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소용없다는 실망감’은 ‘내가 중요하다는 존재감’을 드리우는 걸까. 과거 안부 전화에 숨어있던 베푸는 사람의 존재감 말이다. 나는 그 전화가 싫었다. 묻는 이의 기대와 달리 나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지 않았다. 공짜 커피와 빵은 누군가 나를 응원하고 있다고 여겨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내 주머니가 초라해서가 아니었다. 수술 보호자 숙소는 어느 부호가 기증한 대저택이었는데, 낯선 이를 대접하는 손길을 조용히 배웠다. 내 집 보다 화려하다고 과분하지 않았다.


사람을 돕는 일은 받는 이가 있어 완성된다. 타인의 도움을 수용하는 것은 내가 남보다 불쌍할 때가 아니라 내 삶이 남과 같아질 수 있다고 희망할 때 가능하다. 그러니 받는 이가 마땅한 고마움을 표하지 않아서, 남의 인생을 구할 수 없어서 돕는 일을 외면하지 말자. 무심하게 운전대를 잡던 동네 아저씨의 작은 책임감만으로 누군가의 시간은 희망을 향한다. 당신 덕분에 희망을 향했던 이가 인사하는 소리가 날 지 모른다. 당장의 ‘고맙습니다.’ 대신 먼 훗날 ‘기억합니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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