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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관행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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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옂 Jul 31. 2024

관행, 진짜 젖는 걸 말한 건 아니었는데

매일 같이 늦게 자던 탓에 그리 이르지 않은 비행기임에도 다섯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났다. 가지 말까 싶었다. 당연히 그럴 순 없었다. 짐도 챙기지 않은 채로 자버린 나머지 눈을 뜨자마자 짐을 챙겼다. 사흘치 옷만 준비했다. 아무리 욱여넣어도 더 들어가지 않았다. 가방이 작았다. 이번엔 벽돌 같은 노트북 대신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긴다.


눈도 못 뜬 채로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탈 비행기보다 십 분 먼저 출발할 비행기는 청주행 비행기였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광주까지 가나 싶었다. 청주나 갈 걸 그랬다. 면세점 한번 들르지 않고 비행기에 올랐다. 광주까지는 사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할 게 없었다. 졸려죽을 것 같았다. 졸려서 죽을 수 있나, 졸리면 잠에 들지 않을까 하고 혼자 걸으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여행의 묘미라고 하기도 우스울 만큼 계획이 없던 나는 유스퀘어나 가기로 했다. 어디서 봤는데 건물 앞 도로가 넓다고 하더라. 이게 이유인가 싶지만 이유야 갖다 붙이면 그만이니까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기아 타이거즈 야구 경기를 볼까 했다. 혼자 영화도 본 적 없는데 혼자 야구장.. 멋져 보였다. 시간도 마침맞았다. 오후 여섯 시 경기였다.


전석 매진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인기가 많나 싶었다. 그럼 광주fc 축구 경기나 봐야지 싶었다. 오늘 제주 유나이티드랑 경기가 있단다. 잘 됐다 싶었다. 축구도 재밌을 것 같았다. 경기장을 알아보니까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이란다. 가는 날이 장날이구나 싶었다. 오늘 올라왔는데. 혼자 화를 씩씩 내며 유스퀘어나 갔다.


유스퀘어를 가는 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 5.18자유공원이 있었다. 광주까지 왔는데 안 가볼 수 없겠다 싶어 중간에 내려 들어갔다. 국립경주박물관을 갈 때 꼭 그 기분이었다. 버스 기사님이 참으로 무섭게 생겼다. 외모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암튼.. 많이 무섭게 생겼다. 내릴 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내렸다.


평일 대낮은 적막할 정도로 한산했는데 5.18자유공원엔 직원이 두 명에 손님은 나 하나였다. 직원아저씨가 내게 혼자 온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했다. 청주라고 하기도 이상하다 싶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어디 사람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여행 온 거냐고 공동묘지 가 봤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공동묘지는 안 가봤다.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하니 저쪽 방향으로 이백 미터만 걸어가면 식당거리가 있단다. 감사하다고 했다. 경주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가 떠올랐다.

밥을 먹기 전에 바로 옆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있었다. 가온누리10기 요원인 나는 안 가볼 수가 없었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회의가 없던 컨벤션센터는 빈 건물이랑 다를 바 없었다. 사람 한 명 없었다. 건물 안에 김대중 역사 기념관이나 불이 켜져 있을 뿐이었다.


회의가 없을 때도 이런 공간을 잘 활용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김대중컨벤션센터를 빠져나왔다. 배가 고팠다. 아까 아저씨가 내게 추천해준 곳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아파트 단지였던 그곳은 하교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아저씨에게는 죄송했지만 맥도날드를 갔다. 사실 별로 먹고 싶던 게 없었다. 햄버거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햄버거를 먹어도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어 바로 옆 스타벅스에 갔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환상의 조합이다. 아메리카노를 (무려!) 그란데 사이즈나 시켜 먹었다. 내가 갖고 있던 기프티콘과 가격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충장로를 가고 싶었다. 광주의 아파트단지는 둘러봤으니, 시내를 볼 차례였다. 청주 시내와 다를 바 없는 충장로는 그냥 대한민국 지방 시내였다. 혼자 책방을 갔다. 괴상한 취미가 되어버린 타지에서 중고책사기는 퍽 재미있는 취미인 듯 싶었다.


책을 세 권이나 사서 가뜩이나 무거운 가방이 더 무거워졌다.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빵 냄새가 났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빵집에 갔다. 알고 보니 유명한 빵집이라더라. 광주의 성심당 같은 빵집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소보로빵인 줄 알고 산 빵이 알고 보니 팥빵이었다. 직원한테 저 소보로빵인데요 하니까 빵봉지에 대문짝만하게 써있는 단팥빵이라는 글자를 읽어주더라. 죄송하다고 두 번이나 하고 나왔다.


숙소에 갔다. 하루 종일 피곤한 나머지 일단 낮잠을 자야겠다 싶었다. 빵집에서 산 빵을 대충 먹고 냅다 잤다. 한 시간은 잤나 싶었다. 자고 일어나니까 해가 떨어져있었다. 산책을 나가고 싶었다. 우산도 없이 야행을 나갔다.


관광지보단 도시에 가까운 광주는 야간 명소가 많았다. 도시들은 밤에 갈 곳들이 많다. 광주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는 곳으로 갔는데 시내가 한 눈에 보이려면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거의 등반에 가까운 걸음으로 이십 분 정도 걸었나, 전망대에 도착했다. 광주 시내를 잘 몰라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야경이었다. 연인하고 오면 좋겠다 싶었다. 실제로 연인 아니면 부부들 뿐이었다. 멍하니 광주를 바라봤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어 비가 더 내리지 말길 기도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빗소리는 커져만 갔다. 급한 대로 어디 지붕이 있는 벤치에 들어가 앉았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를 보며 막막하기만 했다.


언제 그칠지 몰라 불안한 마음으로 일단 노래를 틀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뿐더러 할 것도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감금에서 즐겨보기로 했다. 혼자 조용히 노래나 불렀다. 내친 김에 생각 정리도 했다. 비가 점점 그치는 것 같았다. 바닥엔 누가 버리고 간 종이가 한 장 있었다. 반으로 접어서 대충 머리만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비를 맞은 탓인지, 멀리 나간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팠다. 숙소 옆 편의점에서 유부초밥과 핫바를 사 먹었다. 또 편의점이다. ‘여행지’에 편의점을 갖다 붙이니까 꼴이 우습지, 밤 산책 후 돌아오는 길에 사먹는 유부초밥과 핫바는 그저 맛있는 음식일 뿐이다. 충분히 맛있었다.


중경삼림을 보고 싶었다. 중경삼림을 대표하는 날짜는 5월 1일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봐야만 했다. 오늘 중경삼림을 보고싶었던 건 거의 운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삼십 년 가까이 된 영화를 광주에서 보고 있자니 신기할 따름이다. 숙소에 있던 욕조에 물을 받았다. 중경삼림을 틀었다. 비에 젖은 몸을 녹였다.

세상은 필연보단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처럼, 자꾸만 의도치 않은 곳에서 행복하고 또 불행해진다. 그리고 또 행복해지고 또 다시 불행해진다. 광주까지 와서 욕조에 몸을 담근 채로 영화를 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내일은 여수를 가야겠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밤바다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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