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수를 가야지 했다. 어제 광주를 올 때부터 여수를 가고 싶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놈의 여수 밤바다가 궁금할 뿐이었다. 유스퀘어는 건물이 크다는 이유로도 가 보고 싶었는데, 노래까지 있는 도시를 안 갈 이유는 없었다.
광주에서 여수를 가는 기차표를 알아보니 기차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전라도에서 전라도를 가는 기차가 없을 수가 있지. 화가 잔뜩 났다. 곡성까지 가야 기차가 있다더라. 곡성? 곡성.. 어딘지도 모르는 지명이 익숙했다. 곡성 뭐가 유명했더라.. 곡성.. 아.. 뭣이중헌디..
심지어 광주에서 여수로 바로 가는 버스는 또 있었다. 내일로를 끊은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난 저렴한 여행을 원했던 게 아니라 내일로 여행을 하는 내 자신을 원했던 게 아닐까.
오늘은 날이 화창했다. 삼만 원짜리 숙소의 창문을 열었더니 눈이 부시게 환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어제보다도 더 무거워진 가방을 들고 체크아웃을 했다. 무인텔이었는데 카드키도 없이 그냥 나가면 된다고 하더라.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하면서 터미널로 향했다.
어제 갔던 빵집에서 산 빵을 먹으면서 걸었다. 간만에 화창한 하늘 아래서 터질 것 같은 가방을 메고 빵을 먹으면서 걷는 모습은 누가 봐도 관광객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길빵을 마칠 즈음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유스퀘어는 생각보다 별 게 없는 버스 터미널이었다. 기대가 컸는지, 그냥 좀 큰 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도대체 난 무얼 바라고 있었던 걸까. 사람도 장소도 기대한 만큼 결과를 만족하는 건 드물다. 그렇게 점점 바라는 것 없이 살아가나 보다. 시간이 남아 영풍문고를 갔다. 옛날에 누가 유스퀘어 영풍문고를 시간이 남을 때 자주 간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옛사람이었다.
책을 또 샀다. 또 책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삼천구백 원에 팔았기 때문이다. 책임은 영풍문고에 있다. 곡성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곡성은 생각 이상으로 시골이었다. 너무 시골 같아서 인구수를 알아보니 이만 명이 조금 넘는 도시였다.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행정구역상 지명도 군이다.
아무리 그래도 오자마자 가는 게 아쉬워 터미널에서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서 이십 분 정도 되는 거리는 곡성을 둘러보기에 충분했다. 작디작은 동네, 그곳에서 숨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몇 안 되는 식당과 관광객. 제주도의 시골 마을 같았다. 한경을 걸을 때 딱 이 기분이었다.
여수로 가는 기차가 생각보다 작았다. 이렇게 작은 KTX도 있나 싶어서 표를 다시 한번 보니까 ITX였다. 새마을호 같은 기차니까 작을 수밖에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여수만 가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입석으로 끊었는데 남는 자리가 많아서 앉아서 갔다. 충분하다.
여수는 실로 엑스포의 도시였다. 괜히 역 이름이 여수역이 아닌 여수엑스포역인지 알 수 있었다. 아파트만 한 건물들이 웅장했다. 놀라울 만큼 건물들이 으리으리했다. 광주 인구수의 반의반도 안 되는 도시면서 아르떼뮤지엄까지 있었다. 제주도에서도 안 가본 아르떼뮤지엄이 코 앞에 있길래 가볼까 하다가 만칠천 원이나 하는 입장료를 보고선 포기했다. 미디어아트 많이 봤다.
빵 하나로 아침을 때운 나머지 배가 고팠다. 지나가다 보인 김치찌개가 맛있어 보였다. 걷다 말고 식당에 들어갔다. 두 시가 넘는 평일 낮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김치찌개 정식을 시켰다. 전라도답게 반찬만 여덟 가지가 나왔다. 배불리 먹고 나왔다. 숙소로 갔다.
숙소에 짐짝만 한 가방을 맡기고 어제 산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나왔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여수엔 딸기모찌 가게가 많았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가게마다 손님들이 길게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심지어 여수하고 관련도 없다. 무슨 맛인지도 안 궁금했다. 그냥 딸기에 찹쌀떡 먹는 맛이겠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을 읽으러 도착한 카페에는 융드립 커피가 있었다. 최근 필터커피와 융드립 커피의 차이를 배운 나는 융드립 커피를 시켰다. 직접 가져다 주신 커피를 건네주며 먹는 법에 대해 알려주셨다. 혀 끝에서 가운데로 맛이 몰리는.. 쌉쌀한.. 뭐라고 하셨다. 맛있다고 했다. 사실 필터 커피와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데 아직 잘 모르나 보다. 사장님의 열정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잘 마셨다고 인사를 드리니 또 설명을 시작하셨다. 심지어 서비스라고 드립 커피를 한 잔 더 내려주셨다. 왜 이렇게까지 나한테 잘해주는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바리스타를 꿈꾸고 있는 줄 알고 계셨다. 아까 융드립커피를 고를 때 최근 바리스타 공부를 하면서 융드립과 필터의 차이를 배웠다고 말한 게 화가 됐다. 그래도 감사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꿈을 위해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는..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의도치 않게 두 번째 커피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온 나는 할 게 없어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책도 좀 읽었는데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목 한가운데서 혼자 책을 읽는 꼴이 우스워 금방 덮어버렸다. 여수 바다를 보면서 마시는 커피는 아마도 여운이 길 것이다.
택배를 보내야지 싶었다. 벽돌보다도 무거운 책 네 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박스를 구하지 못해서 고민이었다. 돈 주고 사긴 싫었다. 그렇게 고민만 하면서 걷던 중 신발 박스를 버리는 아저씨가 있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박스 하나만 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쓰레기장에나 가볼까 하다 말고 순식간에 깨끗한 상자를 구했다.
숙소에서 택배를 포장했다. 주인아주머니께 완충제를 받았다. 편의점 사장님께 테이프를 받았다. 의도치 않게 모든 일이 원활하게 흘러갔다. 신기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진짜 순식간에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된 느낌이었다. 트루먼이 딱 이 기분이었을 것이다. 편의점 사장님이 제주도로 보내냐길래 여행 왔다고 했다. 여수가 나으냐 제주도가 나으냐는 질문엔 여수가 훨씬 낫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섬보단 낫지..
혼자서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바닷가 공원으로 갔다. 공원 옆 낭만포차거리엔 낮보다 오십 배는 불어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벤치에 앉아 어제 보다 만 영화를 보며 혼자서 저녁을 먹고 마셨다. 포장한 치킨은 반도 못 먹고 버렸다. 배도 부르거니와 물려 죽을 지경이었다. 같이 들어있던 샐러드를 다 먹고 맥주 캔을 전부 비워도 물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반이나 남은 치킨을 보고선 했다는 게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공허함에 대한 생각이었다.
혼자 여수 밤바다 앞에서 여수 밤바다를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듣다가 듣다가 듣기 싫을 때까지 들었다. 그놈의 여수 밤바다를 보러 온 건데 생각보다 특별한 건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환상을 이제서야 깬 기분이었다. 기대한 만큼 실망하고, 기대하지 않은 만큼 만족하곤 한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래서 더욱이 슬퍼진다.
육인 실 도미토리에는 숙박객이 한 명 있었다. 둘이서 쓰게 된 김에 말을 걸어봤다. 어디서 오신 거냐고. 제주대학교에서 왔다고 하더라. 이게 글로 쓰니까 좀 이상한데, 너무 놀라서 어떻게 반응할지도 몰랐다. 처음엔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내 휴대폰에서 제주대학교 어플을 보여주고 난 후에야 서로를 믿을 수 있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론홍보학과 학생이었다. 심지어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도 나랑 비슷했다. 순식간에 친해질 수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세 시간을 넘게 이야기했는데 나와는 대척점에 있던 그 형은 서로에게 조언을 건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주제로 밤을 보냈는데,
형은 내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좋은 결과로 마무리하지 못했더라도 사랑했던 상대방은 본인에게 다시 한번 사랑의 감정을 되살려줄 수 있는 존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미안할 건 없지만, 사실 전혀 안 미안하지만, 난 하나도 고맙지 않다. 그저 미운 마음이 전부이다. 왜 내 앞에 나타났는지 왜 그렇게 날 힘들게 했는지 궁금한 마음뿐이다. 당신을 이해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난 아직 성숙해지긴 한참이나 멀었나 보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사랑, 슬픔과 일기, 독서와 혼자 하는 여행, 취미와 캡스톤까지. 여수와바다 게스트하우스 202호에는 또 다른 내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