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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여백 3집 05화

사바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사바하>

by 그린
기본 정보

장르 미스터리, 스릴러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2분

감독 장재현

출연 이정재, 박정민, 이재인, 유지태

시놉시스

한 시골 마을에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난다. 온전치 못한 다리로 태어난 ‘금화’(이재인)와 모두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언니 ‘그것’. 하지만 그들은 올해로 16살이 되었다. 신흥 종교 비리를 찾아내는 종교문제연구소 ‘박목사’(이정재)는 사슴동산이라는 새로운 종교 단체를 조사 중이다. 영월 터널에서 여중생이 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쫓던 경찰과 우연히 사슴동산에서 마주친 박목사는 이번 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기 전 터널 사건의 용의자는 자살하고,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실체를 알 수 없는 정비공 ‘나한’(박정민)과 16년 전 태어난 쌍둥이 동생 금화의 존재까지 사슴동산에 대해 파고들수록 박목사는 점점 더 많은 미스터리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이 태어나고 모든 사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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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요약(*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9년 강원도 영월, 기형적으로 태어난 쌍둥이 자매 중 한 명 ‘그것’은 온몸이 털로 뒤덮인 채 살아남아 동생 이금화와 은둔하며 자란다. 한편, 사이비 종교를 추적하는 박웅재 목사는 ‘사슴동산’이라는 신흥 종교 단체의 실체를 조사하던 중, 불사의 존재로 알려진 김제석과 그와 관련된 연쇄살인의 비밀을 파헤친다. 김제석은 자신을 파멸시킬 천적이 태어났다는 예언에 집착해, 살인 경험이 있는 소년범 네 명을 사천왕으로 삼아 1999년 영월 출생 여자아이 81명을 제거하게 한다. 그중 살아남은 금화는 정나한에게 납치되지만, 쌍둥이 언니 ‘울고 있는 자’의 계시로 구원받고, 정나한은 진실을 깨달아 김제석을 불태워 죽인다. 결국 예언은 실현되고, 모든 희생자들의 피로 더럽혀진 김제석은 스스로 만든 믿음의 수렁 속에서 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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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포인트

종교 미스터리

영화는 초반부터 정보의 조각을 흩뿌려 놓고, 후반부에 이르러 그 조각을 단번에 이어 붙인다. 불교와 기독교, 민간신앙까지 넘나드는 다층적 종교 코드가 뒤얽히며 관객 스스로 '사바하'의 의미를 해석하게 만든다. 특히 결말부의 반전은 인물의 실체와 종교적 상징을 다시 되짚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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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하는 무엇인가

불경에서 사바하는 고통받는 세계를 뜻한다. 이 영화는 신이 침묵한 세계, 고통받는 인간들,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의 야욕을 통해 사바하라는 단어를 풀어낸다. 영화 속 모든 사건은 사바하에서 출발하고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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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윤리, 인간의 믿음

믿음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종교가 구원의 언어가 되기도, 살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택이 때로는 누군가에겐 파멸이 되는 아이러니. 사이비와 신앙의 경계, 구원과 광기의 뒤섞임이 이 영화를 강렬한 종교 스릴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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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김제석, 미륵에서 악마로

김제석은 1899년생으로, 116년 동안 늙지 않으며 불사의 존재가 된 인물이다. 그는 한때 독립군을 지원하고 문화재를 회수하며 ‘살아 있는 미륵’으로 추앙받았지만, 1985년 티베트 고승 네충텐파로부터 “당신을 파멸시킬 천적이 고향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집착과 공포에 사로잡히며 무너진다. 이후 김제석은 예언을 피하기 위해 항마경이라는 살인 경전을 만들고, 네 소년범을 사천왕으로 삼아 1999년생 여자아이 81명을 제거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고향 영월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태백, 정선, 제천, 단양에 법당을 세우고, 살인 전과가 있는 네 소년을 사천지왕으로 포섭한다. 그들에게는 “짐승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지금부터 하늘의 뜻을 대신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천왕 신화를 덧입혀 종교적 구원의 명분을 부여하고, 자신을 위해 살인을 정당화하도록 세뇌한다. 이는 악을 신앙으로 위장한 구원 서사이다.

김제석은 범인을 초월한 존재였지만, 예언 앞에서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악으로 변모했다. 이는 불교의 ‘불퇴전’ 단계에 이르지 못한 타락한 미륵이며, 성경 속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 또는 적그리스도의 형상과도 겹친다. 결말부에서 그는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 불 속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죽는다. 초연함 대신 집착으로 끝난 그의 죽음은, 신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가장 비천한 욕망에 빠진 인간의 최후다. 그는 미륵에서 시작해, 사탄으로 추락한 인물이었다.

영화는 김제석이 깨달음을 얻어 늙지 않는 ‘미륵’이 되었지만,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듣고 번뇌에 빠지며 타락하는 과정을 통해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설무악설을 드러낸다. 해안 스님의 말처럼 불교에는 악이 없고, 다만 집착과 욕망이 일으키는 번뇌만 있을 뿐이다. 즉,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어떠한 두려움에도 흔들려서는 안 되며, 예언 역시 우주의 순리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김제석은 예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살생을 통해 운명을 거스르려 한다. 이는 불교에서 금기시하는 행위이며, 그가 부처의 길을 이탈한 순간이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설의 인과는, 김제석이 자신의 죽음을 거부하며 만든 살육의 구조조차 결국 그의 파멸로 되돌아오는 순환을 의미한다. 12손가락은 연기설 12지의 상징으로, 깨달음의 완성을 의미하지만, 김제석은 그 깨달음을 가졌음에도 마지막 시험을 넘지 못하고, 욕망에 물든 ‘짐승’으로 전락한다. 그는 더 이상 미륵이 아니다. 번뇌에 무너진 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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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자연의 섭리

‘그것’은 미륵도, 괴물도 아닌 자연의 섭리이며, 김제석의 천적으로서 태어난 존재다. 흉측한 외형이나 금화의 다리를 문 행위는 모두 김제석을 파멸시키기 위한 필연적 장치이며, 무당을 내쫓은 이유도 악의가 아니라 ‘기다리던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나한이 다가오기를 기다렸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그가 믿는 미륵의 형상을 취했다. 감독은 만약 그 대상이 개신교 신자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을 것이라 밝혔다. 즉, ‘그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을 거울처럼 비추는 섭리적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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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재 목사, 신을 의심하며 갈구하다

박웅재 목사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진짜 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갈망을 품은 인물이다. 그가 신앙을 잃은 계기는 남아공에서 가족을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잃은 자신의 과거 때문이며, 이후 종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세속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그러나 김제석의 실체를 쫓는 여정 속에서 그는 다시 ‘진짜 신’의 흔적을 좇고, 결국 아무것도 명확히 보지 못한 채 묻는다.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 감독은 박웅재라는 인물을 통해 신을 의심하면서도 여전히 신의 존재를 바란다. 영화는 무신론이 아닌 신의 침묵과 인간의 기도를 이야기한다. 결말의 박웅재는 신을 만나지 못한 인간의 비극적 회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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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포인트

김제석의 정체

김제석은 실제로 늙지 않았다. 그는 ‘성불’했고, 신이 될 수 있었던 존재였다. 하지만 진정한 신은 자기 운명을 감당하는 자다. 그는 예언에 휘둘리고, 두려움에 집착하여 수많은 생명을 살해했다.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그가 쌓아올린 동방교와 사슴동산은 구원이 아닌 공포의 구조물이었다. 신이 되고자 했던 자가 결국 인간의 집착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을 때, 영화는 묻는다. “그가 구하려 한 것은 누구였나, 결국 자신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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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의 역할

사천왕은 본래 악신이었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해 선신이 되었다. 김제석은 이 설정을 역이용한다. 죄 많은 소년들을 사천왕으로 삼고, 죄를 ‘속죄의 무기’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결국 어린 생명을 도륙하는 집단적 살육이었다. 종교가 선을 명령할 때, 그것은 신념이 된다. 하지만 종교가 악을 명령할 때, 그것은 광기가 된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실행했다. 그 어떤 악보다 두려운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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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울고만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그렇게 울고만 계시나이까?” 마지막 기도는 신을 향한 것 같지만, 동시에 인간 자신을 향한 절규이기도 하다. 신이 우리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욕망하고, 왜곡하고, 조작하며 스스로 신의 침묵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영화는 ‘구원’이란 말보다 ‘울음’을 택한다. 누군가가 울고 있다는 것, 그것은 아직 인간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가장 마지막 징표다. 신이 없다면, 남은 것은 울부짖는 인간의 기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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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사바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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