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독일의 의료보험
우리는 수술과 방사선 치료와 약물치료로 거의 두 달을 병원에 있다가 나왔는데 의료비로 지불한 돈은 거의 없었다.
일단 의사는 돈 생각을 안 하고 환자를 위해 최선인 길을 찾는다는 것을 보고 독일 국민이라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들의 모습 속에서 난 생명의 고귀함을 보았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저리 어려운 일인 것을 누구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권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돈 없으면 수술도 안 해주던 시절이었다. "돈부터 준비해 오세요!"란 말을 의사들이 하던 때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아팠으면 양가에 누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린 언제 저런 나라처럼 사나 너무 부러웠다.
거기에다가 더 놀란 것은 남편이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도 평상시 월급의 90%가 나왔다.
난 이게 뭔지 몰라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너 살라고 보험사가 주는 돈이다."라 했다.
남편이 아파서 일 못하는 동안 내가 살 수 있는 생활비를 주다니....
가족도 챙기다니 감격스러웠다.
우리나라도 요즘 생활비를 지급한다는 보험을 선전하지만 국가보험이 아닌 사보험들이다.
그러다 보니 돈 걱정 없이 어려움을 지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는데 돈 걱정까지 했으면 못 견뎠을 수도 있었겠다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료제도는 정말 고마웠다.
외국인이어도 평등하게 적용시켜 준 제도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 때문에 내 마음속에는 독일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크게 아팠던 사람들은 보험사가 요양을 보낸다.
남편도 4주간 작은 폭포가 있는 도시로 요양을 갔다.
주말에 방문을 하려면 식구들은 식사, 숙소비를 내야 하지만 남편은 무료였다.
주로 환자들에 맞춘 식단과 운동으로 스케줄이 짜여있고 의사들도 상주하는 그런 곳이었다.
주중에는 환자들끼리 파트너가 있어 같이 운동을 한다. 이들은 많은 경우 바람이 난다. 자신과 상대의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람의 마음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요양이 끝나면 많이 이혼을 하고 그곳서 만난 사람끼리 결혼을 한다.
아프기 전과 후의 배우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뭐랄 수도 없는 것이 아플 동안 배우자는 나처럼 붙어있지 않는다.
나는 의사가 남편에게 "당신의 최고 치료제는 부인이다."라고 했고 간호사들은 나 보고 가서 간호사 월급을 받으라고 했다.
독일부부들은 잠시 면회만 하고 간다.
힘들고 외로 울텐테 인사정도하고 간다.
그러다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니 바뀔 수밖에 없다.
의사도 아파보았던 의사가 환자에게 따뜻하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것을 마음으로 공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주말은 식구들과 자유시간을 갖게 되어있어 다른 사람은 식구가 다오니 나도 안 갈 수가 없었다.
가려면 시골이라 기차를 3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기차도 아주 작은 기차였다.
비가 와도 우비 쓰고 걸어 다니다 차와 케이크를 하나씩 사 먹고 돌아오곤 하였다.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다.
그때 남의 농가 헛간도 들어가서 소시지 만드는 것도 보고 소들도 보았다.
나름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소박한 시골 풍경 욕심부릴것없이 살아있음이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다 돌아오면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고단백 식사와 당뇨환자를 위한 식사로 구분된다.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 먹고 방에 돌아와 쉬면 된다.
그러니 나도 따라서 힐링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유학 가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추천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경험이었지만 많이 뭔가를 배우고 인생을 알았다는 느낌이 든다.
여러모로 고마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