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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프니 엄마야.

3화.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

by 권에스더

내가 고등학교 때 옆집 살던 아주머니는 장성한 자식들과 같이 있는 엄마를 보며 "여자의 일생이 저 정도만 돼도 참 잘 산 것이다."라 하며 엄마를 무척 부러워하셨다.

그것은 거는 전혀 모르고 어느 한 단편만 보고 한 말이었다.


무남독녀로 곱게 크던 엄마는 22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

아버지의 직장이 서울이라 그것 하나보고 딸을 서울 가서 살게 하고픈 할아버지의 결정이셨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 서울로 가는 줄 알고 기다리는 엄마에게 아버지는 짐을 싸 들고 고향으로 아주 돌아오셨고 그 뒤로 엄마는 시집살이의 매운맛을 겪게 되셨다.

곱게 컸던 엄마에게는 시집살이가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다.


그 시절 친할머니가 읍내에 여관을 운영하셔서 그 많은 님방의 빨래를 며느리인 엄마가 해야 했다.

겨울에 하는 찬물 빨래는 뼈가 시리다 못해 아프다. 그러다 보면 손등이 터져 몹시 아팠어도 빨래를 해야 했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가 크림을 사다 몰래 주면 할머니가 아시고 엄마만 더 혼이 났다.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

그럼 엄마는 무서워서 고개도 못 들었다.

왜 할머니는 사람을 아끼지 못하셨는지,..


어려운 시집살이를 몇 년 견디고 나니 큰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사업을 도우러 서울로 오셨고 따라서 분가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문제가 옆집으로 이사 온 큰아버지셨다. 엄마한테 큰아버지 시중과 사업체 뒷바라지를 하란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크게 사업을 하셔서 날마다 양복을 입고 나가셨는데 속에 입는 와이셔츠를 매일 갈아입으셨다. 그 시절의 와이셔츠는 잘 구겨지는 면 와이셔츠였다.

그 주름을 펴자면 엄마가 빨아 풀을 먹여 달여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으로 준비되는 것이었다.

매일 풀을 만지니 손끝은 갈라졌고 피가 났다.

그리고 사업체의 일하는 사람 식사를 엄마가 준비하셔야 하니 하루에 도시락을 서른 개 넘게 쌌다 하셨다.


엄마의 육체노동은 대단히 심했다.

시집살이를 못 견뎌 큰엄마가 집을 나가 안 계셨기 때문에 엄마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되어버렸다.


엄마도 도망가지 도대체 무얼 믿고 참고 견뎠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무렵에 언니를 낳았는데 먹지 못하고 일만 하여 힘이 없어 낳다가 죽다 살아났다 하셨다.


아버지를 보고 시집왔으면 엄마를 지켰어야지 세상에 공장직원보다 힘들게 일하게 하다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나오려 하다가도 시절이 그러니 아내 편을 들지 못한 아버지도 딱했다.

아내를 편들면 팔불출에 불효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런 시절을 묵묵히 살아냈다.

시집을 왔으면 참고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 어린 자식을 두고 차마 갈 수 없어 참았다고 하셨다.

그 시절은 참는 것이 미덕이었으니 참 딱한 일이었다.

엄마의 아까운 청춘은 그렇게 힘들게 지나갔다.

엄마의 그늘 덕에 우리들은 행복하게 자랐지만 것은 엄마가 너무도 힘들게 만든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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