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파서 못 부른 이름
어려서부터 모든 분야에 뛰어나 칭찬 속에 자란 선배언니였다. 지방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부모님은 지방 공무원으로 일을 하셨지만 살림이 넉넉지는 않은 집 맏딸이었다.
이 언니는 집안의 자랑이자 부모의 자랑이었다.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다닐 때 사귀던 남자가 명문대 의대생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이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남자친구의 어머님을 뵈었는데 "의사와 결혼하려면 적어도 열쇠 3개는 해와야지, 그런데 형편이 안되면 헤어져야지!"라 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의사아들을 둔 엄마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말끝마다 "우리 의사아들이!"이라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냥 아들이 아니었다.
몇 달을 고민 고민을 하던 두 사람은 남자친구가 "난 우리 엄마를 이길 수가 없어. 그만 헤어지자!"라 했다. 언니 역시 집안형편을 아니 부모님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군대는 남자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스스로 찾아가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리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자도 그랬지만 그런 남자들은 더 드물었다.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지고 그 사람을 잊지 못한 채
대충 결혼을 하였다.
대충이라 쓴 이유는 남편감은 썩 탐탁지 않은데 시부모님이 너무 며느리감을 사랑해 주고 아껴주고 떠받들어줘 그냥 시집을 갔다.
시부모님은 며느리가 당신 아들한테 과하다 생각을 한 것이었다.
아들네가 이사한다면 시부모님이 먼저 와서 도배며 수리를 미리 다해줄정도로 며느리를 아꼈다.
남편은 처음엔 대기업을 다녔는데 외국근무 일 년 후 돌아오니 실직을 했고 그 후로는 직업이 없어서 가족 부양을 이 언니가 수능영어과외를 하며 해야 했다.
실력이 있으니 학생들은 많아서 밤새며 일을 했다.
언니도 아들이 있어 자녀 교육 때문에 남편과 아들은 캐나다로 보냈고 생활비는 언니가 한국에서 벌어 보내기를 십 년을 했다.
아들이 대학을 진학하고 난 뒤 언니도
캐나다로 가서 그때서야 식구들이 모여 살았다.
그 후 몇 년 소식을 모르다가 어느 날 소식이 전해졌는데 언니는 암으로 일찍 사망을 하였고 죽기 얼마 전에 혼수상태가 오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친척도 부모도 아닌 모르는 이름이었다고 남편이 말을 했다.
박ㅇㅇ이라고 부르더라고....
이 말을 들은 우리는 첫사랑의 이름이란 것을 알고 가슴이 미어졌다.
혼수상태에서도 못 잊을 그 이름 박ㅇㅇ....
아니 의식이 있을 때는 묻어두었다가 의식이 없어져야 올라오는 이름....
그 사람은 알려나....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한여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는 하려나!
죽기 전에 한 번만 보고 싶어 부르던 그 이름은 이제 머나먼 캐나다의 하늘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