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서 나를 일으킨 즐거움의 정체

by 셀프소생러

가끔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에 온전이 집중해서 내가 나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몰입의 순간들이요.

누구나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빈도와 강도는 다르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몰입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청각이 예민한 편이지만 소리에는 그다지 집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뭔가를 보면서 읽을 때 비교적 쉽게 빠져듭니다.

학교 다닐 때는 책을 읽느라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렸고, 한창 일이 재미있을 땐 깜깜한 밤이 되도록 일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삶에서 이런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살살 즐거움은 삶에서 수증기처럼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해야 할 것이 많았고, 해내야 하는 것이 많은 날이 계속되면서였던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해,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했어야 하는 '지금 해야 할 것들'이 즐겨야 느낄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을 앗아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지쳐 곯아떨어졌던 퇴근길 버스, 비집고 타야 하는 만원 버스.

그 안에서 휘둘리고 흔들리며 간절히 원했던 나를 위한 자리 한 칸이요.

집으로 돌아가는 무거운 발걸음이, 지친 마음이 메말라 가는 나의 정신이고 영혼임을 그대는 알지 못했습니다.

어디에도 내가 없고, 쉼이란 그저 바닥난 체력을 끌어올리는 필요충분조건이 되었을 때, 삶이란 그저 내가 휩쓸린 어지러운 환경일 뿐이었습니다.


생명을 다한 꽃은 시들어가며 꽃씨를 남기듯 어지러운 정신에 휩쓸린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세 번의 유산이라는 절망 끝에 간절히 얻은 아이는 행복이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뭔가를 필요로 하는 절박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바닥난 우물에서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더 얻으려는 듯 아이는 예민했습니다.

저는 더 지쳐갔고요.

채워지지 못한 마음이 쏟아낸 정성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삶은 고통이 되었습니다.

야속하게도 그 틈을 비집고 스멀스멀 우울이 올라오더군요.

그리고 그 뒤로 죽음의 그림자가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고통은 성장의 계기도 되지만 삶의 끈을 의심하게 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송두리째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준 것은 말 못 하는 아이였습니다.

빛은 죽음 앞에 삶을 빛나게 하더군요. 아이를 위해 삶을 잡아야 했습니다.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엔 아이를 위한 그림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책들이 나를 녹였습니다.

따뜻한 말들은 혼란한 정신을 녹였고, 사랑이 넘치는 그림은 메마른 내 영혼을 따뜻하게 데웠습니다.

몽글몽글. 나를 버린 것 같았던 고통의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참 경이롭죠.


그때부터 다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꼼짝없이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하교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릴 시간이 이미 많이 늦어버렸다는 것도 모르고!

다행히 친절한 지인의 도움으로 그 사건은 아이에게 별 충격을 남기지 않고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후 아이에게는 핸드폰이 생겼고,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시간 안에 제가 사라지는 마법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행복이고, 힐링의 시간이지요.

그래서 책을 즐깁니다. 글을 쓰고요.

고요만 남고 나는 없는 것 같은 그때가 온전히 내가 살아있고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향긋해 쉬이 놓아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무엇이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고, 무엇이 당신을 웃게 하는 힘이 되어주는지 궁금해집니다.

그게 무엇이든 나를 위해, 삶을 위해 우리의 즐거움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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