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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없다, 장소만이 있을 뿐

<가득 채워져야 할 애도에 부치며...>

by 춘고

삶이, 여러 비극들이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기도 해. 많은 철학자들이 말했지만 도무지 공감가지 않던 ‘빈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어떤 역사를 가지는지, 현재 그것은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은 비어있지 않고 가득 차 있다고 했어. 그는 세상의 물리법칙이 물, 불, 흙, 공기가 특정 성질들과 만나서 작용되고, 그렇게 세상은 틈 없이 어떤 원리들로 채워져 움직이고 있다고...

마치 세상은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어떤 필연들의 움직임이라는 것.


하지만 반대로 기독교는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기독교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철학을 이어받았고, 현실적 세상이 아닌 관념의 세상에서라도 모든 것의 근본을 담을 이데아의 세계처럼, 종교에서도 신이 있어야 할, 그리고 신이 움직일 수 있는 어떤 ‘빈 공간’이 존재해야 했어.

'0’과 ‘1’ 그리고 '거룩한 공회'

"0"... 모든 대상의 바탕에 깔려야 할 확실하고도 바뀔 수 없는 어떤 근본,준거... 이데아.

즉 '1'이라는 현실세계에 놓여진 사실적 대상에 대한 원본적이며 근본적으로서의 '0' 을 보관해야 할 공간,

그러니까 ‘0'을 위한 공간.


거룩한 공회..

종교는 0의 속성을 이어받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며 신이 있어야 할, 또는 그의 후계자가 재림하여야 할 어떤 공간을 현실에서도 만들어냈어야 했고, 그것이 거룩한 공회, 즉 신을 임할 수 있는 교회였어.


공회라는 것, 어쩌면 교회, 누군가는 성당이라는 곳.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그 누구를 위하지만, 그 누구를 위하지 않을 공간이기도 한 바로 그 ‘빈 공간’


그래서 종교(가톨릭)는 공간적으로, 관념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빈 공간을 요구함과 동시에 ‘빈 공간’의 개념을 세련되게 정당화할 플라톤의 철학을 들여와 이용했겠지.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가 지배한 세상으로부터 배척되어야 할 그 무엇이 되었고,

그런 역사의 흐름을 잘 그려낸 소설이 ‘장미의 이름’이었어.

소설의 내용은, 신의 지식, 신의 말씀을 담은 장서관이 등장하지.

그 곳은 최소 인원의 결정권자들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공간(빈 공간), 즉 신으로 대변되는 공간이며..

장서관의 비밀을 파해치는 사람으로서, 아리스토텔테스의 저서에 관심 깊은’윌리엄 수도사’가 등장해.

소설 속에서 종교는 그 거룩한 공간을 외부인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또는 그 공간의 본질인 신의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서 성스러운 심판의 이름으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해치게 되지…

소설의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빌려, 권위와 신성의 공간이 되어버린 장서관을 끝내 불태워져야 할 공간으로서 소설을 그려냈지.


'빈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 말고도 다른 책에서도 찾을 수 있었어.

최근 읽고 있는 도시의 역사에 관한 책이 있는데, 책의 내용 중에 공간을 ‘장소성’ 그리고 ‘공간성’으로 분류한 개념이 소개되어 있었어.


'르 코르뷔지에'라는 건축가는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뉴욕을 만들고 싶었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저주를 받은 불순한 도시 ‘바빌론’과 뉴욕을 등치 시킬 필요가 있었어.

유대인, 즉 성경이라는 승리의 역사에 적힌 바빌론은 자신들을 가두고 학대한 도시이면서 동시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도시였고, 그 외에 도시라는 집단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불온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지.

그러한 성경에서의 '바빌론 프레임'을 뉴욕에 덧씌워야만 정당한 명분을 내세우며 기존 도시를 말끔히 제거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성으로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지.

물론 그의 바람대로 뉴욕이 불도저에 의해 휩쓸리진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발상을 가져온 수많은 도시계획자들에 의해 많은 도시들에서 불도저가 활개를 쳤고, 불도저의 활동은 주로 빈민가와 상대적 빈곤지역이었어.


하지만 '도시'라는것.

도시는 그 자체의 속성이 바로 모순인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각자의 삶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대치되는 모순이 도시의 속성이며 도시가 도시로서 존재 가능한 이유인거지.


이 책의 저자는 공간과 장소는 언뜻 같은 개념인듯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어.

'장소'는 과거로부터의 역사가 녹아있는 곳

즉 과거에서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어떤 숨결이 존재하는 곳, 그렇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텅 비어 보여도, 실제는 비어있지 않고 역사와 숨결, 흔적들이 가득 채워진 곳인 반면에,

'공간'은 그 자체의 빈 공간으로서 추가되거나 삭제로 구성되는 편집적인 곳


이것은 실로 많은 것들을 말해주는듯 해, 사실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어.


최근 폭우로 인한 침수사태에서도 느꼈지만, 현 정부의 인식을 알 수 있었어.

물난리를 보며, 침수된 반지하를 보며, 곧이어 발표한 대책은 반지하를 '없애는 것'이라고 했지.

그들의 인식은 대상을 '공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필요에 의해, 입맛에, 취향에 맞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기 위해 기존의 것들은 삭제되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거지.

이미 그곳에는 오랜동안 살던 사람들의 숨결과 흔적이 가득하고,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는데도, 공간주의자들에게 있어 반지하의 사람들은 그저 공간적 추가/삭제의 대상이었던 거지.


내가 아는 헤겔은 이렇게 말했어. 세상을 변증적으로 대하는 것은 살아가며 수많은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각자 삶으로부터 발생되는 모순들을 극복하고, 즉 어쩔 수 없는 정반합의 충돌적 비극을 극복하는 것이 변증적인 사고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 근본에서부터 침잠되어 현재를 판단하는 것과 더불어 주간과 객관을 넘어 절대/초월적인 사고체계를 가지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장소적' 사고방식인,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기존의 상태를 이해하고, 과거에서부터 그 존재를 탐구하고, 모순을 인정하며, 그 모순을 품에 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또한 어른들은 쉽게 말하기도 하지,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세상을 많이 알지 못한다는 이유를 붙여서…

많은 어른들은 젊거나 어린 사람들의 개별적 과거, 즉 그들의 '장소성'을 무시하고, 젋은이를 단지 '공간적'으로 바라보면서 당장 일어난 사건으로만 판단하고 그들을 쉽게 폄하,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하지.

어째서 어린 친구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어린 친구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어떤 이념에 짓눌려 자신도 모르게 비행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지.. . 젋은이의 장소적 배경에는 관심이 없을꺼야.


슬프게도 그런 어른들이 모여 이 나라에 한 '정부'를 만들었지..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마치 종교처럼 빈 공간을 만들고 있어,

그리고 그 공간에 숭배해야 할 어떤 이념을 채우지.


또한 그들은 사람들의 빈 공간에 침투하기도 해.

장소나 현실에서처럼, 사람의 내면에도 '빈 공간'이 있거든..

대상에 대한 원인이나, 생각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마음의 공간'.

그들은 이념의 이름을 앞세워 그 공간에 안착하려들기도 해.


바로 지금 순간에도 그들은 빈 공간을 만듦으로써, 빈 공간에 침투하려 하지.

텅 빈 수사, 텅텅 빈 용의자, 그리고..

’애도’라는 이름으로 텅 비어둔 시간을 만들고 그 속에 몸을 숨기지.


그래서 우리는 항상 생각을 하고, 대상의 근원을 묻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끊김없는 사고를 가져야 해.

마음의 빈 공간을 두어서는 분명 안 될 거야.


할 말은 여기까지야...

내가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초라한 글과, 이 글이 공개된 장소에 보임으로써 약간의 의미를 보태는 것.


마음과 역사와 기억을 가득 담아, 고인들의 명복과, 의미 가득한 애도가 꼭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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