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빛은 더 선명해졌다. 사람이 빠져나간 거리엔 네온사인의 남은 호흡만이 팔딱거렸다.
내 카페는 그 빛이 닿지 않는 골목 맨 끝에 있었다. 간판의 ‘문턱(門턱)’이라는 글자는 몇 획이 사라져 ‘문—’만 남았고, 유리문에는 녹슨 종 하나가 달려 있었다. 낮엔 가끔 길 잃은 관광객이 들어오고, 눈에 띄지 않는 직장인이 서둘러 테이크아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문은 자정을 넘어선 뒤에야 열린다. 그 시간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발소리가 가볍다. 가죽 밑창이 바닥을 단단히 눌러주는 소리가 아니라, 바람결에 실려온 낙엽처럼 문턱 너머로 흘러든다. 나는 그런 발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무서웠다. 이제는 규칙을 만든 덕에 덜 무섭다. 첫째, 나는 얼굴을 오래 보지 않는다. 둘째, 이름을 묻지 않는다. 셋째, 그들이 떠날 때까지, 그들이 남기고 싶은 말을 막지 않는다. 그들은 들어와서 한동안 말이 없다. 좌석을 고르는 대신, 카운터와 손님 사이에 서서 내 손을 본다. 손은 거짓말을 못 한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한 잔을 내리는지, 얼마나 오래 이 일을 해왔는지, 얼마나 많은 마지막을 지켜봤는지가 커피 찌꺼기보다 선명하게 남는다. “혹시… 이곳에서
마지막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요?” 그 말은 주문이자 신호다. 나는 작은 구리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그 사이 그들을 위한 잔을 데운다. 산미가 짙은 원두는 피한다. 밤엔 부드럽게 내려앉는 향이 좋다. 스모키함이 덜고
달큰한 끝 맛이 남는 블렌드로, 한 모금에 미련이 녹도록. 그들은 커피 향이 퍼지는 동안 이야기를 꺼낸다.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사과,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고백, 무심코 지나쳐버린 약속 한 줄. 삶이 끝나고 나서야 입을 여는 말들.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카운터 아래 노트를 꺼내 날짜와 잔의 모양, 남긴 말의 핵심을 메모한다. 그 노트의 맨 첫 페이지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떠나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의 등을 본다.” 내 이름은 채은. 사람들은 나를 바리스타라 부르지만, 내가 진짜로 하는 일은 ‘보내는 일’에 가깝다. 나는 그들을 붙잡지 않는다. 위로의 문장을 길게 늘어놓지도 않는다. 이곳에 오는 이들은 다만 한 잔의 온기를 단서로, 스스로 떠날 길을 찾아간다. 커피는 신호탄이고, 향은 길잡이다. 창가에는 오래된 사진이 한 장 있다. 내가 이 가게를 처음 인수했을 때 벽장 깊숙한 곳에서 나온 흑백 사진. 세 사람이 웃고 있는 장면인데, 가운데 있는 여자의 웃음이 유난히 눈에 박혔다. 처음엔 아무와도 닮지 않았는데, 밤이 깊어지면 그 웃음이 누군가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기억은 늘 뒤늦게 닿는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기다리는 마지막 손님도 이 문을 열고 들어올 거라고. 내가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그 손님은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때, 나는 그동안 적어온 노트를 한 장씩 뜯어내어 커피 잔 옆에 포개어 둘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나의 한 잔을, 나 자신의 마지막을 내릴 것이다. 문턱은 낮다. 하지만 사람마다 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오늘 밤도 종은 울릴 것이다. 누군가는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도착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내릴 것이다. 향이 잦아들 때까지, 누군가가 떠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