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다가 나빴다가

by 인상파

좋았다가 나빴다가


병실에 있는데 학교가 끝났는지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콧물이 줄줄 흘러내려 코를 푸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코맹맹이 소리를 듣고 있으니 안 봐도 코가 막혀 힘들어 보였다. 아이가 먼저 병원에 가자고 했고, 나는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병원을 나섰다.


소아과에 들러 접수를 했는데 대기 환자가 많았다. 접수대에 물어보니 대기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아이와 함께 근처 대형 할인마트에 잠시 들렀다. 원래 진료 후 가자고 했지만, 그러면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미리 다녀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내가 장을 보는 동안 아이는 문구류 몇 개를 골랐다. 작은 쇼핑이었지만 아이의 표정은 잠시나마 들떠 보였다.


약을 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 남편은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 딸과 병원·마트 이야기를 들려주자 반응을 보였다. 순간, 이전의 그가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들 생각도 날까 싶어 전화를 걸어주었다. 남편은 “아빠야” 하고 말했다. 눈앞에 없는 아들을 마음속에 그리며 통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는 단출했다. 시키는 대로 몇 마디를 늘어놓다가 “그럼 끊자”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그 마지막 말이 서늘하게 귓가에 남았다.


하지만 이내 남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자기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병실이 곧 집인 듯, 가든 오든 상관없다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남편의 잠자는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먹는 게 시원치 않아 목소리는 가늘고 떨린다. 가끔 혼잣말을 하듯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지만,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남편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그는 이미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려는 발걸음을 떼고 있다.


그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와 떠나려는 자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 다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저쪽 세상으로 둘 다 건너가게 되면, 그때는 간극이 사라질까. 두 번 다시 사람의 옷을 입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비로소 평온할까.

(당신이 떠나기 전 3월 중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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