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by 인상파

마흔 다섯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삶은 늘 소멸을 내포하고, 죽음은 삶의 그림자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 필연을 거역할 수 없다. 다만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살아 있는 매일은 무겁고 두렵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받아들이라고, 이 두려움 속에서도 살아내라고. 죽음을 미루려 애쓰기보다, 어쩌면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껴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일지 모른다.


마흔 다섯.
남편이 멈춰 선 자리다. 삶의 길목에서 그 숫자는 더 이상 단순한 나이가 아니다. 그것은 칼날 같은 경계선이다. 젊음과 늙음을 가르기 전에, 삶과 죽음을 가른다. 마흔 다섯에서 끝나버린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살아갈 모든 시간들이 무참히 잘려 나갔다는 뜻이다. 내게도 이제 마흔 다섯은 생애의 불길한 상징이자, 피할 수 없는 절망의 이정표가 되었다.


누구에게는 인생의 한창 무르익는 나이, 경력과 가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시기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생이 무너지고 죽음이 손짓하는 나이로 기록된다. 나는 그 숫자를 바라보며 묻는다. 왜 하필 마흔 다섯인가. 누군가는 팔십에도 구십에도 살아 숨 쉬는데, 왜 그에게는 이 나이에서 생이 끊어져야 하는가. 인간의 시간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삶은 덧없이 짧고, 어떤 삶은 기이할 만큼 길다. 그 불균형 앞에서 남겨진 자는 할 말을 잃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사십 년이 한 세기만큼 길게 남겨지고, 또 어떤 이에게는 구십 년조차 눈 깜짝할 사이로 흘러간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는 불합리로 내리꽂힌다. 마흔 다섯에서 삶을 빼앗긴 자와, 백 살까지 살아내는 자 사이의 간극은 단순히 ‘운명’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 차이는 설명 불능의 부조리이자, 우리 존재의 불평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남편이 내 얼굴에 불쑥 뽀뽀를 했다.
그 한순간, 나는 잠시 환영처럼 생각했다. 죽음이 이미 그의 몸을 파고들었지만, 여전히 삶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마흔 다섯에서 꺼질 불꽃이었지만, 그 작은 입맞춤은 내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무언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마흔 다섯.
그 숫자는 죽음의 잣대이자, 동시에 마지막까지 삶을 증명하는 표식이다. 그 숫자를 붙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뇐다. 삶은 끝나도, 살아 있었다는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떠나기 전 3월 중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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