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독 불능의 언어

by 인상파

해독 불능의 언어


남편 맞은편 아저씨가 중환자실로 내려간 후, 그 자리에 팔순이 넘은 뇌졸중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간병은 아내 되는 할머니가 맡았다. 할머니도 팔순이 넘었다. 150센티도 안 되는 작은 키에 소박한 몸피, 도대체 어디에서 그 힘이 나와 할아버지를 간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간병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간병을 받아야 할 연세인데도, 할머니는 꼿꼿했다. 남다른 깡다구가 느껴졌다. 간병인을 쓸 형편도 못 되고,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 결국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뭔가를 바라고 기대는 마음이야말로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일 텐데, 그런 점에서 할머니는 아직 늙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젊은이처럼 척척 기저귀를 갈아내며 남편을 돌보았다.


남편 침대 옆 자리에는 위암 말기 환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완도에서 올라온 사람이었다. 배를 두고 바다낚시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이었는데, 허리 통증이 심해 정형외과를 전전하다가, 결국 큰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그때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퍼져 있었다. 진단을 받은 지 6개월도 안 됐다. 그는 암성 통증이 극심할 때면 몸부림치며 부인에게 욕을 퍼붓기도 하고, 주사 줄을 끊어버리겠다며 가위를 달라 소리쳤다. 어떤 날은 목에 꽂힌 주사바늘을 몽땅 잡아 뽑아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호출을 받고 달려온 간호사들이 그를 진정시키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그럴 때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부인은 남편에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할 말이 있으면 글로 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통증에 시달려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환자에게 온전한 글씨를 쓸 힘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휘갈겨 적힌 글씨는 암호처럼 알아볼 수 없었다. 부인은 눈을 좇으며 해독하려 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내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나 역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괴발개발 이어진 글씨는 의미를 담기보다는 단지 흔적을 남긴 듯 보였다.


그 메모지는 병실 사람들의 손을 차례로 거쳤다. 간병인도, 보호자도, 누구도 그 뜻을 풀어내지 못했다. 아저씨는 이미 손아귀 힘을 잃어 글자를 끊어 쓰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기호로 세상에 마지막 흔적을 남기려는 것 같았다. 결국 메모는 누구에게도 해독되지 않은 채 쓸쓸히 남았다.


나는 그 종잇조각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죽어가는 이와 살아 있는 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언어였다. 떠나려는 자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 세계의 문턱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글조차 해독되지 않을 때, 인간은 얼마나 고독한 존재가 되는가. 그 해독 불능의 메모는 우리 모두의 운명을 미리 써놓은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우리도 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신호를 남기다, 끝내 아무도 읽어주지 못한 채 사라져갈 것이다.

(당신이 떠나기 전 4월 초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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