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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되는 마음

by 인상파


고사되는 마음


남편이 오늘따라 유난히 편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먹는 것이 없어 변을 거의 보지 않던 그가, 오후 두 시도 되기 전에 두 번이나 변을 봤다.
기력이 빠져나가면서도 몸이 끝까지 무언가를 비워내려는 마지막 의지를 발휘하는 것일까.
그것이 어쩌면 떠나기 전의 징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딸아이 학교 담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아이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려는 것을 친구들과 선생님이 간신히 붙잡아 막았다는 소식이었다.
머릿속으로 지진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조물주는 지금 내 강인함을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재보겠다는 것일까.


저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굽어 살펴달라고 애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몫만 주십시오.
이 문장은 나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는 기도가 되었다.
나약하다는 고백 속에서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간병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해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훌쩍이며 울기만 했다.
그래, 울어라, 실컷 울어라.
너라고 이 집안 분위기를 견딜 수 있겠느냐.
고통이 없겠느냐, 슬픔이 없겠느냐, 허망함이 없겠느냐, 억울함이 없겠느냐.
죽음을 알 만한 나이니 고독감이 없겠느냐.
울어도 해결되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은 조금은 씻겨 내려가겠지.


엄마도 미친 듯이 울어보고 싶구나.
하지만 이제는 눈물조차 말라간다.
살아 있다는 느낌도 없다.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통증만 남아 있다.
내가 아이를 위로해야 할 사람인데, 정작 내 마음은 아이의 울음보다 더 메말라 있다.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건, 그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 어딘가까지 동행하는 일인가 보다.
함께한 세월을 저 허공으로 흩뿌리며, 내 마음도 조금씩 고사되어 가는 것 같다.
살아 있는 동안엔 나도 모르게 그의 호흡에 맞춰 숨을 쉬고, 그의 일상에 맞춰 하루를 쌓아올렸는데, 이제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나의 심장도 조금씩 빛을 잃는다.


아이를 안아 주지도 못한 채 병실과 집을 오가며, 나는 내 몸이 두 개로 쪼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나는 남편 곁에, 다른 하나는 집에 남겨진 아이들 곁에 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갈라진 채로 나는 버티고 있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단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뿐이라는 것을.

병실의 공기는 언제나 눅눅하고 무겁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어깨가 무너져 내리고, 폐 속 깊이까지 무겁게 내려앉는다.
창밖의 햇살은 그저 병원의 벽을 반사해 차갑게 번득이고, 내 속에서는 이미 계절감이 사라져 버렸다.
날짜를 체크하고, 약을 확인하고, 검사 일정을 챙기는 일상은 어느새 기계적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기계적 일상 속에서도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그의 체온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채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마다, 내 마음의 줄도 함께 끊어진다.
그 줄을 붙잡고 싶어도 손이 닿지 않는다.
나는 병실에서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들어주며, 아이는 집에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며 울음을 토한다.
우린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슬픔을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시간을 지나면, 내 마음 속 무엇인가도 함께 죽어버릴까.
아니면 더 단단해질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나는 조금씩 고사되고 있다는 것.
나무가 겨울에 가지 끝부터 서서히 마르듯이, 나도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삶의 수분을 조금씩 내어주고 있다는 것.
그 고사되는 마음 속에서도,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 하나는 내게 남아 있다.

(당신이 떠나기 이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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