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 그 다음
늙음 그 다음
어제따라 잠을 드는 게 힘들었다.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시간을 확인하고 있는데 아들이 아랫집에 미안할 정도로 큰 발소리를 내며 안방으로 들어섰다. 아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환호성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학교 소속 어느 학회에 낸 자기소개서가 통과해 이번 주 금요일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은 것이다. 탈락한 줄 알고 있다가 밤늦게 통보를 받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안방으로 뛰어든 것이다. 봐라, 너는 하면 되잖냐 하는 말로 자랑하고 싶어하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격려했다. 기쁨을 오래 누릴 것처럼 엄마 옆에 와 눕더니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면접 준비로 프린트해 놓은 자료를 봐야 한다고서. 기다렸던 소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실행력이 부러웠다. 역시 젊구나.
나도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이 올 때까지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뭔가를 해 볼 작정이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잠자는 시간이 더 늦어질 것이고 아침 기상이 힘들어져 어머니를 센터에 보내는 게 힘들어질지 모른다. 잠자는 시간을 놓치면 일상의 균형이 깨진다는 걸 느끼는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밤샘은 생각도 못할 일이고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날은 다음날의 일상에 지장이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늙었다는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어버린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영감은 늙었지만 늙지 않은 사람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자신이 획득한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상어 떼와 싸우며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며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한다. 젊은 시절에는 죽음을 무릅쓴 노인의 행위가 참으로 무모하게 느껴졌는데 반백을 넘기고 나서 생각하니 노인의 꺾이지 않은 의지가 그를 젊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84일 동안 바다에 나가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음에도 그 다음 날 여전히 바다를 향하는 그 마음을 나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뚝이 같은 그 정신을. 나는 이미 포기한 사람 쪽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죽을지라도 자기 내면에서 지키고자 하는 존재, ‘아름답고 고결하고 아무런 두려움도 모르는 놈’ 청새치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그 정신이 그의 목숨을 살려냈고 이삼일 바다에서 떠돌다가 항구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으리라.
나이를 먹어도 조금은 대범해지고 싶은데 이렇게 누워서 잠이나 기다리며 산티아고 영감과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여전히 패배할지언정 파멸당하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이 따스한 잠자리에 몸을 누이고 마음만으로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노인의 청새치와 같은 존재가 내게는 무엇인가를 곰곰 따져보며, 그걸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울 수 있을 것인가를 가늠해 볼 뿐이다. 실행력이 없어 자꾸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들이 쌓여가는데 게으른 몸이 정신을 안주케 하고 있었다.
다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다. 거실 불빛이 문틈으로 새어들어오고 부엌에서는 전기포터의 물 끓는 소리와 냄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이는 모양이었다. 좀 지나자 후루룩 면발이 입안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는 냄새는 없어도 소리가 참 맛있게 들린다. 저 시간에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젊어서 가능할 것이다. 일어나서 아직 잠이 들지 않은 티를 내볼까. 허나 그도 귀찮아서 자리보전에 그친다.
요즘 친구들과 전화 통화 주제는 늙음이다. 추레하게 늙어가고 있음을 실토하고, 어느새 50대 중반에 들어선 우리 나이를 탓하며 또 늙어갈 일을 걱정한다. 이 나이를 바라지 않았듯, 30년이든 20년이든 10년이든 그 세월이 지났을 때 서로의 안부가 가능하다면 그때 똑같이 지금처럼 늙어간 것 외에 할 말이 없다면 정말 우리는 비참할 것이라고, 그런 말끝에 품위 있는 죽음의 방법으로 떠올리는 건 20대의 우리 가슴을 적셨던 영화 ‘델마와 루이스’ 식이다. 죽음을 달고 살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다. 그게 늙음에 들어섰다는 뜻일 것이다.(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