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우물 안 개구리

by 인상파

우물 안 개구리


아주 까마득한 옛날

지쳐버린 마음 하나가

작은 생명을 이끌고

깊은 숲속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눈을 떴을 때는 우물 안이었습니다.

‘괜찮아, 여기라면

그이의 목소리도 잊지 않을 수 있어.

우물 벽을 타고 돌아오던 그의 음성

지금도 가만히 내 귀에 젖어 들어.’

그렇게 개구리는 물 아래 침잠한 그리움 하나를

숨 쉬듯 품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물에서도 계절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맑은 날이면 우물에 얼굴을 묻고

떠나버린 친구를 그리워했고

우물 위로 단풍이 동동 떠다니면

나룻배 삼아 세월을 낚았습니다.

겨울이면 잠에 취해

눈 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이 물러나고 우물 가장자리에

별꽃, 질경이, 민들레 같은 것들이 조용히 돋아났습니다.

흙을 뚫고 솟아오른 연둣빛 숨결

햇빛을 머금은 어린 풀잎들

꽃잎의 속살 같은 기척이

물가에 내려앉았습니다.


개구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풀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결마다 아주 오래전 목소리처럼

미세한 떨림이 들려왔습니다.


‘풀들은 봄을 맞아

다시 돋아나건만…

혹시 너도

계절처럼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닐까.

돌아올지 모를 계절을

여기서 기다려야겠어.’

개구리는 지긋이 눈을 감았습니다.


나무와 풀들마저 더위로 몸살을 앓을 때

여름을 등에 업은 울음 하나가

목을 축이려고 우물 가장자리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러자 오래된 마음을 흔드는 낮은 현처럼

물가가 잔잔히 떨렸습니다.

개구리는 낯익은 울림이 반가웠지만

이내 등을 돌렸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이의 마지막 목소리가

이 우물 벽에 메아리치는 걸 느껴.

여기 남아,

내가 사랑했던 시간을 지키고 싶어.’


가을밤엔 귀뚜라미가 우물 돌 틈 사이에서

조용히 자장가를 불렀지만

노래는 얼어붙은 물에도 스며드는 듯

가슴 절절한 울음 같았습니다.


개구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습니다.

'고마워…

이제는 그이와 함께 했던 꿈을 안고

잠들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개구리는 자장가를 들으며

겨울잠에 들었습니다.


도르래는 끝내 내려오지 않았고,

비도 오지 않았으며

이끼들이 마르면서

우물은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금이 가기 시작한 우물벽에 기대어

개구리의 웅크린 몸은 앙상해져갔습니다.

자장가는 기억의 가장자리로 스며들었고,

말도 숨도 닿지 않는 죽음이

개구리를 감싸안았습니다.


봄이 다시 왔을 때

마른 우물 한가운데엔

작은 풀꽃 하나가 피어 있었습니다.

개구리는 그 아래의 긴 꿈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을 들을 때마다 개구리가 어떻게 우물에 들어갔는지, 들어간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지가 늘 궁금했습니다. 그 궁금증이 이제야 풀렸습니다. 좋아하는 백석의 <개구리네 한솥밥>을 오래 음미한 끝에 이 시를 구상했습니다.

이전 22화22. 말의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