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쪽에서 오는 운이 약하다
딸아이가 집에 왔다. 뭘 사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손에 케이크 상자가 들러있었다. 무슨 날인 것은 아니고 오랜만에 가족들과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제 집 앞에 있는 맛있다고 소문난 빵집에서 사왔다고 한다. 돈도 없는 애가 비싼 것을 사 왔구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뭘 사오면 다음부터는 사오지 말라는 둥 비싸다는 둥 같은 잔소리를 일절 하지 말고 그저 고맙다는 말만 하고 맛있게 먹어주면 최고라는 말이 생각나서.
마침 기말고사 기간이라 아들 녀석이 집에 있어서 셋이서 케이크를 먹었다. 이야기는 자연 요즘 아들 녀석이 꽂힌 포켓몬 카드로 흘렀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스타워즈 레고를 좋아하여 그것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그런데 이제는 레고는 뒷전이고 포켓몬 카드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카드가 예뻐서 탐난다는 것. 그래서 며칠을 집과 학교 근방 무인 가게에서 포켓몬 카드를 사고 있는데 그것의 비닐을 벗길 때면 나올 카드에 대한 기대감으로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카드를 사러 다니는 것이 꼭 포켓몬을 잡으러 다니는 착각을 갖게 하여 사람 기분을 좋게 한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 전 인류의 사냥 본능을 자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뭘 모은다는 것이 그렇다. 사냥하던 시절의 생존과는 엄연한 차이는 있지만 돈이라는 무기로 발품을 파는 것이 사냥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취미라는 것이 딱히 없다. 집에 있는 서가에 꽂힌 책등의 책 표지 읽는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와 달리 좋아하는 것도 많고 관심 분야도 다양하다. 나는 그걸 전적으로 어릴 때 어떤 문화환경에 놓이느냐의 차이로 본다. 어릴 때부터 잡다한 잡지와 책을 읽어왔던 아이들은 나름 자신의 색깔을 갖추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개척해 왔다. 그래서 스타워즈 레고를 모으고 피규어를 모으고 기타 다른 여러 가지 물건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것일 게다.
아들 녀석은 유튜브에서 포켓몬 카드를 잘 뽑는 영상을 봤다며 우리에게 꿀 팁을 설명했다. 그리고 자기도 유튜브에서 가르쳐준 대로 사봤는데 거의 맞기는 했다고 한다. 녀석은 더 좋은 카드를 뽑기 위해 통째로 사기도 하여 지금까지 15만원 상당의 카드값을 썼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카드는 아직 뽑지 못했다고 시험이 끝나기를 잔뜩 별렀다. 녀석이 좋은 카드라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여줬는데 정말 갖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가격도 나갔다. 카드가 작품같았다. 나와 딸은 눈이 휘둥그레져 점심을 먹고 포켓몬 카드를 파는 가게를 들러보기로 했다.
산책가는 길에 세계과자점에 들렀다. 사려는 포켓몬 카드가 몇 봉밖에 없어 주인아줌마가 새 통을 꺼내줘서 두 개를 골랐고 집 근처 문방구에서는 여러 봉지 중에 하나를 골랐다. 카드를 정말로 사들고 올 줄 몰랐던 아들 녀석은 신이 났다. 셋 다 들떠서 포켓몬 카드 봉지 앞에 모였다. 카드 비닐은 아들 녀석이 벗겼는데 나와 딸아이는 그 옆에서 좋은 카드가 나오길 간절히 바라며 두근두근 장단을 맞췄다. 카드 게임에서 히든카드를 쥐고 무엇이 들어왔는지 가슴을 졸이며 쪼는 듯한 짜릿한 맛이 있었다.
세 봉지 카드에는 아들 녀석이 좋다는 반짝이는 카드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포켓몬 세계에서 유전자 공학으로 만들어낸 특별 포켓몬인 뮤우와 그림이 예쁘고 작은 피카츄, 색이 자몽인 커다란 드래곤 리자몽이다. 아들 녀석은 지금껏 자기가 산 카드에서보다 훨씬 좋은 것이 나왔다며 몹시 고무됐다. 이제 시험공부를 잘 할 수 있겠다나 뭐라나. 나는 그 옆에서 누나 손이 신의 손이라며 앞으로 카드는 누나에게 다 사라고 하라며 딸아이를 추켜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딸아이는 가족 중 유독 뽑기나 당첨이 잘 되는 편이다.
카드가 잘 나온 것은 딸의 운일까, 아니면 내가 동남쪽으로 가지 않고 서남쪽 방향의 가게에 들렀기 때문일까. 사실 오늘의 운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방향 운운하는 운세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미리 차단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를 보내고 운세를 다시 되새겨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좋지 않다는 쪽을 피해서 카드를 샀기 때문에 좋은 카드가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운세는 자기도 모르게 맞아떨어짐을 보여준다.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