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은 대로 운이 따르지 않는다
어제 왔던 딸아이는 병원 진료를 받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딸아이와 나는 같은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는다. 저번에 나는 4주치 약을, 딸은 3주치 약을 처방받았다. 나는 아직 약이 남아서 딸만 병원을 방문했다. 딸아이가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분리불안 증세가 나타난 것은 그보다 2년 전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서 병원을 방문하여 진단을 받았지만 우울증 약에 대한 위해성 기사를 접하고는 일방적으로 약을 중단시켜버렸다. 그랬더니 아이의 불안 증세는 극도로 심해졌고 다시 병원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딸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을 복용하고 있다.
딸아이는 처음에 대학 병원을 거의 5년을 다녔다. 그곳 의사 선생님과 딸아이는 죽이 잘 맞았다. 선생님은 아이가 자신의 심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아이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병원을 그만두게 되자 우리는 병원을 옮겼다. 개인 병원 선생님은 친절하기는 했지만 딸아이와는 잘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래도 병원을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전원을 하기 위해 몇 군데 병원을 돌았지만 딸아이가 마음을 열지 않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여름에 일이 터져 자연스럽게 전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딸아이는 병원을 갔다 오면 의사 선생님이 자기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자주 드러냈다. 그날도 상담 중인데 선생님 핸드폰에서 자꾸 카톡이 울렸고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소홀히 하며 카톡을 확인하였던 모양이다. 피해의식도 많고 자존감도 낮던 때라 아이는 의사의 행동이 꼭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싶은 생각에 눈앞에 보이는 머그잔을 상담실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고 한다. 그러자 의사는 그 즉시로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아이를 지구대로 데려가려 했지만 아이는 엄마 올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병원에서 엄마를 기다리게 되었다. 병원을 가는 길에 나는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용건은 내가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되며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것이다. 경찰 이야기인즉슨 딸이 컵을 던진 것은 잘못이기는 하지만 아이가 의사의 태만과 불성실에 충분히 화가 날 만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덧붙여 아이가 병원에 대한 불만이 많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른 병원을 찾아보라고 충고했다.
약을 타러 갔다가 그런 사단이 났으니 다음날부터 아이가 복용할 약이 없어 문제였다. 우선 급한 대로 약이라도 탈 수 있는 병원을 찾아야 하는데 당일로 그런 정신과 병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대학 병원처럼 정신과 병원도 대부분 예약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초진 환자의 예약은 길게는 한 달 반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평이 좋은 집 근처 병원을 찾아갔으나 진료가 2주 후에나 가능했다. 우연히 간판을 보고 들어간 병원이었는데 진료는 이미 마감이 됐고 초진 환자는 다음날에 진료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왔다. 그렇게 해서 다니게 된 병원이 지금의 병원이다. 딸아이는 의사 선생님이 친절하고 자신의 문제를 잘 짚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줘서 좋다고 한다. 빠르게 호전돼 가는 아이를 보면서 병원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닫는다.
딸아이는 병원을 옮기고 나서 정말 몰라보게 좋아졌다. 스스로 병을 이겨보려는 딸아이의 의지, 의사 선생님의 믿을 만한 상담, 긍정적 여건 등이 윈윈한 결과일 것이다. 사실 나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일 줄 몰랐다. 단순한 분리불안으로 시작된 병이 강박증과 망상증, 우울증, 기분 장애 등 여러 병명으로 불리면서 아이를 그 긴 시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고통 속으로 밀어넣게 될 줄을. 하지만 오늘 증세가 호전돼 약이 줄었다는 말을 듣고 딸에게 갖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 가셨다. 마음먹은 대로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했지만, 마음먹지도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난 하루다.(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