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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기웃거리다 52

머물러 달라, 그러나

by 인상파

머물러 달라, 그러나


꽃은 바람의 힘으로 봉오리를 열고

햇살에 몸을 맡기며 웃음을 짓다가

스스로 빛을 거둬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 또한 꽃과 다르지 않으니

피어나는 순간이 짧아도

웃음과 눈물로 세상을 건너고

빛을 거둔 뒤에도 흙 속에서

다시 태어날 씨앗을 품는다.


피고 지는 일은 모든 존재의 운명

떨어져야 할 때 붙들고 있으면

겹겹의 꽃잎이 시간의 열기에 썩어가듯

사랑 또한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머물러 달라, 매달릴수록

청초한 빛은 눅눅해지고

그리움은 향기가 아니라 상처가 된다.


꽃이 지는 것은 다시 시작하려는 뜻

사람 또한 머물 자릴 기꺼이 내주고

저녁 하늘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떠남조차 노을빛으로 물들어야 하리.


때로는 오래된 관계를 정리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 내가 누군가를 정리하듯 누군가는 나를 정리할 것이다. 아프지 않다 말할 수 없고, 섭섭하지 않다 말할 수도 없다. 스스로를 설득한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정리가 필요하다고.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꼭 그래야 하느냐 되묻는다. 정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스러져가는 인연일지라도, 내 마음이 서둘렀다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정리해야 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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