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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1

나비를 잡는 아버지와 소달구지를 끄는 아버지

by 인상파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창비)


나비를 잡는 아버지와 소달구지를 끄는 아버지


현덕의 단편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한 시골 소년의 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빈부 격차와 부모 세대의 고단한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바우는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농촌에 남아 농사를 도우며 그림 그리기에서 위안을 삼는다. 반면 친구 경환이는 마름인 아버지를 둔 덕에 집이 부유하여 서울로 진학한다. 같은 마을에서 자란 두 아이는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여름 방학, 경환이는 학교 과제인 곤충표본을 위해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나비를 잡으러 다닌다. 소 꼴을 먹이던 바우 앞에 호랑나비가 날아들자, 바우는 일부러 잡은 나비를 경환이 앞에서 날려 보내며 심술을 부린다. 경환이가 얄밉기도 했지만,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자신에게 나비가 사라진다면 큰 피해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화가 난 경환이는 바우네 참외밭을 휘젓고 다니며 넝쿨과 참외를 망가뜨린다. 이 참외밭은 경환이네 땅을 빌려 농사짓는 곳이었기에, 아이들의 갈등은 곧 어른들의 문제로 비화한다.


잘못은 경환이에게 있었으나, 소작농 신세인 바우네 가족은 부잣집에 따질 수 없다. 오히려 경환이 부모는 바우 아버지를 불러다 바우가 나비를 잡아 와 자기 아들에게 사과하라 으름장을 놓는다. 땅을 잃지 않으려면 따를 수밖에 없는 약자의 처지였다. 억울한 상황 앞에서 바우는 끝내 고집을 부리며 부모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림장을 찢어버리며 나비를 잡아 오라 채근했을 때도, 바우는 자존심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바우의 마음을 바꾼 것은 아버지였다. 집을 나가 고학이라도 하겠다며 가출을 시도한 그날 새벽, 산 아래 메밀밭에서 아버지가 나비를 잡기 위해 허덕이며 지척거리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바우는 지금껏 품어온 억울함과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그 아버지가 무척 불쌍하고 정답고, 그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떤 어려운 일도 못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을 품는다. ‘나비를 잡는 아버’라는 제목은 바로 그 장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내 마음도 뭉클해졌다. 내 아버지 역시 바우의 아버지처럼 소작농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1970~90년대까지 남의 논밭을 부치며 추수가 끝나면 벼와 보리로 소작료를 치르곤 하셨다.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소작할 땅이 많아지고 간혹 농지가 매물로 나와 그걸 사기도 하셨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시려고 고생이 돼도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며 자작농이 되셨다. 하지만 우리 전답은 평지가 아니라 굽이굽이 산 밑자락이라 농사를 짓을 때 힘이 배가 들었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의 추석 밤이 또렷하다. 마을은 한가위 분위기로 들썩였지만 아버지는 저녁밥을 드실 때까지 볏단을 소달구지에 실어 나르셨다. 그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가로등도 없는 길, 아버지는 막내딸이 다리 아플까 봐 볏단 위에 앉혀 주셨다. 나는 하늘 가득한 보름달을 바라보다가, 고삐를 들고 “이랴이랴” 하며 지척거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 뒷모습이 왜 그리 서러웠던지 지금도 마음속에 선명하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의 바우 아버지와 내 기억 속 소달구지를 끄는 아버지는 서로 닮아있다. 가난과 무거운 짐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때로는 부당한 지시도 거부하지 못한다. 자식은 그 뒤를 따라가며 아버지의 등을 바라본다. 소설 속 한 장면과 나의 기억은 한 세대를 넘어 별 볼 일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들의 자화상으로 겹쳐진다.


이 작품은 아이들의 갈등을 넘어, 시대적 현실과 부모 세대의 고단한 삶,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자식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와 ‘소달구지를 끄는 아버지’는 모두 우리 곁에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세월 속으로 저물어버린 아버지들의 초상이다. 그 초상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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