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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62

〈종생기〉의 문 앞에서 나는,

by 인상파

이상의 <종생기>(문학과지성사)


〈종생기〉의 문 앞에서 나는,


〈종생기〉의 문 앞에서 나는, 오래 닫혀 있던 문의 문고리를 조심스레 잡아당기듯 그의 문장을 한 줄씩 더듬어 읽는다. 열릴 듯 말 듯 흔들리는 문턱 너머로 임종을 앞둔 젊은이의 절망과 비애, 그리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었던 언어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받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상의 〈종생기〉는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나는 마치 이 작품을 이해하지 않고는 죽는 것이 억울하기라도 한 심정으로, 그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무진 애를 써왔다.


아무리 실험적이고 무의식의 흐름이 이야기를 이끈다 해도, 작품에는 분명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의도가 있는 만큼 글쓰기는 결국 의식에 기반한 정신노동이다. 그러니 아무리 난해하고 난삽하며, 읽는 내내 머리 위를 지진이 훑고 지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해도, 그 수고만큼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나는 끝내 〈종생기〉를 붙들고 읽어 나갔다.


무슨 심보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이었다면 진작 덮고도 남았을 텐데, 이 작품은 나를 밀어낼수록 오히려 더 깊이 끌어당겼다.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입구를 막아선 장애물을 치워야만 할 것 같은 묘한 매혹이 생겼다. 거부당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이야기의 뼈대는 이렇다.

흥천사에서 임종에 가까운 화자는,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불후의 명작이라도 남길 작정이었다. 그것이 유언이 되었든, 묘비명이 되었든, 결국 그가 쓰는 글은 지금 그 순간 자신의 생을 기록하는, 또는 삶을 마감하는 ‘종생기’라는 것이다.

〈봉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화자인 이상은 또 한 명의 여인을 부른다. 그녀는 정희다. 정희는 기생으로 여러 남자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이상에게는 “당신만의 여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소녀다. 그녀는 3월 3일 오후 2시에 동소문 버스 정류장에서 이상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왔다. 생의 끝자락에 선 이상은, 이 소녀 정희를 통해 죽음의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이발소를 들르고, 세탁소에서 말끔히 다려진 모자를 찾아 쓰고, 단장까지 하고 정희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는 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흥천사로 돌아와 술을 마시며 주란을 벌인다.

그러던 중 그는 정희의 스커트 속에서 떨어진 한 통의 속달 편지를 발견한다. 다섯 달 전에 절연했다고 말했던 남자, S가 보낸 것이었다. S는 정희에게 같은 날, 3월 3일 오후 8시에 금화장 주택지에서 만나자고 적어 보냈다. 이상은 정희에게 속고 또 속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만났고 병든 약한 몸에 들어간 술기운과 정신적 충격으로 혼절하고 만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8시는 훌쩍 지나 있었고, 정희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정희는 그리갔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


혼절하고, 깨어나 보니 정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 장면은, 사랑의 실패보다 더 깊은 상실을 상징한다. “정희는 그리갔다”는 말은 그녀가 단지 자리를 뜬 것이 아니라, 이상의 생과 무관한 어떤 세계로 되돌아갔다는 선언이다. 그녀는 앞으로도 누군가와 동침할 것이고, 사랑할 것이고, 살아갈 것이다. 오직 이상만이 죽음의 문 앞에서 멈춰 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고 쓴 것이다. 여기서 ‘종생’은 그의 생이 이미 끝났다는 말이며, ‘종생기’는 그 끝남 이후에도 계속되는 질투, 분노, 허망함, 생의 불평등에 대한 마지막 발광이다. 자신의 시간이 멈춘 뒤에도 정희의 육체적 생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를 미칠 듯이 자극한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재앙”이라 부르며 이를 갈고, 부글부글 끓고, 까무러진다. 이 고통은 죽기 직전의 육체를 넘어선, 존재적 모멸감의 마지막 폭발이다.


그리고 종생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밀려 나온다.


“만 26세와 3개월을 맞이하는 이상 선생님이여! 허수아비여!

자네는 노옹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일세. 아니, 아니.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일세. 이상(以上).”


여기서 ‘허수아비’는 살아 있으나 이미 비어 있는 몸, 생의 기운도 욕망도 빠져나간 껍데기, 움직이지만 더 이상 누구에게도 선택될 수 없는 존재의 자화상이다. 그가 바라보는 “먼 조상”은 살아 있는 이상이 아니라, 이미 죽음 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자 같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앞둔 자의 한숨이 아니라 살아남을 자의 생을 바라보는 마지막 비명을 적으며 자기 서사를 닫는다.


정희는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이상은 거기서 멈춘다. 그래서 그의 종생은 끝났지만, 그가 남긴 종생기는 끝내 닫히지 않는다. 정희는 그에게 젊음의 환영이었고, 마지막으로 붙잡아보고자 했던 생이었지만, 그의 곁에 머물러주지 않는다. 그의 스물세 살을 열어젖힌 〈봉별기〉의 금홍이 그랬듯, 정희 역시 그를 떠나가며 이상 자신이 더 이상 누구의 삶과도 무관한 존재임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그의 종생은 끝났으되, 그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 것은 왜인가? 육체의 ‘종생’은 끝났으나 ‘종생기’는 그 끝남을 기록하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그 소멸을 기록하려는 ‘쓰기’는 끝내 멈출 수 없다는 역설.


그럼 이런 이야기가 왜 그리 입문이 어려웠을까. 그것은 “극유산호(郤遺珊瑚)-요 다섯 자 동안에 나는 두 자 이상의 오자를 범했는가 싶다.”라는 문장부터 이후 곳곳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한자어와 관념어의 파편들, 작가와 작품을 거론하고 상상과 현실, 환상과 꿈의 뒤섞임, 허세와 자기비하,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에피소드들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마치 임종에 가까운 사람이 혼수 상태에서 의식의 조각들을 뒤섞어 내뱉는 말처럼 들린다. 문장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무엇을 향해 가는지, 어떤 기준으로 끊어 읽어야 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 혼란의 중심에는 ‘죽음’이라는 압력이 있다. 그 압력은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작품 전체를 틀어쥐는 힘이 된다. 강박에 가까운 죽음의 언어들-‘망해’, ‘임종’, ‘유서’, ‘암장’, ‘낙명’, ‘분묘’, ‘물고’, ‘명목’ ‘해골’ 등이 연달아 등장하며, 독자는 마치 한 인간의 의식이 붕괴하는 소리를 현장에서 듣는 듯한 경험을 겪는다. 언어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무덤을 파듯 기록되고, 문장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점점 죽음 쪽으로 기울어가는 의식의 기호처럼 읽힌다.


작품과 작가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산호(珊瑚)와 독화(毒花)는 또 어떤가. 산호는 바다 밑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생명체이자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존재고, 독화는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은 꽃이다. 한쪽은 생명의 느린 성장과 시간을 상징하고, 다른 한쪽은 매혹과 파멸을 동시에 상징한다. 이상은 이 두 이미지를 교차시키며,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생과 죽음, 아름다움과 파멸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그의 종생(終生)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산호처럼 단단히 굳어가면서도 독화처럼 번지는 독한 감정의 혼합물이다.


결국 〈종생기〉의 세계에서 산호와 독화는 죽음의 언어 사이에 끼어 있는 이상 특유의 상징적 잔향이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는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독’을 동시에 호명한다. 그것이 이 작품이 품은 난해함의 본질이며, 동시에 마지막까지 겉으로는 화려하거나 기이하게 보이지만, 실은 이상 자신의 언어가 붕괴되는 현장의 마지막 흔적이다.


톨스토이와 이태백, 도스토예프스키와 고리키, 화가 코로, 모파상의 「비계덩어리」, 그리고 「사십년」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햄릿에 이르는 작가와 작품들의 현란한 행렬은 지적 허세와 천재의 고집을 번개처럼 번뜩이며 독자를 눈부시게 하고, 때로는 어지럽게 한다. 그러나 그 허세의 이면에는 죽음을 앞둔 젊은이의 치기와 비애, 삶을 마감하려는 자의 고독과 서러움, 말하지 못한 두려움이 고구마 줄기처럼 어둠 속에서 길게 붙어 따라온다.


먼저 떠난 이가 뒤에 오는 이에게 가냘픈 길 하나를 내어놓듯, 〈종생기〉는 나 같은 후세의 독자가 그의 그림자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문장 속에 큰 족적을 남겨놓고 있다. 내게 〈종생기〉는 첫 문장 “극유산호(郤遺珊瑚)-요 다섯 자 동안에 나는 두 자 이상의 오자를 범했는가 싶다.”에서부터 이미 발을 동동거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나는 아직도 그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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