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시간만큼 슬픔을 보여주는 시
정지용의 「유리창 1」
살아온 시간만큼 슬픔을 보여주는 시
정지용의 「유리창 1」은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그린 작품이다.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어, 젊은 시절에는 오히려 이 시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감정적인 사람으로서 슬픔이 직접 터져 나오지 않는 이 시가 다소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겪고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이 시를 읽으니,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떠나버린 자식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든 그 자식을 불러보고자 한밤중에 홀로 유리창에 달라붙어 입김을 흐리는 화자의 모습이 더는 시적 장치로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그리면서, 이 시의 제목은 왜 하필 ‘유리창’일까. 유리창은 화자와 죽은 자식을 가르는 경계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숨을 불어넣는 마지막 매개물이다. 그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차고 슬픈 것은 화자의 감정이자, 죽은 어린 자식의 영혼처럼 느껴진다. 이 감정은 화자의 내면에서 직접 울리지 않고, 유리창 위에 맺혀 어른거린다. 그것은 말이 되지 못한 화자의 슬픔이자, 이미 육체를 잃고 이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존재의 기척이다. 그래서 차고 슬픈 것은 화자의 심리 상태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식의 형상이다. 감정이자 대상인 것이다.
이렇게 겹쳐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시에서 화자와 죽은 아이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식의 죽음 이후에도 화자의 감정은 독립된 ‘나의 마음’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떠난 아이의 존재와 한 덩어리로 남아 있다. 그 결과 슬픔은 감정이라기보다 차가운 현존처럼 느껴지고, 유리창 위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유리창에 입김을 흐리는 행위는 단순히 유리를 닦는 동작이 아니다.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생의 본능처럼 보인다. 입김은 숨결의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음의 가장 원초적인 증거다. 차고 슬픈 것에 입김을 불어넣는 행위는 마치 숨을 불어넣으면 저쪽에서 생명이 다시 반응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의 몸짓이다.
그러나 유리는 끝내 열리지 않고, 입김은 잠시 흐려졌다가 곧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희망의 몸짓이 아니라 이미 실패할 것을 알고 있는 시도이기에, 화자는 ‘열 없이 붙어서’ 있을 수밖에 없다. 죽은 자식을 살려보려는 이 슬픈 장면은, 자식을 떠나보내고도 여전히 살아 있는 몸이 감당해야 하는 상실의 고통이다.
‘길들인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는 장면은, 불어넣은 입김이 잠시 죽은 아이의 환영으로 나타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화자는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자꾸 유리를 지우고 다시 본다. 흐려진 것을 닦아내고, 사라진 것을 다시 불러내려는 이 반복은 환영을 붙잡으려는 몸의 반사적 동작이다. 보았다고 생각하면 사라지고, 지웠다고 생각하면 다시 어른거리는 그 모습 앞에서, 화자는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그 끝에 나타나는 것은 ‘물먹은 별’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화자의 눈물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버린 아이의 영혼이다. 반짝이지만 젖어 있고, 박혀 있으되 움직이지 않는 별.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소멸한 것도 아닌 애매한 존재다. 살아 있는 자의 시선 속에서만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는, 상실 이후에만 나타나는 형상이다.
이 모든 장면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으로 수렴된다. 유리창을 통해 죽은 자식의 환영이나마 만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일이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견디기 위해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행위. 유리는 장벽이자 통로다. 생과 사를 가르는 차가운 막이지만, 화자가 떠난 아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창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는 시적 장치로 읽히기보다,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품었을 법한 몸의 충동처럼 다가온다.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면 혹시나 죽은 생명이 다시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이성으로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유리창에 입김을 흐리는 그 행위는 자식을 살려보려는 마지막 시도이자,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매번 다시 확인하는 애도의 반복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애절하고 처절하게 다가온다.
젊은 아버지는 울부짖지도, 체념하지도 못한 채, 다만 한밤중에 홀로 유리창을 닦고 흐리고 다시 닦는 동작으로 상실을 견뎌낸다. 이 시는 슬픔을 감정의 폭발로 그리는 대신 유리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세계를 세워, 자식을 앞세운 이후의 젊은 아버지의 고독과 고통을 보여준다. 이 시는 읽을수록 슬픔이 묻어나는 시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에 비례해 비로소 이해되는 슬픔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