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상파 Jan 24. 2024

간병일기 11

망각의 늪

오늘 아침 남편의 몸 상태는 양호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이완제와 항간질제를 복용하고 나서도 식탁에서 곧장 일어나지 않고 커피마시는 내 곁을 한참 지킨다. 커피맛이 궁금하다는 듯 어린아이처럼 내게 마시던 커피를 달라더니 몇 모금 홀짝이기까지 한다. 맛있으면 다 마시라고 했더니 내가 마셔야한다고 사양한다. 그리고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우린 둘 다 서로 말뚱말뚱 얼굴을 쳐다보다가 실없이 웃고 말았다. 


우리는 함께 있어도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처럼 여겨진다. 나는 알고 있지만 남편은 모르고 있는 그 무엇이 우리의 대화를 차단하고 대화 불능상태로 만들어 놓는 것 같다. 남편을 속이고 있는 듯한 찝찝함이 남는다. 그에게 미안하다. 우리 관계는 균형을 잃고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버린 것 같다. 모처럼 편안한 얼굴의 남편을 보고도 나의 머리속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우리에게 시간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예정된 시간을 알고 있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정해진 끝을 정확히 몰라도 끝이 가까워옴은 이미 알고 있다. 누구나에게나 끝은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안과 두려움에 포박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왜인가. 어쩌면 끝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시작되는 죽음을 향해 내딛는 우리의 육신이니. 남편의 끝에만 집착하고 있지만 내 목숨에도 엄연히 끝은 존재하는 것이고 다만 그 끝나는 시점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 뿐이다. 뭇 생명이란 무생에서 와서 무생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점심때쯤 남편 대학동창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남편은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하며 나갔다 들어왔다. 그런데 남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점심을 차리라고 한다. 점심 맛있게 먹었냐고 묻기도 전에 밥 타령을 했다. 나와 친구분들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배 부르지 않냐고 묻는 내 말에 배가 고프니 어서 밥을 차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남편의 뇌는 포만과 허기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식탐이 많아져 어쩔 때는 너무 많이 먹어 걱정이 될 때가 있을 정도다. 친구분들이 방금 식당에서 먹지 않았냐고 묻자 남편은 먹은 적 없다며, 왜 자기만 빼놓고 식당엘 갔냐고 따지듯 물었다. 남편의 뇌리에서 그분들과 함께 한 식사 시간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분들은 남편이 피곤한 모양이라며 쉬게 해야한다며 끓이고 있는 커피를 마다하며 일어섰다. 남편은 친구분들을 배웅하며 현관문을 닫고 돌아와서는 누가 갔냐고 내게 물어왔다. 아침에는 상태가 양호하더니 점심 시간이 지나자 남편의 기억력은 현저하게 떨어져갔다. 남편의 뇌가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다.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식탁에 홀로 남았다. 무심하게 떠도는 집안의 정적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인 것일까. 왜 마음이 이토록 심란한 것일까. 자연의 이치에서 보자면 인간의 목숨 그리 대단할 게 못 된다. 초를 다투며 사라져가는 자연의 숱한 목숨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인간은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뇌하면서 의미의 의미를 묻는 부질없는 행위를 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할 뿐이다. 죽음이란 기억하는 자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다음에야 일어나는 것이다. 기억하는 한 죽지 않을 터이니 그가 기억을 잃어감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라도 그를 기억하는 내가 있으니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물리적인 죽음이라는 현상을 주관으로 감춰보려는 억지스러움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라도 받아들여야 견딜 수 있으니 말이다.(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작가의 이전글 책제목으로 시쓰기 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