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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5화

by 이봄



4월 16일 오전 7시. 날씨가 매우 우중충했다. 정말 구렸다. 날씨 때문에 더 그랬나? 그날 우리는 차 안에서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민낯에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뽈뽈뽈 서울 메이크업샵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던 메이크업샵. 연예인들만 올 것 같은 으리으리한 샵에 딱 봐도 앳된 20대 중반 예비부부가 오늘 결혼한다고 화장을 받으러 왔더랬다.



준비시간이 긴 신부 먼저 메이크업을 받았다. 얼굴에 녹차티백도 얹어서 부기를 가라앉히고 기초화장부터 차곡차곡 쌓아주셨다. 두세 명의 기술자가 붙으니 머리길이 거지존인 데다가 교정까지 한(결혼식 당일 윗니 교정기만 잠시 뺐다.) 안산 촌년도 언제 촌년이었냐는 듯 그럴싸한 신부로 변신했다.


깔끔한 5:5 가르마에 긴 머리를 붙여 예쁘게 올려 묶고 화장인지 분장인지 모를 내일까지도 멀쩡할 것 같은 두툼한 화장까지.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고 아마 그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남자친구는 날 못 알아봤을 수도 있다. 샵 일정이 마무리되는 시간에 딱 맞춰 이모님이 드레스샵에서 본식 드레스를 픽업해 오셨고 내 몸을 이리저리 구겨가며 열심히 입혀주셨다.


신부들 준비 시간이 3시간이라면 신랑들 준비 시간은 30분 밖에 안 돼서 대부분의 신랑들은 안쪽 벤치에 앉아서 졸고 있거나 폰게임을 하면서 기다렸고 신부가 드레스까지 다 입고 나서야 그때 같이 이 분주한 메이크업샵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남자친구 친누나께서 빌려 주신 파란색 모닝에 이모님까지 셋이 같이 타고 다시 안산으로 향했다.





추적추적 비가 왔다. 검은 턱시도 멋지게 쫙 빼입은 채로 운전하고 있는 남자친구와 조수석에는 이모님, 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뒷좌석에 앉아있노라니 그제야 결혼식날이라는 게 조금 실감이 났다. 펑퍼짐한 벨라인 드레스 부피에 비해 모닝 뒷좌석은 아담해서 내가 내 의지로 앉아있는 건지 드레스에 내가 박혀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비 내리는 창 밖과 온갖 짐들로, 커다란 부케박스로 복닥한 이 차 안의 풍경이 참 낯설고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셀카를 찍었다.



오후 3시쯤 안산 도착. 남자친구와 이모님과 함께 AW컨벤션 6층 신부대기실로 올라갔다. 조용한 신부대기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으면 이때부터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도 안 오는 거 아니야?’


다행히 엄마랑 동생은 왔다. 그 뒤로 남자친구 부모님과 언니, 양가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 동료들, 교회 사람들…. 한산했던 6층 웨딩홀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바글바글 해졌고 나는 대기실에 앉아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고 사진 찍다 보니 어느새 본식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신부대기실 끝 쪽 본식 홀과 연결된 문 앞에 서서 신부 입장 순서를 기다린다. 이모님이 알려주신 대로 한 손은 드레스랑 부케를 꼭 잡고 서있었다. 혹여나 놓칠세라 힘줘서 꽉 붙잡고 있으니 더 긴장돼서 양손엔 땀이 줄줄 났고 너무 떨려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문 너머로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정신없었다. 계단 잘못 밟고 넘어지면 어떡하지? 나가자마자 울면 어떡하지? 드레스 안 벗겨지나? 별의별 생각들이 스쳐가는 그 시간 양가 엄마들의 화촉점화가 끝났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열리자마자 눈부신 조명과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그 사이로 제일 먼저 남자친구가 보였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어두운데 밝은 조명만 군데군데 터지고 한 사람만 딱 보이는 그런 광경이 펼쳐졌다.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뻗고 있는 남자친구의 오른손 위에 내 왼손을 얹어 꼭 맞잡고 함께 버진로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갔다. 그 순간부터는 벅찬 마음과 동시에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된다. 하객으로 결혼식을 볼 땐 몰랐던 주인공의 심정은 이러했구나.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현실은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머리에 쓴 베일이랑 드레스가 너무 무거워서 내 몸이 이것들을 끌고 가는 느낌이었고 거기다가 생전 신어 본 적 없는 높은 통굽 구두를 신고 걸으려니 너무 불편해서 온 신경이 거기로 쏠려있었다. 또 드레스를 뻥뻥 힘차게 차면서 걸어 나가야 된다는 이모님의 신신당부에 물 밖에선 꼿꼿하고 늘 우아해 보이지만 물속에선 발길질하느라 모양새 빠지는 새하얀 백조처럼 드레스 속 내 다리도 열심히 걷어 차랴 표정관리하랴 게다가 입장 속도가 너무 빨라도 너무 느려도 안 된대서 그거 신경 쓰랴 하객분들께 고갯짓 하며 인사하랴 어후. 그 짧은 버진로드가 엄청 길게 느껴졌었다.




아 됐고 내가 결혼이라니. 지금 결혼식이라니! 똘똘 둘러싼 긴장 속에서도 목사님의 주례 말씀은 나중에도 꼭 기억하고 싶어서 열심히 집중해서 들었다. 그 후 지인들의 축가와 우리 결혼식에 와주신 하객 분들께 인사를 드렸다. 주례 자리를 등지고 서서 처음으로 모든 하객분들을 마주하며 감사 인사를 드리는 시간.


양가 가족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알바하며 만난 사람들 그리고 교회 사람들까지. 자리가 부족해 입구 쪽까지 가득 메워진 이 풍경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사함이 솟구쳤다. 찬찬히 둘러보다 알 수 없는 몽글몽글함에 눈물이 맺혔다. 우리가 뭐라고. 황금 같은 토요일 이 귀한 주말에 우리 두 사람의 결혼식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셨던 모든 분들,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상태에서 바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순서가 왔다. 아. 망했다. 안 울려고 했는데. 이미 무장해제된 채로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는 그 와중에도 오늘 아침부터 부지런히 받은 비싼 화장과 이따 찍을 사진 생각에 이 악물고 버텼다. 다행히 왈칵 쏟아지진 않았지만 엄만 왜 나 따라 우는 건데. 그래놓고 바로 남자친구 안을 땐 활짝 웃고 왜 그래 엄마.



남자친구 부모님께도 총총총 걸어가 인사를 드렸다. 낯설고 꿈꾸는듯한 이 순간이 참 뭐랄까. 마냥 신기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느긋하고 따듯한 바이올린 연주가 흐르는 그 예식장 속에 두 가족이 만나 한 가족이 됨을 약속하는 시간. 나를 꼭 안아주시며 했던 어머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




모든 예식 순서를 마치고 신랑 신부의 앞날이 늘 행복하길,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하객들의 환호와 힘찬 박수 속에서 우리는 또 같은 걸음으로 행진을 했다.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 벅찬 마음과 설렘과 감사가 교차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던 결혼식이 드디어 끝이 났다. 가족들과 지인들과 사진까지 찍고 나면 진짜 진짜_최종_끝.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식 전날 까지도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부케 받을 친구. 부케순이를 누구로 할지 끝끝내 정하질 못해서 그냥 막 던져서 받은 사람 시집가라고 하자. 운명이 이끄는 대로. 해서 정말 그냥 막 던졌다.


서로 받으려고 이리저리 뻗어있는 손들 사이로 마치 제 주인 찾아간 것처럼 부케가 딱 잡혔고 주인은 다름 아닌 팀활동을 같이 했던 교회 친구였다. 신기하게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서로의 흑역사까지도 다 알고 있는, 정말 얘는 누가 데려가려나 싶었던 내 친구가 받게 됐다. 그리고 그 친구는 다행히(?) 시집 잘 가서 예쁜 딸 낳고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오늘 하루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웨딩드레스를 시원하게 벗어던지고 한복으로 갈아입고 식사 중인 하객분들께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날 우리 예식을 총괄해 주셨던 직원분이 인사 좀 그만하시고 식사하셔라 할 정도로 정말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놀랍게도 우리는 오전 메이크업받을 때 먹었던 김밥 한 줄이 전부였고 정신이 없어서 하루종일 배를 졸졸 곯은 줄도 몰랐었다. 양가 부모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우리도 혼주석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배를 대충 채우고 한복도 갈아입고 그제야 한산해진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그날은 하루종일 흐릿했다. 이런 날 결혼하면 잘 산다던데.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급하게 필요했던 생필품 하나 사러 마트 들렀다가 우리 집으로 갔다. 끝났다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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