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20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리저리 얼마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르겠다. 남편과의 관계가 조금은 회복이 된 것 같다 싶을 때는 모두를 미워했던 내 마음들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러다 또 싸우고 틀어지면 역시 그렇다며, 다 됐다고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고 싶었다.
카페까지 정리가 되자 가족회사에 대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 이후 아버님의 가족사업 PPT는 더 볼 일이 없었고 나는 더 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남편도 중간에서 골머리 썩힐 일은 더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인 내가, 그런 남편의 아빠에게 그리고 시댁에게 너무 안 좋은 마음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아 가끔은 남편의 뒷모습만 봐도 미안해지고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며느리로서 나는 이 정도도 안 되는구나 하는 자책 속에 빠져있다가도 또 며느리라고 다 맞춰야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극과 극의 마음들이 불쑥 들기도 했다. 마치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시댁 모두에게 착한 며느리이고 싶었고 나로 인해 어떠한 불편함은 조금도 주고 싶지 않은, 무조건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 속앓이를 하게 만들었다. 천국과 지옥을, 냉탕과 온탕을 혼자서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살아왔고 마침내 그 양극성이 점차 좁혀질 때쯤 나도 여유를 아주 조금씩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동안, 아주 나중에서야 조금씩 생각해 보건대 내 남편의 아버지, 곧 나의 아버님은 남편과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댁, 며느리 이런 불편한 이름표들 떼버리고 그냥 한 가족처럼 편해지길 늘 원하셨다. 딸 같은 며느리, 아빠 같은 시아버지를 자주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런 마음이었어서 그랬는지, 나와는 항상 속도가 안 맞았고 편하게 대하고 싶으신 마음에 말이나 행동까지도 아버님 본래 성격대로 나오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께서 다가올 때마다 매번 너무 일방적이고 성급한 것 같다 느꼈을 뿐만 아니라 대화까지도 모든 게 다 그저 불편하기만 했다. 아버님 속도만 생각하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버님의 모든 말들이 듣기가 싫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리가 없는 아버님은 이제 우린 한 가족이니까 어떻게든 빨리 하나로 뭉쳤으면 하는 마음에 아버님도 모든 게 서투르게 표현이 됐던 것 같다.
같은 말이 오래도록 구전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 아빠 같은 시아버지, 엄마 같은 시어머니는 있을 수 없다는 것. 만에 하나 그런 집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쪽의 합이 드라마틱하게 맞아떨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그리고 서로가 그런 집을 만나고 서로가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끼리 만난다는 것 또한 그야말로 정말 드라마틱한 일이다.
사람의 말은 곧 생각이고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결국 그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난 아버님께서 나를 아쉬워한 게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나를 볼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마음에 있는 것들이 말로 나온 것이다.
상견례 전 남편이 남자친구일 때, 어머님 아버님을 처음 뵀던 한정식집에서 두 분이 입을 모아 하셨던 말씀이 있다. 왠지 말 많고 서글서글한 며느리가 될 것 같다며, 우리 집안 분위기를 좀 밝게 만들어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랬다. 예로부터 사위는 친정에 백년손님이고 며느리는 시댁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심 어머님도 아버님도 내가 그런 며느리가 되길 바라셨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 마음에 쏙 들 수가 있을까.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버님의 비교와 막말에 일부러 입을 닫아버렸고 '함께, 같이'에 동참하지 않는 내 모습에서 며느리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니 100% 표현은 못 하겠지만, 영 마음에 안 드셨을 거다. 그래서 나를 볼 때마다 아쉽다는 듯한 말들이 아버님도 모르게 툭툭 나왔던 거겠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원래 사람에게 기대하면 실망이 큰 것이고 그건 나 역시도 같은 마음이다.
아버님과 비슷하게 어쩌면 나도 아버님께 기대하는 게 많았던 걸 수도 있다. 왜 비교를 하실까. 왜 나를 아쉬워하실까. 왜 말씀을 저렇게 밖에 못 하실까. 말투가 왜 저러실까. 매번 볼 때마다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튕겨 내려고만 했던 나도 아버님과 비슷하게 아버님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고, 아버님을 기대했고,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한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속에서 충돌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님 덕에 면역이 길러진 것도 있다. 어릴 때 가족 안에서도 그랬고 이런저런 알바를 많이 하면서 만났던 동료들이나 손님들 등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겪으면서 참 별 인간 다 있네. 했지만, 결혼 후 만난 아버님은 나에게 또 다른 자극을 준 새로운 케이스의 사람이었다. 면전에 대고 스스럼없이 별말씀을 다 하시는 아버님이 초반엔 면역이 없던 난 매우 당황스럽기만 했다. 왜 하필 남편의 아빠가 나한테 저러시는 건지. 화만 났고 억울했고 별의별 감정들이 롤러코스터를 탔지만 이젠 처음만큼의 당황스러움은 없다. 저런 말은 기분이 이렇게 나쁠 수 있겠구나. 나는 안 해야지. 오히려 배우게 된다. 남편도 나랑 비슷하게 처음엔 그런 아버님께 분노뿐이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초연한 걸 보니 흘려버리는 훈련이 잘 된 것 같다. 그래. 나도 그러련다. 그냥 흘려버리련다. 어떻게 만나는 사람마다 쿵짝이 다 맞을까. 그럴 수는 없다.
집 안에 남자 어른을 편하게 대해본 적이 없으니 아버님의 처음부터 모든 게 낯설었고 이럴 때 이런 말은 어떻게 어떤 식으로 건네야 할지, 그런 사소한 것조차도 나는 깊이 고민했고 어려웠다. 근데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도 마음을 좀 내려놓으면 좋겠는데 항상 마음 따로 행동 따로인 듯하다.
신혼 초부터 현재까지 여태껏 겪어왔던 모든 일들을 아예 없었던 것처럼, 이 갈등들과 감정들을 아예 겪지 않았던 사람처럼 돌아가기엔 아마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최대한 덜어내려 하지만 내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나보다. 남편도 나도 아직은 시댁모임만 하면 썩 편하지 않을뿐더러 아버님이 하시는 모든 말들에 마음이 조금도 동하지 않는 걸 보면 그렇다.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것 같다.
25살에 결혼 후, 흔히 신혼을 즐긴다는 때에 우린 이런 문제들로 몇 년 동안의 신혼 생활을 싸움과 갈등으로 보냈다. 마음이 멀어지니 몸도 멀어져 부부생활까지 소원해졌었다. 2세에 대한 생각이 싹 사라진 제일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때까지도 무너진 부부생활은 여전히 회복중이며 정신 상태도 썩 온전치 않다. 이따금씩 기분이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고 퍽 우울해진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는데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스트레스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이 지옥에서 제대로 빠져 나오려면 그 스트레스를 멀리 하는게 좋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가보다. 어떤 물리적인 변화도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안산을 아예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갈등과 스트레스로 보낸 10년과 나에게 남은 트라우마. 그 시간들을 보상받고 싶다. 근데 잘 모르겠다. 어디서, 어떻게 제대로 보상받아야 할지. 정신과를 진짜 가봐야 하는 건지 요즘 다시 고민 중이다.
사람은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들을 더 오래 가지고 간다는 게 좀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한다면, 노력할 의지가 있다면 지난날들이 지금보다 점점 더 희미해져 아주 나중엔 ‘참 별일이었네’ 하며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언제 완전히 회복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런 날이 올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