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6화
홧김에 내뱉어 버렸다. 사랑과 전쟁에만 나오는 줄 알았던 이 외침이 내 입에서 나오다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표현이 소박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많이 넘쳐흘렀고 감당이 안 될 만큼 꼬일 대로 꼬인 듯한 이 상황들을 나는 그냥 이혼이라는 걸로 강제 종료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둘의 결혼 생활엔 낄 자리가 조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혼이라는 단어를 처음 끄집어냈던 순간 나 자신에게 많이 실망했었다. ‘고작 이것들로 이 관계를 끊어내려 하다니, 너가 뭐라고 감히 이혼을 말해’ 스스로 자책했다. 남편은 듣자마자 싫다고 단박에 대답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편의 대답에 마음이 놓인 걸 보니 진심은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그렇다. 홧김에 내뱉어 버렸다.
관계가 다시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진 못했어도 우린 다시 회복하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면서 살았다. 서로 노력하니까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그 사이 우리는 이사를 했고 주말이면 꼭 멀리 데이트를 나갔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서울로 예쁜 카페도 가보고 봄에는 벚꽃을 보러 드라이브도 갔다. 결혼기념일엔 호캉스, 가을에는 일본으로 4박 5일 여행도 다녀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둘의 관계를 환기시키기 위해 노력했었다.
2020년 봄쯤 남편은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버님 회사를 통해 아버님의 비전과 같이 맞물려 운영할 수 있게끔 카페를 열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일반적인 카페고 남편이 원하는 스타일대로 만들어지긴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가족회사였다. 아버님께서는 편히 모일 수 있는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셨고 남편은 카페를 해보고 싶고 해서 만들어진 사업장인 것이다. 그래서 카페 안쪽으로는 사무실 용도로 따로 공간을 내 거기서는 회사 업무를 보고 카페 관리도 같이 병행할 계획이었다.
남편도 그랬고 나도 마찬가지로 처음엔 같이 일 할 생각이 없었다. 가족사업으로서 만들어진 거라곤 하지만 어쨌든 카페로서도 운영을 잘해나가야 했기 때문에 남편과 나 둘 다 처음부터 그 카페를 지키고 있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한테 사무 업무에다가 처음 해보는 카페 관리까지 혼자서 괜찮겠냐고 물었었고 그때 남편은 별 다른 말 없이 괜찮다고 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버님 회사에는 경리직으로 일하던 여직원이 한 명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이 있었고 버스 타고 근처로 지나가는 날이면 남편과 여직원이 나란히 앉아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창밖으로 볼 수 있었다.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하고부터 정말 힘들었던 것 중 하나였다. 퇴근하고 나랑 보내는 시간보다 저 여직원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길 텐데 저렇게 나란히 붙어 앉아서 일하다 보면 정들지 않을까, 바로 옆에서 남편을 도와 일하는 거니까 어쩌면 나보다 괜찮아 보이지 않을까, 그 여직원이랑 바람이라도 난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들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자존감까지 바닥을 쳐 다니던 알바도 때려치우고 회사를 들어간 적도 있다. 뭐든 알바 말고 회사 같은 거면 됐다.
맘 같아서는 제발 그 여직원만 없었으면. 싶었지만 회사 직원으로 있는 사람까지 내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으니 남편한테는 가볍게 장난식으로만 슬쩍슬쩍 말했었다. 사실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신경이 쓰였던 것인데 내 의심 때문에 남편의 일까지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 만큼 겉으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묻어가며 지냈다.
그러다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나는 사무 업무 보는 곳이 카페 안쪽 공간으로 옮겨지게 되면 거기서는 남편이 혼자 일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 여직원이랑 떨어지면 내 마음도 훨씬 편할 거고 더 이상 나란히 앉아서 일하는 모습 안 봐도 되고 이상한 의심 안 해도 되니까 그냥 하루빨리 카페 공사가 끝나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남편한테 혼자서 괜찮겠냐 물었던 것이고 여기 혼자 쓰는 건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느냐 이런 대화까지도 몇 번이고 나눴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카페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 차 안에서 지나가는 말로 듣게 됐다.
안쪽 사무 공간에서,
그 여직원도 같이 일 하는 거라고.
왜 나한테 솔직하게 얘기 안 했는지.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 거 왜 얼버무리고 넘겼는지 모르겠다. 당장은 그냥 이제 겨우 잘 유지되고 있는 이 평화로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랬었겠지만 결국 후폭풍은 심하게 불어왔다.
그날 남편의 말에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겨버렸다. 더 이상 아닌 척하고는 못 살 것 같았다. 이 평화로운 관계를 우리는 매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걸 다 들켜버린 날이었다. 겉으론 괜찮은 척, 다 지나갈 거야 하며 훌훌 털어버린 척 실상은 늘 불안 속에 살고 있었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방아쇠가 결국 당겨진 듯했다. 속이 뒤집어지고 마음이 문드러진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여직원도 그 공간에서 같이 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졌고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당장 뭐라도 내려쳐야 될 것 같아 조수석 바로 옆 문짝을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려쳤다. 그리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치면서 말했다. 왜 말이 다르냐고. 나 죽는 꼴 보고 싶냐고. 저항 없이 놀란 남편은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내 주먹질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미안해. 미안해. 그만해. 하지 마. 다쳐. 내가 어떻게 해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미안해.
처음 본 내 모습에 많이 놀랐는지 남편은 아이처럼 울면서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주먹질은 멈춰졌지만 이미 터질 대로 터진 감정은 쉽게 가라앉혀지지가 않았다. 숨은 계속 잘 안 쉬어졌고 너무 어지러웠다. 차 안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가쁘게 내뱉는 숨 사이사이로 한 마디씩 또박또박 어떻게든 말을 이어갔다.
제발. 나 좀. 살려줘. 나. 너무. 못 살겠어.
이땐 그 많던 눈물도 잘 안 나왔다. 그냥 호흡이 너무 힘들었고 물밀듯 밀려오는 답답함에 내 몸을 나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벌건 대낮 차 안에서 우리 둘은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그날 나는 두 번째로 이혼을 말했다. 여직원을 정리하던지 나랑 이혼하던지 둘 중 하나 당장 결정하라고 했다. 남편은 지체 없이 정리하겠다고 말했고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금씩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그렇다고 속이 후련하진 않았다.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됐다고 마음이 마냥 좋진 않았다. 틀어진 관계를 갖고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와버렸고 결국 회사 여직원까지 정리됐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 일 이후에 남편 혼자 관리하기로 했던 카페는 나도 같이 시작하게 됐다. 종일 같이 붙어있으면 좀 덜하지 않겠느냐는 남편의 제안도 있었고 어찌 됐든 나 때문에 사람 한 명이 정리된 것이니 이렇게라도 하는 게 조금이나마 내 마음도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사, 카페, 해고…. 많은 게 바뀌었지만 남편과 나의 마음은 항상 높은 산 중턱에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는 듯 늘 불안 불안한 상태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