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의심

<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5화

by 이봄



언제부턴가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온갖 이상한 생각들에 편히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잦아졌고 그렇게 한번 피어난 의심의 불씨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남편의 모든 행동들을 왜곡해서 보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각자 폰을 보는 것도 서로 늘 그렇게 해왔던 것인데 어느 날부턴가 남편이 폰만 쥐고 있으면 뭘 하는 걸까 관심 안 갖는 척 온 신경은 남편의 폰을 향해 그리고 남편의 표정을 늘 주시하고 있었고 저 폰 너머 내가 모르는 어떤 여자와 카톡을 주고받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남편의 폰으로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라도 오면 그 번호를 기억했다가 나중에 몰래 저장해 누군지 확인했고 남편 차 조수석 위치가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으면 그날은 하루종일 혼자 의심하느라 바빴다. 마감알바를 하는 내내 남편은 정말 집에 있는 게 맞는지, 일하는 게 맞는지 매 순간이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구름 떼처럼 생겨난 의심 속에 허우적대며 살던 어느 날 새벽. 나는 결국 남편의 휴대폰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날도 역시나 푹 잠이 든 남편 옆에서 혼자 한참을 뒤척였고 벌떡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하다 또다시 누우려던 순간 남편의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속으로만 해왔던 생각들 중 하나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곯아떨어진 게 맞는지 자는 남편의 얼굴 앞에 손을 몇 번 휘적여 보고는 바로 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 잠금을 어떻게 푸는 거였더라. 남편이 폰을 열 때 그렸던 동작을 떠올려 패턴을 얼추 맞춰 그려봤다. 안 열렸다. 남편의 폰은 이미 내 손에 들려있었고 실행으로 옮긴 순간 난 이걸 꼭 열어보고 싶었다. 그럼 의심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휴대폰을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에 갖다 대기도 했다. 안면인식은 아니었나. 굳게 잠긴 폰은 무슨 짓을 해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리다 문득. 늦은 새벽 똑딱똑딱 시계 초침 소리만 울려 퍼지는 깜깜한 방 안에서 자는 남편의 휴대폰을 몰래 쥐고선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 걸까. 정말 단단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나 스스로가 혐오스러웠고 무서웠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심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마감 알바를 마치고 혼자 퇴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남편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고 그날따라 피곤해서 바로 잔다며 이른 저녁부터 연락을 못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여기서 내 의심은 더욱 불거지고 말았다. 잔다고 연락이 끊긴 순간부터 당연히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머릿속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들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11시 퇴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혼자 하는 퇴근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건만 이날은 종일 마음이 불안했다. 발걸음을 평소보다 빠르게 재촉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공동현관을 들어서려는 순간, 바로 옆에 남편의 차가 보였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불쑥 들어온 걸까. 나는 천천히 남편의 차로 다가가 보닛 위에 손을 얹었다. 그때 나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음날 주말에 집 근처 서점에서 데이트를 하던 중 나는 오늘 남편에게 꼭 말을 해야겠다 싶었다. 못 할 짓이라는 것도 알았고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지 스스로 만든 의심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책을 한 권씩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아 곁눈질로 슬쩍 남편의 기분을 한번 살펴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오빠. 나 할 말 있어.”

“뭔데?”

..

“... ..나 오빠 의심하는 거 같아”

“.. 무슨 의심?”



“나 오빠 바람피운다고 의심하고 있어. 어제는 오빠 몰래 폰까지 열어보려고 했어.”




“….”



“나를 의심한다고?”






저 말까지 밖에 못 했는데 눈물이 났다. 그리고 차마 차 보닛에 손을 얹어봤다는 말까지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만큼의 말도 너무 어려웠고 무서웠다. 뒤섞인 여러 감정들이 요동치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내 모습이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그리고 창피했다. 자는 남편 몰래 폰을 봤다는 게 말이나 되는 행동일까. 거기다 차 보닛은. 나 스스로도 너무 미친년 같았다. 정신과라도 찾아 갔어야 했다.





어렵게 말을 꺼내고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나의 말을 들은 남편의 표정은 이미 내 예상과는 다르게 차가워져 있었다. 주말 대낮에 조용한 서점에서 데이트를 하다 별안간 자기를 의심한다는 아내의 말이 남편은 어떤 식으로 들렸을까. 믿었던 사람에게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을까? 순간 정적이 흘렀고 서로 말이 없어졌다. 짧았지만 꽤 긴 시간인 듯했다.





가만히 고개만 떨구고 있던 남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터벅터벅 서점을 빠져나갔다. 바로 일어나 뒤따라 갔지만 왠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뒷모습에서도 느껴졌다. 나를 향한 실망감이. 자기를 의심했다는 배신감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눈물이 더 터져 나왔다. 울고 싶은 사람은 남편인지도 모른다. 남편의 뒤를 밟으며 서점을 나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한테서 실망한 듯한 남편의 그 뒷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말하지 말 걸. 그냥 이러다 말겠지 숨겨둘걸.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걱정해 주고 함께 극복해 보자고, 안아주고 위로해 줄 줄 알았던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도망가버릴 듯한 남편을 세우려 울고 불고 소리치며 말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힘들고 괴롭다고 나도 너무 무섭다고. 도와달라고. 그 모습을 본 남편은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는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를 토닥였다.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날 저녁에 나는 또다시 마음이 초조해졌다. 남편을 의심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고 해서 갑자기 짠 하고 의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저만치 떨어져 고민만 하고 있다가 티브이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뭐라도 내 눈으로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며 나는 남편의 폰으로 메시지 확인을 요청했다. 백번 천 번 몹쓸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때 나는 그걸 꼭 봐야 될 것 같았다. 결국 남편은 보여줬고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했다고 한들 언제 그랬냐는 듯 의심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시아버지로부터 갖게 된 불편한 감정들을 내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남편한테까지 끌고 와 둘이서 안 다퉈도 될 문제로 자주 언성을 높이게 됐고 결국 부부관계까지 소원해져 남편을 의심까지 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과 속으로만 삭이던 스트레스들 사이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살고 싶지가 않았다. 꽤 오랜 기간 우리는 지겹도록 싸웠고 남편도 나도 눈물로 보내는 날이 잦았다. 우리 관계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지게 된 걸까. 기억을 더듬어 생각이란 걸 해볼 수 있게 됐을 쯤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모든 게 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때 처음 남편에게 이혼을 말했었다.





keyword
이전 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