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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Sep 07. 2024

친아빠

3. 불편한 사람

3. 불편한 사람


    친아빠는 우리가 이사를 갈 때마다 한두 번은 찾아왔다. 그때마다 역시나 엄마를 괴롭히고 제멋대로 뒤집어놓고 갔다. 꼭 그러려고 작정이라도 하고 오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집에 불질러버릴 거라며 주방 가스불 켜라고 나한테 소리 지르면서 협박했다. 무서워서 하라는 대로 했다. 엄마는 끄라고 소리를 질렀다. 끄는 게 맞는데 친아빠한테 혼날까 봐 그게 무서워서 차마 끄지를 못했다.


    온몸이 벌벌 떨렸고 울면서 껐다 켰다를 반복하고 서있었더니 친아빠가 잔뜩 격앙된 채 부엌으로 나와서 직접 켜더라. 동생이랑 도망치듯 방에 들어가 주저앉아서 둘이 엉엉 울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누나, 우리 엄마 죽으면 어떡해?’ 하면서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무서워하던 동생의 모습이. 나는 엄마 절대 안 죽는다며 소리를 질렀다. 방 문 밖에선 벽에 장롱에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몸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무섭지만 소리만 듣는 건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동생한테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란 듯이 소리쳤지만 이러다 진짜 우리 엄마 어떻게 되는 거 아닌지 너무너무 불안했고 무서웠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포스러웠던 그 순간만 정확하게 기억난다. 그때 친아빠와 엄마의 나이는 고작 30대 초반이었다.




    친아빠는 집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같이 있을 때마다 언쟁이 생겼다.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돈과 친아빠의 외도문제 때문이었다. 엄마가 친아빠한테 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엄마 이름 앞으로 감당하기 힘든 빚이 생겼고 친아빠는 그걸 알아서 갚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엄마는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에 친아빠를 볼 때마다 돈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친아빠는 차 안에서든 집에서든 자식들이 보고 있건 말건 지 듣기 싫은 소리 꺼냈다고 적반하장으로 엄마한테 지랄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친아빠가 있으면 나는 말없이 눈치만 보게 됐고 엄마와 친아빠의 대화를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했다.


    나중에는 엄마가 우리 집에 빨간딱지 붙여질 수도 있다는 얘기도 했었다. 정말 다행히도 그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 인간 덕에 우리는 반지하집마저 잃고 바닥에 나앉을 신세 직전까지 갔던 거다.


    엄마는 내가 20살이 넘을 때까지 혼자서 빚을 다 갚았다. 그런데도 어릴 땐 친아빠를 보면 좋아했을 때가 있다. 엄마랑 동생이랑 셋이 교회 갔다가 집 가는 길에 아빠가 집에 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하고 그랬다. 대체 왜 좋아했을까? 어린이었던 그때의 나를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중학생 때 쯤 엄마는 친아빠랑 이혼을 했다. 도대체 그런 인간들은 왜 이혼을 안 하겠다 고집을 부리는 거며 무슨 생각으로 자식들을 자기가 키우겠다고 하는 건지 참 이해가 안 간다. 하마터면 동생이랑 나 인생 조질 뻔했다.



    이혼하기 전부터도 물론이고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는 혼자서 나와 동생을 돌봤다. 20대 때는 식당에서, 30대 때부터는 공장으로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밤 9시 10시가 넘는 특근까지 챙겨서 해야 반지하 집이라도 붙들 수 있었고 우리 세 가족이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때는 집 냉장고를 열면 자리가 항상 널널했다. 뒤적거려 반찬거리를 찾는 그런 냉장고를 보는 일은 매우 드문, 아니 거의 없었다.


    없는 와중에도 항상 있었던 반찬이 하나 있다. ‘숯불갈비 후랑크 햄’. 4줄 들어있는 한 묶음 햄이 동생과 나의 유일한 맛있는 반찬이었다. 하나에 4줄이어서 동생이랑 2개 씩 나눠먹으면 딱 좋을 것 같다며 그건 항상 사놓았었다. 엄마 월급날 즘엔 무려 3분요리 미트볼, 함박스테이크도 생기고 달걀칸도 꽉 차고 반찬도 몇 가지 더 생기는데 그럴 땐 꼭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후랑크 햄 하나씩 굽고 달걀프라이도 하나씩 해서 동생이랑 같이 밥을 챙겨 먹었다. 흰쌀밥에 햄하나 프라이 하나. 그 맛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나른한 오후 반지하방 부엌에 상 하나 펼쳐서 동생이랑 같이 챙겨 먹는 밥. 그때 살았던 동네, 그 반지하집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평화로운 기억 중 하나다.


    한부모가정, 기초생활수급자, 급식비무료 등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전부 챙겨 받으며 반지하집에서만 살던 그때, 30대인 지금에야 정말 감사하다 느끼는 건 어릴 때 그런 가정환경으로 놀림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엄마도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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