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엄마가 나랑 동생한테 엄마 재혼해도 괜찮으냐고, 아빠 생기면 어떨 것 같냐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싫으면 재혼 안 할 거라고. 나는 ‘엄마가 좋으면 하는 거지’라고 쿨하게 대답했지만 또 친아빠 같은 그런 사람이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은 됐었다.
그해 11월, 엄마는 교회에서 새아빠와 결혼식을 올렸다. 재혼이지만 예식은 처음이었던 우리 엄마는 아침 일찍 새아빠와 안산에 작은 웨딩샵에서 어여쁜 신랑 신부로 변신했다. 하루종일 새아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싱글벙글했던 우리 엄마. 40살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예쁘게 신부 화장도 받고 새하얀 드레스도 입어보고 부산으로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고3 막바지에, 거의 졸업시기가 다 되어갈 때쯤 새아빠가 생겼다. 나한테 아빠가 생겨서 좋았다기보다는 엄마가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친아빠에 대해 긍정적인 기억이 전혀 없어서인지 아빠의 필요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건 조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차라리 없는 게 편한 존재였으니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가끔 아빠 있는 친구들한테서 이건 좀 부럽다고 느낀 게 몇 개 있긴 한데 아빠가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고 아빠한테 용돈 받는 거? 말고는 없다.
어쨌든 엄마가 재혼하고 나서 아빠랑 팔짱도 끼고 손도 잡고 ‘여보, 당신’ 호칭을 서로 나눌 수 있는 평생짝꿍이 생겼다는 게 나한테도 큰 기쁨이었다. 엄마가 재혼했을 때 교회 집사님께서 엄마한테 그러셨다. 이제 교회에서 부부동반으로 어디 놀러 갈 때 눈치 안 보고 같이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하셨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혼자인 엄마가 많이 신경 쓰였던 건지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다행히 새아빠는 친아빠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항상 우리 엄마한테 예쁘다 해주고 다정한 목소리로 엄마를 불러주고 설거지도 하고 엄마를 웃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이제 식구가 4명이고 맨 위엔 엄마 이름이 아니라 아빠 이름이 있다. ‘부모님’이라는 말을 이제 알맞게 쓸 수 있고 어디 부모님 성함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엄마랑 아빠 두 명의 이름을 다 적어야 하고 부모님 결혼기념일, 그리고 아빠 생일까지 있다. 사소하지만 많은 것들이 생기고 달라졌다. 우리 셋의 짐만 있던 집에 아빠 옷, 아빠 신발, 아빠 양말, 아빠 칫솔, 아빠 숟가락 젓가락 등등 없던 것들이 생겼고 그렇게 ‘엄마, 아빠, 아들, 딸’ 네 식구가 있는 ‘보통의 집’이 완성됐다.
새아빠를 적응하기는 생각보다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친아빠한테도 ‘아빠’를 편하게 불러 본 적이 없는데 고3 막바지에 갑자기 생긴 낯선 남자 어른에게 하려니 도무지 입이 안 떨어졌다. 나는 ‘아빠’라는 그 별 것도 아닌 단어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아빠고 뭐고 그냥 갑자기 남자 어른이랑 한 집에 있는 것부터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동생은 그때 초딩인데다 남자애였어서 그런지 금방 적응하는 듯 보였다. 아빠랑 장난도 잘 치고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나는 도대체 아빠랑은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가끔 할 말이 생겨도 절대 ‘아빠’를 먼저 부르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저기요’라고 할 수도 없고 계속 아저씨 라고 할 수도 없으니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무 불편했다.
어쩌다 아빠랑 단 둘이 집에 있는 날이면 그날은 정말 집에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나는 내 방에 처박혀서 안 나왔고 아빠도 방에서 TV만 보고 있었다. 나만큼 아빠도 불편했겠지 갑자기 다 큰 딸이 생겼으니. 서로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아빠나 나나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제일 불편하다고 느꼈던 건 씻고 나와서 속옷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했던 것. 집에서 편하게 입고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이게 뭐라고 왜 그렇게 불편하고 귀찮은지 신경 쓸게 늘어서 가끔 짜증도 났다.
난생처음 내가 아빠 밥을 챙겨서 같이 먹은 적이 있다. 아빠가 이직때문에 며칠 낮시간에 집에 있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리 불편해도 이제 아빠고 딸이니까, 그리고 왠지 내가 챙겨야 할 것 같아서 라면을 끓여 먹었었다. 역시나 대화 없이 각자 라면만 먹었지만 어쨌든 같이 앉아서 같이 먹었다. 그리고 여름 복날에 한 번은 아빠랑 단 둘이 무려 삼계탕집에 가서 같이 밥을 먹었었다. 역시나 그날도 아무 대화 없이.
아빠가 혼자 지낼 때 라면을 자주 끓여 먹었어서 그런지 아빠는 엄마랑 결혼하고 나서 그냥 라면만 띡 끓여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계란, 파, 콩나물 등등 이것저것 넣어서 더 맛있게 끓인 라면을 좋아했다. 늘 밥도 갓 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새 밥을 원했다. 조금이라도 정성이 들어간 밥상을 좋아했던 것 같다. 무슨 마음인지 안다. 우리는 그래도 셋이 지냈었지만 아빠는 혼자였으니 다 같이 모여 앉아 맛있는 집밥을 먹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오랫동안 원했을 테니까.
처음엔 이해했다. 저녁때 밥 새로 해 놓으라는 엄마 전화를 받으면 밥통에 밥이 많이 남아있어도 엄마 아빠 퇴근시간에 맞춰 새로 해놨었다. 내가 못 하는 날엔 엄마가 그렇게 했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부엌으로 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먼저 있던 밥을 비우고 새로 안쳐놓는 거였다. 그 후에 찌개를 끓이고 다른 반찬들을 준비했다. 갑자기 밥시간에 할 일이 많이 늘었다. 매일같이 그렇게 하려니 솔직히 정말 귀찮았고 같이 밥 먹기 싫을 때도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가끔은 그냥 아빠 고집인 것 같았다.
아빠라는 존재를 한 번도 이렇게 챙겨본 적이 없으니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저녁 준비할 때마다 엄마 옆에서 자주 도왔었는데 엄마도 그렇게 해본 적은 처음이라 가끔 피곤하고 힘들어 보일 때가 많았다.
그렇게 엄마랑 내가 저녁준비 할 동안 아빠는 씻고 나와서 방에서 TV를 본다. 그것조차 정말 싫을 때가 있었다. 똑같이 일하고 와서 왜 엄마는 더 힘들게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때는 그저 아빠가 엄마를 더 고생시킨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들기 시작하니까 나한테 넷이 밥 먹는 시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