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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담는 자(소설)

4장 한반도의 훈민정음

by 한시을

16화: 세종의 꿈


새로운 생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나무 대들보, 한지로 바른 창문, 은은한 햇살.

'여기는...'


몸을 일으켰다. 손을 봤다. 젊었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손. 거칠지 않고 곱았다.

거울을 찾았다. 구석에 놓인 청동 거울. 들어 얼굴을 비춰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알았다. 나였다. 또 다른 생의 나.


'이번에는 어디인가...'

문이 열렸다. 한 여인이 들어왔다. 고운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

"도령님, 일어나셨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침 진지 드셔야죠."


"내가... 누구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인이 놀랐다. "도령님, 농담하시는 거예요? 신유 도령이시잖아요."

신유. 그것이 이번 생의 이름이었다.


기억이 천천히 돌아왔다. 조선. 한양. 집현전. 나는 젊은 학자였다. 세종대왕을 모시는.

"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꿈을 꿔서."

"무슨 꿈이요?"

"오래된 꿈."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아주 오래된."


집현전의 고민


집현전으로 가는 길.

한양 거리는 붐볐다. 양반들이 가마를 타고 지나갔고, 상인들이 물건을 팔았고, 백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자 들렸다.


"이놈아! 이게 뭐냐!" 한 양반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한 백성이 엎드렸다.

"내가 '쌀 석 말'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다섯 말을 가져왔느냐!"


"하지만... 나으리께서 쓰신 글이..."

"뭐? 내 글이 틀렸단 말이냐!"

나는 가까이 가서 봤다. 양반이 쓴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한자로 빼곡했다.


'石三...'

석 삼. 쌀 석 자에 석 삼. 하지만 백성은 석을 '다섯'으로 읽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긴 것이다.

"나으리." 내가 끼어들었다. "백성이 글을 읽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당연하지! 상놈이 글을 안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그래서 일이 잘못되지 않습니까?"

양반이 나를 노려봤다. "넌 누구냐?"


"집현전 학사 신유입니다."

"집현전?" 양반의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음... 그래도 상놈은 상놈이다. 글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그가 가마에 올라 떠났다.


백성이 일어나며 나를 봤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미안하다. 더 도와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이것만으로도..." 그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글을 몰라서 늘 이렇게 당합니다."


내 가슴이 아팠다. 천 년 전 황하에서도, 상나라에서도, 히말라야에서도 같은 문제였다.

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


세종의 부름


집현전에 도착하자 급한 전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유 학사!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전하께서?"


"네! 당장 어전으로 오라 하십니다!"

나는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가슴이 뛰었다. 세종대왕.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군주. 그가 나를 왜 부를까.

어전에 들어서자 세종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십 대 중반. 온화하지만 단호한 눈빛.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고, 종이 위에는 이상한 기호들이 그려져 있었다.

"신유, 왔느냐."

"예, 전하." 나는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것 좀 봐라."

세종이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종이에는 여러 기호들이 그려져 있었다. ㄱ, ㄴ, ㄷ... ㅏ, ㅓ, ㅗ...


내 손이 떨렸다.

'이것은...'

"어떠냐?" 세종이 물었다.


"전하, 이것은 무엇입니까?"

"새 글자다." 세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백성을 위한 글자."

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순간 모든 기억이 쏟아졌다. 황하의 갑골문. 히말라야의 범어. 소마와의 약속. 뜻과 소리를 합친 완벽한 문자.


"전하..."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 글자는...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고민했다. 오래." 세종이 창밖을 바라봤다. "백성들이 한자를 못 읽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아팠다."


"..."

"그래서 생각했다. 쉬운 글자를 만들 수 없을까.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세종이 다른 종이를 꺼냈다.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입 모양, 혀의 위치, 하늘과 땅의 형상.

"이 글자들은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떴다." 세종이 설명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내가 예전에 소마와 함께 범어를 완성시킬 때와 똑같은 원리였다.

"그리고 ㅏ, ㅓ, ㅗ..." 세종이 계속했다.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한다."

뜻을 담는 한자의 철학과 소리를 담는 범어의 원리가 합쳐져 있었다.

완벽했다.


"신유." 세종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 생각은 어떠냐?"

나는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흘렀다.

"전하... 이것은... 천 년을 기다린 글자입니다."


반대의 목소리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조정 회의가 열렸다. 세종이 새 글자 계획을 발표했다.

"경들에게 알린다. 짐이 백성을 위한 새 글자를 만들고자 한다."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영의정 황희가 나섰다.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성들이 한자를 몰라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쉬운 글자를 만들려 한다."


"안 됩니다!" 한 대신이 벌떡 일어났다. 최만리였다. 집현전 부제학. "한자는 천 년 전통입니다. 새 글자는 그 전통을 무너뜨립니다!"

"전통이 백성을 괴롭힌다면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세종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전하!" 다른 대신이 가세했다. "중국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면 오랑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그래도 사대의 예는 지켜야 합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찬성하는 자는 적었고, 반대하는 자가 많았다.

최만리가 다시 일어났다. "전하,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백성들이 글을 알게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최만리의 눈이 차가웠다. "상놈이 양반의 글을 읽고, 법을 알고, 세상 이치를 알게 되면. 그들이 감히 양반에게 대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세종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백성도 알 권리가 있다."

"전하는 너무 이상적이십니다!" 최만리가 소리쳤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있어야 하고,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세종이 천천히 일어났다. "경들의 뜻은 알겠다. 하지만 짐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전하!"


"물러가도록 하라."

대신들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최만리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다.

"신유, 네가 전하를 부추긴 것이냐?"


"아닙니다."

"거짓말 마라. 집현전 학사들이 새 글자에 찬성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저는 다만..."


"조심해라." 최만리의 눈이 번뜩였다. "이 일은 크게 될 것이다. 잘못하면 너도 화를 입는다."

그가 사라졌다.


밤의 만남


그날 밤, 나는 집현전에 혼자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 세종이 준 글자들을 펼쳐놓고 연구했다. ㄱ, ㄴ, ㄷ...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었다.

완벽했다. 정말 완벽했다. 뜻과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글자.


"아름답죠?"

나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궁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눈빛이 남달랐다.

"누구시오?"


"소헌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후궁."

나는 급히 일어나 절했다. "죄송합니다, 마마. 몰라 뵈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녀가 다가왔다. "저도 새 글자를 연구하고 있거든요."


"마마께서도요?"

"네. 전하께서 가르쳐주셨어요." 소헌이 글자들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배우고 나니 너무 쉬워요. 하루면 배울 수 있어요."


"정말입니까?"

"네. 한자는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우잖아요. 하지만 이 글자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백성들도 배울 수 있어요."

나는 그녀를 다시 봤다. 지적이고 따뜻한 눈빛. 세종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하는 마음.


"마마."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신들이 반대하는데... 전하께서는 괜찮으실까요?"

소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걱정이에요. 최만리가 계속 상소를 올린다고 해요. 다른 대신들도 가세하고."

"전하께서는 뜻이 확고하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소헌이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 외로우세요. 신하들은 반대하고, 백성들은 아직 몰라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소헌의 눈이 반짝였다.


"네. 저는..." 나는 글자들을 바라봤다. "이 글자를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소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해요. 전하를 도와서 이 글자를 세상에 알려요."


폭풍의 예감


일주일 후, 최만리가 상소를 올렸다.

"전하, 언문 창제는 부당합니다!"

세종이 상소를 읽었다. 얼굴이 굳었다.


"경은 짐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냐."

"신은 전하를 위해 간하는 것입니다!" 최만리가 엎드렸다. "이 언문이 퍼지면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어찌 그러하냐."


"백성들이 글을 알면 교만해집니다. 양반을 무시하고, 법을 어기고, 질서를 파괴합니다!"

다른 대신들도 가세했다.

"맞습니다, 전하!"


"언문은 폐해가 큽니다!"

"중국도 비웃을 것입니다!"

세종이 책상을 쳤다. "그만!"


모두가 조용해졌다.

"경들은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서 백성을 무시하는구나." 세종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성이 글을 알면 나라가 강해진다. 무식하면 당할 뿐이다!"


"하지만 전하..."

"물러가라. 다시는 이런 상소를 올리지 마라."

최만리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섬뜩함이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멈춰 섰다. "누구냐?"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기척은 계속되었다. 여럿이었다.

'위험하다.'

나는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그들도 빨라졌다.


모퉁이를 돌 때,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신유 학사."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따라오시오."

"누구시오?"


"묻지 마시오. 그냥 따라오면 다치지 않소."

뒤에서도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포위되었다.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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