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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담는 자(소설)

4장 한반도의 훈민정음

by 한시을

18화: 반대세력과의 갈등


잿더미


새벽, 나는 혼자 서고 터에 서 있었다.

잿더미만 남았다. 검게 탄 나무 조각들. 종이 재들이 바람에 날렸다. 천 개가 넘는 연구 자료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신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종이었다. 혼자였다. 호위무사도 없이.

"전하!" 나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어찌 혼자 오셨습니까?"

"일어나라." 세종이 잿더미를 바라봤다. "짐도 보고 싶었다. 우리의 꿈이 어떻게 되었는지."


침묵이 흘렀다.

"전하..."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것은 사고가 아닙니다."

"안다." 세종의 목소리가 무겁였다. "최만리의 동조자들이 한 짓이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종이 한참을 잿더미를 바라봤다. "신유, 너는 포기하고 싶지 않느냐?"

"전하?"


"짐도 지쳤다." 세종이 한숨을 쉬었다. "대신들은 반대하고, 자료는 불탔고, 너는 죽을 뻔했다. 차라리 이 일을 그만두는 게..."

"안 됩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전하,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세종이 나를 바라봤다. 눈에 피로가 가득했다.

"전하." 나는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것을 보십시오."

'발음기관 도해'였다. 세종이 받아 들었다.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것은..."

"어젯밤 완성했습니다. 서고에 불이 나기 직전에." 나는 설명했다. "모든 글자의 발음 원리입니다. 과학적 증명입니다."

세종의 눈빛이 바뀌었다. 피로가 사라지고 희망이 차올랐다.


"정말 대단하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이것이면 대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언문이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담은 과학이라는 것을."

세종이 종이를 꽉 쥐었다. "신유, 고맙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종이 일어났다. "가자. 준비할 것이 많다."

"무엇을 준비하십니까?"


"전쟁을." 세종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대신들과의 마지막 전쟁을."


집단 상소


사흘 후, 예상대로 일이 터졌다.

조정 회의가 열렸다. 대신 오십여 명이 모였다. 절반 이상이 언문 반대파였다.

영의정 황희가 나섰다. "전하, 신들이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하라."

황희가 두꺼운 상소문을 꺼냈다. "대신 삼십이 명이 연명한 상소입니다."

세종의 얼굴이 굳었다. "내용이 무엇이냐."


"언문 창제를 재고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거부한다."

"전하!" 다른 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들어주소서!"


"이유를 말해보라."

한 대신이 나섰다. "첫째, 언문은 중국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대의 나라입니다. 독자적 문자를 만들면 중국이 우리를 오랑캐 취급할 것입니다!"


"둘째!" 다른 대신이 가세했다. "백성들이 글을 알게 되면 교만해집니다. 상소를 남발하고, 송사를 일으키고, 관리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셋째!" 또 다른 대신. "수백 년 전통의 한자를 버리는 것은 조상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신들이 하나둘 가세했다.

"맞습니다, 전하!"

"언문은 폐해가 큽니다!"


"백성들은 무식한 채로 두는 것이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세종이 책상을 탁 쳤다. "그만!"

모두가 조용해졌다.


"경들은..." 세종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성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전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그들이 무식하면 나라가 약하다. 글을 알아야 법을 알고, 권리를 알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전하..." 황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면 질서가 흔들립니다."

"질서?" 세종이 비웃었다. "경들이 말하는 질서는 양반만을 위한 질서다. 백성을 짓밟는 질서다!"

"전하, 너무 과격하십니다!"


"과격한 것은 경들이다!" 세종이 일어났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려 하다니!"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들.

황희가 다시 나섰다. "전하,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정말 언문을 강행하시겠습니까?"


"그렇다."

"그럼..." 황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신들은 더 이상 조정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순간 어전이 조용해졌다.


"무슨 뜻이냐." 세종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직하겠다는 뜻입니다." 황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언문이 반포되면 신을 포함한 삼십여 명의 대신이 모두 사직할 것입니다."


"협박이냐!"

"아닙니다. 소신입니다."

세종이 황희를 노려봤다. 황희도 물러서지 않았다.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내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소신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아라, 신유."


과학의 증명


나는 대신들을 향해 돌아섰다.

"대감들께 여쭙겠습니다. 언문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연하지." 한 대신이 코웃음을 쳤다. "이상한 기호들이더군."


"그 이상한 기호들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아십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나는 발음기관 도해를 펼쳤다. "이것을 보십시오."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그림과 글자들이 빼곡했다.

"ㄱ자를 보십시오." 나는 첫 번째 그림을 가리켰다. "이것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입니다. 직접 해보십시오. ㄱ."


"ㄱ..." 몇몇 대신들이 따라 했다.

"느껴지십니까? 혀뿌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 한 대신이 놀랐다. "정말 그러네."


"ㄴ자는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입니다. ㄴ. 해보십시오."

"ㄴ..." 더 많은 대신들이 따라 했다.

"ㄷ자는 혀끝이 윗잇몸을 막는 모양. ㄹ자는 혀끝이 윗잇몸을 굴리는 모양."


하나하나 설명했다. 대신들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놀라움, 감탄, 그리고 약간의 흔들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물었다. "언문은 아무렇게나 만든 기호가 아닙니다. 인간의 발음 기관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만든 문자입니다!"


"하지만..." 한 대신이 반박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소? 어차피 배우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아니오?"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자는 몇천 개를 외워야 합니다.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웁니다. 하지만 언문은..."


나는 세종을 바라봤다. 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여덟 자만 배우면 됩니다. 그리고 발음 원리를 알면 하루 만에 배울 수 있습니다."

"하루?"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네. 제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나는 한 젊은 내관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내관이 떨며 다가왔다. "네, 나으리..."

"네가 한자를 아느냐?"


"아닙니다... 천한 것이라..."

"좋다. 지금부터 내가 언문을 가르쳐주겠다.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대감들이 보시게."

나는 종이에 ㄱ, ㄴ, ㄷ을 썼다.


"이것은 ㄱ이다.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ㄱ."

"ㄱ..." 내관이 따라 했다.

"이것은 ㄴ. 혀끝에서 나는 소리. ㄴ."


"ㄴ..."

십 분이 지났다. 내관은 자음 열네 개를 배웠다.

"이제 모음이다. ㅏ, ㅓ, ㅗ, ㅜ..."

또 십 분. 모음 열 개를 배웠다.


"이제 합쳐보자. ㄱ + ㅏ = 가."

"가!" 내관이 환호했다.

"ㄴ + ㅏ = 나."


"나!"

대신들이 놀란 얼굴로 지켜봤다.

삼십 분 후, 내관은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었다. 간단한 문장도 읽을 수 있었다.


"보셨습니까?" 내가 대신들을 향했다. "삼십 분 만에 글을 깨쳤습니다. 한자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황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유 학사, 인정하겠소. 언문이 과학적이고 배우기 쉽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황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것이 문제요."

"네?"


"너무 쉽소. 너무 빨리 배울 수 있소." 황희가 다른 대신들을 돌아봤다. "그래서 더 위험하오. 백성들이 단숨에 글을 알게 되면, 그들을 통제할 수 없소."

다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황희가 세종을 바라봤다. "언문은 양반의 권위를 무너뜨릴 것이오. 그것이 우리가 반대하는 진짜 이유요."


세종의 선택


세종이 일어났다.

"경들의 본심을 듣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다."

"전하?"


"경들은 백성을 위한다고 했지만, 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었구나."

황희가 고개를 들었다. "부정하지 않겠소. 우리는 양반이오. 지배 계급이오. 질서를 지켜야 하오."

"그 질서가 불의하다면?"


"불의해도 질서는 질서요. 질서 없이는 나라가 설 수 없소."

세종이 한참을 황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경의 사직서를 받아들이겠다."


어전이 술렁였다.

"전하!" 대신들이 놀랐다.

"그리고 함께 사직하겠다는 대신들의 사직서도 모두 받아들이겠다."


"전하, 진심이십니까?" 황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다." 세종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경들이 없어도 짐은 언문을 반포할 것이다."

"하지만... 조정이 마비될 것입니다!"


"그래도 상관없다." 세종이 나를 바라봤다.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짐은 무엇이든 감수하겠다."

황희가 할 말을 잃었다. 다른 대신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주일을 주겠다." 세종이 선언했다. "사직할 자는 사직서를 내라. 그리고 남을 자는 언문 반포를 도우라."


"전하..."

"물러가라."

대신들이 하나둘 물러났다. 황희가 마지막으로 세종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존경과 실망, 걱정과 분노.


그들이 모두 나가자 세종이 주저앉았다.

"전하!" 나는 급히 다가갔다.

"괜찮다." 세종이 손을 저었다. "그냥... 피곤할 뿐이다."


"전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신 삼십 명이 사직하면..."

"알고 있다." 세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봤다. "신유, 짐이 물어보겠다. 백성과 대신 중 누가 더 중요하냐?"


"백성입니다."

"그렇다. 백성이다." 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들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은 바꿀 수 없다. 그들이 나라의 주인이다."


나는 감동받았다. 이 사람이 진정한 왕이구나.

"전하, 제가 돕겠습니다."

"고맙다, 신유."


밤의 위협


그날 밤, 나는 다시 혼자 집현전에 남았다.

발음기관 도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반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때 창문이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한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 옷, 가린 얼굴.

"누구냐!" 나는 붓을 들었다.

"조용히 하시오." 낮은 목소리. "해치러 온 게 아니오."


"그럼 왜 왔나?"

"경고하러 왔소."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반포를 막으시오."

"불가능하다."


"그럼 죽을 것이오." 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전하도, 당신도, 그리고..." 그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언문을 배운 모든 자들도."

종이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소헌, 다른 집현전 학사들, 그리고... 궁녀들, 백성들.


"당신들..." 내 목소리가 떨렸다. "감히..."

"우리는 준비되어 있소." 그가 종이를 내 앞에 던졌다. "반포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오."

그가 창문으로 사라졌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진짜 위협이었다.

반포를 하면 피를 볼 것이다.


하지만 반포를 멈출 수는 없다.

나는 종이를 구겼다. 던졌다.

"오라." 나는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준비되어 있다."


창밖, 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이었다.

사흘 후가 반포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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