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훈민정음의 반포
궁궐이 술렁였다.
내일이 반포일이었다. 훈민정음을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리는 날.
하지만 분위기는 축제가 아니라 전쟁 전야 같았다. 궁궐 곳곳에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호위무사들이 삼엄하게 경계했다.
"신유 학사." 소헌이 다가왔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어젯밤에도 위협이 있었다면서요."
"네. 반포를 막겠다는."
소헌이 내 손을 잡았다. "조심하세요. 전하도, 학사님도.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마마도 조심하십시오."
그녀가 사라진 후, 나는 혼자 궁궐 뜰을 걸었다. 달빛이 밝았다. 내일이면 보름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종이었다.
"전하." 나는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세종이 내 옆에 섰다. "신유, 잠은 안 자느냐?"
"전하께서도 그러신 것 같은데요."
세종이 웃었다. "그렇구나. 둘 다 잠이 안 오는 밤이로구나."
우리는 나란히 달을 바라봤다.
"신유." 세종이 조용히 말했다. "짐이 잘못하는 것일까?"
"전하?"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대신들을 적으로 돌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아닙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옳은 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어나게 하면 됩니다." 나는 세종을 바라봤다. "전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천 년을 기다린 이 순간을."
세종이 나를 빤히 보았다. "천 년?"
"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 문자는 천 년 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입니다. 황하의 갑골문, 히말라야의 범어, 그리고 이제 한반도의 훈민정음."
"너는 참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세종이 웃었다. "하지만 믿어진다. 네가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전하."
"신유." 세종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일, 함께 끝까지 가자."
"물론입니다."
새벽부터 광화문 앞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백성들이었다. 수백 명이 모였다. 궁녀들에게서, 관노들에게서 소문을 들었다. 오늘 왕이 새 글자를 반포한다고.
"정말 우리도 배울 수 있는 글자래."
"한자보다 쉽다던데."
"하루면 배운대."
기대에 찬 얼굴들. 설렘에 찬 목소리들.
하지만 멀리서 다른 무리도 보였다. 양반들이었다. 팔짱을 끼고 서서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황희도 있었다.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시진(오전 9시), 궁궐 문이 열렸다.
세종이 나왔다. 용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 뒤로 나와 다른 집현전 학사들이 따랐다.
광장 한가운데 높은 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세종이 단 위에 올랐다.
"백성들이여!" 세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짐이 너희에게 선물을 주려 한다!"
백성들이 환호했다.
"새로운 글자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글자. 그 이름은 훈민정음!"
세종이 손을 들자 내가 큰 현판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 스물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백성들이 웅성거렸다. 이상한 기호들. 하지만 신기해 보였다.
"이 글자는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다!" 세종이 계속 말했다. "양반도, 상민도, 천민도 모두 배울 수 있다!"
"와아!" 환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그때였다.
광장 뒤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살인이다!"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다섯 명. 얼굴을 가리고, 칼을 들고.
"왕을 죽여라!" 그들이 소리쳤다.
단을 향해 돌진했다.
"전하!" 나는 세종 앞을 막아섰다.
호위무사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암살자들이 더 빨랐다.
첫 번째 암살자가 단에 올라왔다. 칼을 들어 올렸다.
나는 현판으로 막았다. 칼날이 나무에 박혔다.
"물러서라!" 나는 소리쳤다.
"네놈이 물러서라!" 암살자가 칼을 빼내려 했다.
그때 옆에서 다른 학사가 달려들었다. 둘이 뒤엉켜 굴렀다.
두 번째 암살자가 반대편에서 올라왔다. 세종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안 돼!" 소헌이 나타났다. 그녀가 세종 앞을 막았다.
칼이 그녀의 팔을 스쳤다. 피가 튀었다.
"소헌!" 세종이 외쳤다.
호위무사들이 암살자를 쓰러뜨렸다. 다른 암살자들도 하나씩 제압되었다.
광장은 아비규환이었다. 백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양반들은 냉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끝났구나...' 나는 생각했다. '반포가 실패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멈춰!" 큰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돌아봤다.
광장 입구에 한 무리가 서 있었다. 백 명쯤 되어 보였다. 평범한 백성들. 상인들, 농부들, 장인들.
그들 앞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일흔은 넘어 보였다. 허리가 굽고 주름이 깊었다.
"누구냐!" 호위무사가 소리쳤다.
"저는 그냥 백성입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러서라! 위험하다!"
"아닙니다." 노인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위험한 것은 저 양반들입니다."
노인이 황희와 다른 대신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평생 글을 몰라서 당했습니다. 양반들이 쓴 문서를 읽지 못해서 속았습니다. 억울해도 상소를 못 올렸습니다. 말도 못 했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오늘 전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글을 배울 기회를. 스스로를 지킬 기회를."
다른 백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양반들은..." 노인이 황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가 글을 배우는 것이 두려운 겁니다. 우리가 똑똑해지면 속이지 못하니까."
황희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노인이 무릎을 꿇었다. "부디 이 글자를 반포해 주십시오!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
"전하!" 다른 백성들도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전하!"
"전하!"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다. 광장이 울렸다.
세종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백성들이여..."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어나라. 일어나거라."
백성들이 천천히 일어났다.
"짐이 약속한다." 세종이 선언했다. "오늘부터 훈민정음은 이 나라의 공식 문자다!"
"만세!" 백성들이 환호했다. "만세! 만세!"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다.
양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황희도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표정이 있었다. 패배의 인정, 그리고 약간의 존경.
오후, 광장에서 첫 수업이 열렸다.
백성들이 삼백 명 넘게 모였다. 나와 다른 학사들이 가르쳤다.
"이것은 ㄱ입니다.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따라 해보세요. ㄱ."
"ㄱ..." 백성들이 따라 했다.
"ㅏ는 입을 크게 벌리는 소리. ㅏ."
"ㅏ..."
"합쳐봅시다. ㄱ + ㅏ = 가."
"가!" 백성들이 환호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백성들은 자음 열네 개를 배웠다.
두 시간이 지났다. 모음까지 배웠다.
세 시간이 지났을 때, 한 아이가 외쳤다.
"선생님! 제 이름을 쓸 수 있어요!"
"정말?" 나는 다가갔다.
아이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자를 썼다. '영수'.
"잘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자기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노인도, 젊은이도, 아이들도.
"우와!"
"신기해!"
"정말 쉽네!"
기쁨의 함성이 터졌다.
노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하께 감사하십시오."
"전하께도 감사하지만..." 노인이 내 손을 잡았다. "나으리도 고맙습니다. 우리를 위해 싸워주셔서."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천 년을 기다렸다. 이 순간을.'
황하에서 갑골문을 만들 때, 히말라야에서 범어를 만들 때, 나는 꿈꿨다. 모든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을.
그리고 오늘, 그 꿈이 이루어졌다.
밤, 나는 혼자 궁궐 뜰을 걸었다.
몸이 이상했다. 가벼웠다.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다 되었구나.'
이번 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생으로 넘어갈 시간.
"신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세종이었다.
"전하."
"왜 혼자 있느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세종이 내 옆에 섰다. "신유, 너에게 물어볼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너는..." 세종이 망설였다. "정말 평범한 학사가 아니지?"
나는 놀라 세종을 바라봤다. 세종이 미소를 지었다.
"짐도 안다. 네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마치 다른 시간에서 온 것 같은."
"전하..."
"괜찮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세종이 하늘을 바라봤다. "다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없었다면 훈민정음도 없었을 것이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드신 겁니다."
"우리가 함께 만든 것이다." 세종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짐은 안다. 너는 곧 떠날 것이다."
내가 놀라 입을 열려 하자 세종이 손을 들었다.
"말하지 마라. 짐은 그저... 잘 가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기를."
눈물이 흘렀다. "전하..."
"울지 마라." 세종이 웃었다. "이것은 슬픈 이별이 아니다. 다음을 위한 시작이다."
우리는 한참을 서로를 바라봤다.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이 글자를 지켜주십시오. 앞으로 많은 시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자는 천 년을 갈 것이다. 짐이 보장한다."
"감사합니다."
세종이 돌아섰다. "잘 가거라, 신유. 아니... 소리를 담는 자여."
그가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았다.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마지막으로 광화문을 바라봤다. 훈민정음 현판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완성되었다. 천 년의 여정이.'
갑골문의 뜻, 범어의 소리, 그리고 훈민정음의 완성.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앞으로 이 글자는 시련을 겪을 것이다. 일제의 탄압, 근대화의 혼란.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른 모습으로. 이 글자를 지키기 위해.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나는 웃었다.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빛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