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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담는 자(소설)

5장 근대의 시련

by 한시을

20화: 일제의 탄압, 한글의 수난


붉은 고시문

1910년 여름, 한성.

나는 석현이었다. 서른 살, 한성사범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사. 빛으로 흩어졌던 몸이 다시 모였을 때, 나는 이미 이 시대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세종의 꿈을, 신유의 헌신을, 그리고 훈민정음 반포 그날의 환희를 희미하게 기억하면서.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환희가 아니었다.

종로 네거리에 붉은 고시문이 붙었다. 일본어로 쓰인 글자들 사이로, 조선어 몇 자가 섞여 있었다.

"조선어 사용 금지."


아침 햇살이 고시문을 비췄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읽었다. 누군가 신음했다.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거리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선생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내 제자 김영숙이었다. 스무 살, 여학교를 갓 졸업하고 한글 보급 운동에 뛰어든 여성.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저 글을... 읽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말을 쓰지 말라니..."

대답할 수 없었다. 1446년, 나는 세종의 옆에서 한글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백성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던 그 감격을. 그리고 지금, 그것이 금지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불타는 책

사흘 후, 일본 헌병들이 학교로 왔다.

"조선어 교과서, 모두 제출하시오."

헌병 대장의 조선말은 어눌했지만 명령은 명확했다. 나는 교무실 서가를 바라봤다. 『훈민정음해례본』, 『한글 첫걸음』, 『조선어문법』... 십 년간 모은 책들이 거기 있었다.


"제출하지 않으면, 강제 압수합니다."

제자들이 떨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서가로 걸어갔다. 『훈민정음해례본』을 집어 들었다. 1446년, 그때의 기억이 손끝으로 흘러들어왔다. 세종의 목소리가, 신유의 미소가, 백성들의 환호가.


"이 책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헌병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들이 달려들어 책을 쓸어 담았다. 서가가 비어갔다. 십 년이 십 분 만에 사라졌다.


운동장에 불이 피어올랐다.

책들이 쌓였다. 헌병이 석유를 뿌렸다. 불이 붙었다. 종이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창가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제자들이 울었다. 누군가는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창문을 주먹으로 쳤다.


불길 속에서 글자들이 타올랐다. ㄱ, ㄴ, ㄷ... 28자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바람이 재를 날렸다. 한글이 공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선생님."


영숙이 내 옆에 섰다.

"우리가 저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막을 수 없었지."


"그럼... 이제 끝인가요? 한글이 사라지는 건가요?"

나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아니다."


"네?"

"불에 타는 건 종이다. 글자가 아니야."

영숙이 나를 올려다봤다. 눈물 자국이 뺨에 남아 있었다.


"선생님..."

"글자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종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한글은 살아있어."

운동장의 불길이 더 높이 치솟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475년 전에도 반대가 있었다. 세종을 막으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글은 살아남았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밤의 약속

그날 밤, 영숙이 나를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펼쳐보니 한글로 쓴 책이었다. 손으로 베껴 쓴 『훈민정음언해본』이었다.


"제가... 몰래 베껴뒀습니다. 불태워지기 전에."

나는 그 책을 받아 들었다. 촛불 아래서 글자들이 또렷했다. 영숙의 손글씨는 정갈했다. ㄱ, ㄴ, ㄷ... 28자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잘했어."

"선생님, 저는... 계속하고 싶습니다."

"뭘?"


"가르치는 일을요. 한글을."

나는 그녀를 봤다. 스무 살 젊은 여성의 눈에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475년 전, 훈민정음 반포 때 광화문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에서 봤던 그 불꽃.


"위험해."

"알고 있습니다."

"잡히면 감옥에 간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녀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웠다.

"왜?"


"제 어머니는 글을 모릅니다. 평생 남의 손 빌려 편지를 쓰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글을 가르쳐드렸더니, 어머니가 처음으로 당신 이름을 쓰셨어요."

영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어머니가 우셨습니다. '내 이름을 처음 써봤다'고. 일흔 평생 처음이라고."

나는 알았다. 이것이 바로 세종이 원했던 것임을. 백성이 자기 이름을 쓰는 것. 그 단순하고도 거대한 꿈.

"그래서 저는 멈출 수 없습니다, 선생님. 일본이 금지해도, 책을 불태워도, 저는 가르칠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쓸 수 있게."


촛불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475년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것을. 한글을 향한 사람들의 갈망이. 자기 소리를 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좋아."


나는 그녀의 손에 책을 다시 쥐어주었다.

"그럼 함께하자. 지하에서."

"지하에서요?"


"낮에는 가르칠 수 없다. 그럼 밤에 가르치는 거야. 헌병 눈을 피해서."

영숙의 눈이 빛났다.

"언제부터입니까?"


"내일 밤부터."


지하로

다음 날 밤, 북촌 한옥 골목.

영숙이 앞서 걸었다. 나는 뒤를 따랐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작은 한옥 한 채 앞에 멈췄다.

문을 두드렸다. 세 번 짧게, 두 번 길게.


문이 열렸다. 안에 열다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젊은이, 노인, 여성, 남성. 모두 촛불을 앞에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을 모셔왔습니다."


영숙이 말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들 앞에 섰다. 촛불이 열다섯 개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불빛들이지만,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여러분."


내 목소리가 작은 방 안에 울렸다.

"오늘부터 우리는 한글을 배웁니다. 일본이 금지했지만, 우리는 배웁니다. 책을 불태웠지만,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ㄱ, ㄴ, ㄷ..."

나는 칠판에 글자를 썼다. 분필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보았다.


"이것이 우리 글자입니다. 475년 전,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저는... 일흔 살입니다. 지금 배워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글을 배우면... 제 이름을 쓸 수 있을까요?"

나는 미소 지었다.


"쓸 수 있습니다. 당신 이름을, 당신 생각을, 당신 마음을."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밤이 깊어갔다. 촛불이 하나둘 꺼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들은 한글을 배웠다. 금지된 글자를, 불태워진 문자를, 하지만 살아있는 소리를.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일본이 종이를 불태울 수 있다. 책을 압수할 수 있다. 학교를 폐쇄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글자를, 그것만은 불태울 수 없다.


한글은 살아있었다. 지하에서, 어둠 속에서, 촛불 아래서.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더 긴 싸움이, 더 깊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1446년 세종이 시작한 그 꿈을, 우리가 이어갈 것이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탄압이 아무리 혹독해도.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한글이 있으니까.

우리 소리를 담는, 우리 마음을 쓰는, 그 글자가.


영숙이 문을 열었다. 밖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손에 쥔 책이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글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마치 촛불을 옮겨 심듯이. 그렇게 불씨는 퍼져나갈 것이다. 일본이 모르는 사이에, 어둠이 감출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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