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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담는 자(소설)

5장 근대의 시련

by 한시을

21화: 지하 한글학교와 독립운동


여섯 개의 촛불

1911년 봄, 한성.

6개월이 흘렀다. 첫 지하 학교는 이제 여섯 곳이 되었다.

북촌, 남촌, 서대문, 동대문, 마포, 용산. 촛불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켜졌다. 밤마다, 골목마다, 한옥마다. 일본 헌병이 모르는 사이에 한글은 퍼져나갔다.


나는 밤마다 돌았다. 한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영숙이 함께했다. 그녀는 이제 스물한 살이었다. 일 년 사이에 더 단단해졌다. 눈빛이 달라졌다.

"선생님, 오늘 새로운 학생이 셋 더 왔습니다."


북촌 학교, 열아홉 명이 촛불 앞에 앉아 있었다.

"좋아. 시작하자."

칠판에 분필이 닿았다. ㄱ, ㄴ, ㄷ... 소리 없는 강의가 시작됐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따라 썼다. 종이에 스치는 연필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군화 소리였다.


모두가 얼어붙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누군가 숨소리를 삼켰다.

"헌병이다."

영숙이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잡았다. 떨리고 있었다.


쿵. 쿵. 쿵.

군화 소리가 가까워졌다. 골목을 지나갔다. 한옥 담장을 스쳤다. 그리고... 멀어졌다.

사람들이 긴 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지나갔어요."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은 경고라는 것을. 언젠가 그 군화가 이 문을 차고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그림자

다음 날 밤, 남촌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학생 하나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박철수, 서른 살쯤 되는 남자. 한 달 전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철수씨."

그가 움찔했다.

"네, 선생님."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아... 네. 배우고 싶어서요."

목소리가 떨렸다. 땀이 이마에 맺혔다. 봄밤이 차가운데도.


수업이 끝난 후, 영숙이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박철수가 이상합니다."

"나도 느꼈어."


"어제 남대문 쪽에서 일본 헌병과 이야기하는 걸 봤어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확실해?"


"네. 헌병이 돈을 주더군요."

밀고자. 일본이 심어놓은 눈.

"다른 학교에도 알려야 합니다."


영숙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급습

사흘 후, 서대문 학교.

그날 밤은 비가 왔다. 빗소리가 기와를 두드렸다. 스물세 명의 학생이 모였다. 가장 많은 날이었다.

나는 칠판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독립. 이 단어를 써봅시다."

그때였다.

쾅!


문이 박살났다. 군화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헌병 대여섯 명. 칼을 뽑고 있었다.

"조선어 교육 금지! 모두 체포!"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도망치려 했다. 헌병이 칼자루로 때렸다. 사람이 쓰러졌다. 피가 바닥에 튀었다.


"멈춰!"

나는 소리쳤다. 헌병들이 나를 봤다.

"이 사람들은 무고합니다. 제가 가르친 겁니다."


헌병 대장이 다가왔다. 칼끝이 내 목을 겨냥했다.

"당신이 선생이요?"

"그렇습니다."


"이름."

"석현."

"좋아. 체포."


두 명의 헌병이 내 팔을 잡았다. 밧줄이 손목을 조였다.

"선생님!"

영숙이 소리쳤다. 그녀가 달려들었다. 헌병을 밀쳤다.


"놔요! 선생님을 놔주세요!"

헌병이 그녀를 쳤다. 영숙이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영숙!"


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헌병들이 나를 끌었다. 밖으로, 비 속으로.

뒤돌아봤다. 영숙이 일어나고 있었다. 피 묻은 입으로 무언가 외쳤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종로서

종로 경찰서 지하.

어둠이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쥐가 지나갔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일본 경찰 고등계 형사.

"석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선어 교육,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시오?"

"위험한 건 당신들이오."


형사가 웃었다.

"조선은 이제 일본이오. 조선어는 필요 없소. 일본어만 쓰면 되오."


"사람은 자기 말을 빼앗기면 죽소."

"그럼 죽으시오."

형사가 돌아섰다.


"내일 다시 오겠소. 그때까지 생각하시오. 전향하면 풀어주겠소."

문이 닫혔다. 어둠이 다시 왔다.


나는 벽에 기댔다. 차가웠다. 1446년, 세종이 꿈꾼 세상이 떠올랐다. 백성이 자유롭게 자기 말을 쓰는 세상. 지금은 그 꿈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꿈은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영숙에게도, 그 스물세 명의 학생들에게도,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이 계속할 것이다. 내가 없어도.


선택

사흘째 되는 날, 문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들어온 건 형사가 아니었다.

영숙이었다.


"영숙?"

그녀는 피투성이였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헌병 둘이 그녀를 끌고 들어와 내 옆에 내던졌다.


"영숙! 왜 너를..."

"선생님."

그녀가 웃었다. 피 묻은 입술로.


"제가... 자수했어요."

"뭐?"

"선생님 혼자 책임질 순 없잖아요. 저도... 가르쳤으니까."


헌병이 문을 닫고 나갔다. 우리 둘만 남았다.

"바보야. 왜 그랬어."

"바보는 선생님이에요."


영숙이 내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시니까."

"너는... 살아야 해. 밖에서 계속해야 해."


"아니에요."

영숙이 고개를 저었다.

"함께 있어야 해요. 여기서든, 밖에서든."


촛불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느꼈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영숙아."

"네."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했어."

"아니에요."

그녀가 내 손을 꽉 쥐었다.


"선생님이 저를 깨웠어요. 한글이 뭔지, 우리 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걸 위해 싸우는 게 무엇인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저를 지켰어요. 제 마음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종의 시대부터 이 시대까지 목격해 왔지만, 이 순간만큼 무력한 적이 없었다.

"선생님."


"응."

"우리...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요?"

"나갈 거야."


"그럼 그때..."

영숙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때 다시 가르쳐주세요. 한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약속해."

"그리고..."

그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요. 한글도, 우리도."

"안 해. 절대."

어둠이 우리를 감쌌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느꼈다. 영숙의 따뜻한 체온을, 한글을 향한 그녀의 뜨거운 마음을.

그리고 알았다.


일본이 우리를 가둘 수 있다. 때릴 수 있다. 죽일 수도 있다.하지만 이 마음만은, 한글을 향한 이 사랑만은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새벽

새벽이 왔다.

문이 열렸다. 헌병이 영숙을 끌어냈다.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소리쳤다. 헌병을 붙잡으려 했다. 다른 헌병이 나를 때렸다. 바닥에 쓰러졌다.

"영숙!"


그녀가 돌아봤다. 끌려가면서도 미소 지었다.

"선생님, 포기하지 마세요."

문이 닫혔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수많은 시간을 건너오면서 처음으로. 세종이 떠났을 때도, 신유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울고 있었다.왜냐하면 이번에는... 내가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울음이 그친 후, 나는 일어났다.


영숙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래. 포기하지 않겠다.


일본이 우리를 가두고, 때리고, 죽인다 해도.

한글은 계속될 것이다. 영숙이 계속할 것이고, 그 스물세 명이 계속할 것이고, 여섯 개의 촛불이 계속 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힐 것이다.

그날을 위해,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복도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영숙의 목소리였다. 고문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벽을 주먹으로 쳤다. 피가 났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쿵. 쿵. 쿵. 주먹 소리와 비명 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섞였다.


그리고 나는 맹세했다. 이 치욕을, 이 고통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반드시 갚겠다고. 한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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