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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담는 자(소설)

5장 근대의 시련

by 한시을

23회: 6.25 전쟁 속 한글 지키기


새벽의 포성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서울.

쾅!

포성이 하늘을 갈랐다. 나는 잠에서 깼다. 조선어학회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한글 교재를 만들다가 잠든 것이었다.


쾅! 쾅! 쾅!

연이은 폭음. 창문이 흔들렸다. 멀리 북쪽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전쟁이다."


문이 박차고 열렸다. 리준혁이었다. 5년 전 광화문에서 만난 그 청년. 지금은 서른다섯, 조선어학회 연구원이었다.

"선생님! 북한군이 38선을 넘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전면전입니다. 탱크가, 대포가, 수만 명이..."

또 포성이 울렸다. 더 가까웠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리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국군이... 준비가 안 됐습니다."


나는 책상 위의 원고를 봤다. 『한글 문법 완전본』. 5년간 만든 책. 아직 인쇄도 안 된 원고.

"이걸 지켜야 해."

"선생님, 지금은 피난을 해야..."


"피난을 하든 뭘 하든, 이건 지켜야 해."

쾅!

더 가까운 폭음. 건물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서울이 위험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좋아. 하지만 이 원고들을 가지고."

서가를 봤다. 수백 권의 책. 조선어 사전, 문법책, 교재들. 5년간, 아니, 해방 전부터 숨겨왔던 것들.


"다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럼..."

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골랐다. 『훈민정음해례본』 필사본, 『한글문법』 원고, 『조선어대사전』 원고.


"이것들만이라도."

리준혁이 보자기에 쌌다. 무거웠다. 하지만 이것은 한글의 뿌리였다. 무게를 재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하

6월 27일, 한강.

서울이 무너지고 있었다.

다리 위에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모두 달렸다. 짐을 이고, 아이를 업고, 노인을 부축하며.


나는 보자기를 등에 졌다. 리준혁이 앞에서 길을 열었다.

"비켜요! 비켜주세요!"

하지만 사람들은 비킬 수 없었다. 다리가 사람으로 꽉 찼다. 누군가 넘어졌다. 밟혔다. 비명이 들렸다.


쾅!

폭격이었다. 다리 북쪽 끝에 불이 붙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었다.

"다리가 무너진다!"


누군가 소리쳤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사람들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물소리에 묻혔다.

"선생님! 빨리!"


리준혁이 내 손을 잡았다. 끌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밀치고, 간신히 다리를 건넜다.

뒤를 돌아봤다. 다리가 폭발했다. 불기둥이 솟았다. 아직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 물에 빠졌다.

"가야 합니다!"


리준혁이 소리쳤다. 나는 보자기를 꽉 안고 뛰었다. 한글이 등에 무거웠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피난길

7월 중순, 대전.

피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천막이 쳐졌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이 울었다.

나는 한 초등학교 교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리준혁과 다른 연구원 셋이 함께였다.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리준혁이 물었다.

"계속한다."


"네?"

"가르치는 것을. 전쟁 중에도 한글은 계속돼야 해."

"하지만 누가 배우려고 하겠습니까? 다들 살기도 바쁜데..."


나는 교실 밖을 봤다. 운동장에 피난민 아이들이 있었다. 십여 명쯤.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학교도 못 가고, 집도 없고,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저 아이들이 배울 거야."


"전쟁통에요?"

"전쟁통이니까."

나는 일어섰다. 보자기에서 책을 꺼냈다. 『한글 첫걸음』. 해방 후 만든 교재.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나를 봤다.

"얘들아."

아이들이 눈을 깜빡였다.


"한글 배우고 싶은 사람?"

침묵. 아이들이 서로 쳐다봤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여덟 살쯤. 얼굴이 까맣게 그을렸다.

"저요."


"이름이 뭐니?"

"...모르겠어요."

"응?"


"엄마가... 폭격에 돌아가셨어요. 제 이름을 말해준 사람이 없어요."

가슴이 먹먹했다. 여덟 살 아이가 자기 이름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이름을 지어주자. 배우면서."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폭격 속의 수업

수업이 시작됐다.

교실이 아니라 운동장 구석. 칠판이 아니라 땅바닥. 분필이 아니라 나뭇가지.

하지만 배웠다.


"ㄱ, ㄴ, ㄷ..."

나는 땅에 글자를 그었다. 아이들이 따라 그었다.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이제 이름을 지어보자. 너는 뭐가 좋아?"


이름 없는 아이가 생각했다.

"하늘요."

"하늘?"


"엄마가... 폭격당하기 전에 말했어요. 하늘이 참 예쁘다고..."

나는 땅에 썼다.

"하늘. 이렇게 쓰는 거야."


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제 이름이에요?"

"그래. 네 이름이야. 하늘."


아이가 땅에 따라 썼다. ㅎ, ㅏ, ㄴ, ㅡ, ㄹ. 서툴렀다. 하지만 또렷했다.

"하늘... 저 하늘이에요..."

아이가 웃었다. 전쟁 통에, 폭격 소리 속에서도, 웃었다.


쾅!

멀리서 포성이 들렸다. 아이들이 움찔했다.

"괜찮아. 멀어. 계속하자."


"ㄹ, ㅁ, ㅂ..."

수업이 계속됐다. 포성이 배경음악처럼 울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중했다. 한글이, 자기 이름이, 전쟁의 공포보다 강했다.


붉은 별

8월, 대전 함락.

북한군이 다시 왔다. 탱크가 거리를 밀고 들어왔다. 붉은 별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였다.

"다시 피난이다!"


사람들이 짐을 쌌다.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나는 보자기를 챙겼다. 리준혁이 달려왔다.

"선생님, 북한군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날?"

"조선어학회 사람들을 색출하고 있어요. '부르주아 반동 언어학자'라고..."

"말도 안 돼. 한글은 인민의 글자야."


"하지만 그들은 소련식 표기법을 강요합니다. 우리 한글이 아니라..."

쾅!

가까운 총성. 비명이 들렸다.


"지금 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하늘이가 내 손을 잡았다.

"선생님, 우리도 가요."


열두 명의 아이들. 부모 없는, 집 없는, 한글만 배운.

"그래. 함께 가자."

우리는 뛰었다. 대전 거리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북한군이 쫓아오고 있었다.


부산

9월, 부산.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바다. 한반도의 끝.

임시 천막을 쳤다. 판자촌이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피난민이 넘쳐났다.


"선생님."

리준혁이 지도를 펼쳤다.

"서울이 빨갛습니다. 평양도, 원산도. 한반도 대부분이..."


"부산만 남았군."

"네. 이곳마저 무너지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끝이었다. 바다에 빠지거나, 북한군에게 잡히거나.


"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

나는 보자기를 열었다. 책들이 거기 있었다. 서울부터 대전까지, 대전부터 부산까지 함께 온 한글.

"계속 가르칠 거야. 여기서."


"부산에서요?"

"어디서든. 한반도 어디든."

하늘이가 천막 밖에서 소리쳤다.


"선생님! 사람들이 모였어요!"

밖으로 나갔다. 판자촌 골목에 사람들이 있었다. 스무 명쯤. 어른, 아이, 노인.

한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서른쯤. 아이를 업고 있었다.


"선생님... 소문 들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한글을 가르치신다고..."

"그렇소."

"저...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에게도 가르치고 싶어요."


다른 사람도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북쪽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때 제대로 된 우리말을 쓰고 싶어요."

또 다른 사람.


"제 아버지가 평양에 계십니다. 편지를 쓰고 싶은데, 글을 몰라서..."

나는 그들을 봤다. 전쟁에 지친 얼굴들. 하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1446년 광화문에서 봤던 그 눈빛. 1911년 지하 학교에서 봤던 그 눈빛. 1945년 해방의 거리에서 봤던 그 눈빛.


한글을 향한 갈망.

"좋소. 내일부터 시작합시다."

사람들이 미소 지었다. 포성이 멀리서 들렸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글은 여기 있었으니까. 이 사람들 마음속에.


편지

그날 밤, 천막 안.

리준혁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북쪽으로 보낼 편지. 밀사를 통해 38선을 넘을 편지.

"뭐 쓰고 있어?"


"가족에게요. 평양에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한글을 지키라고. 북쪽에서도 우리 한글을 지키라고."


리준혁의 손이 떨렸다.

"선생님...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이 전쟁을..."

"이겨야지."


"만약... 만약 진다면?"

"지지 않아."

"하지만 만약..."


나는 리준혁의 어깨를 잡았다.

"준혁아, 한글은 이미 이겼어."

"네?"


"1446년 태어났지. 1911년 금지됐어. 하지만 살아남았지. 1945년 부활했어. 지금 전쟁이야. 하지만 여기 봐."

밖을 가리켰다. 판자촌 사이로 불빛이 보였다. 누군가 한글을 공부하고 있었다. 전쟁통에도.


"저게 이긴 거야. 한글은 이미 이겼어. 사람들 마음속에서."

리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맺혔다.

"계속 쓰라고. 네 가족에게. 한글로."


"네, 선생님."

밤이 깊었다. 부산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포성이 울렸다. 하지만 천막 안에서는 연필 소리가 더 컸다.


한글을 쓰는 소리.

그 소리가 전쟁을 이길 것이다.

새벽, 공습경보가 울렸다. 사람들이 방공호로 뛰었다. 하지만 리준혁은 편지를 다 쓸 때까지 앉아 있었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그리고 나는 봤다. 그의 뒷모습에서, 1446년 집현전 학사들의 모습을. 1911년 지하 학교 학생들의 모습을. 다른 시대, 같은 마음. 한글을 지키려는.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준혁은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다 썼습니다." 폭음 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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