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근대의 시련
1969년, 서울 을지로.
땅땅땅!
망치 소리가 울렸다. 공장이 돌아갔다. 기계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박철호였다. 마흔다섯 살, 기계공학자. 빛으로 흩어졌다가 이 시대에 재구성됐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1446년 광화문의 기억을. 1945년 해방의 기억을.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글을 기계에 담아야 했다.
작업대 위에 타자기가 있었다. 영문 타자기. 스미스코로나 제품. 26개의 키. A부터 Z까지. 깔끔했다. 단순했다.
하지만 한글은 달랐다.
"선생님."
조수 김영수가 다가왔다. 스물다섯 살 청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갓 졸업했다.
"영문 타자기는 26개 키로 되는데, 한글은..."
"24개 자음, 21개 모음. 45개야."
"그것만이 아닙니다. 조합이..."
"그래. 조합이 문제지."
영문은 단순했다. A 누르면 A가 나온다. B 누르면 B가 나온다.
하지만 한글은? ㄱ과 ㅏ를 조합해야 '가'가 나온다. ㄱ과 ㅏ와 ㄴ을 조합해야 '간'이 나온다.
"이론상 가능한 조합이 11,172개입니다."
영수가 말했다.
"11,172개 글자를 어떻게 타자기에 넣습니까?"
나는 작업대의 한글 타자기 시제품을 봤다. 6개월간 만든 것. 하지만 실패작이었다. 키가 너무 많았다. 200개가 넘었다. 무거웠다. 느렸다. 고장이 잦았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
"또요?"
"그래. 또."
영수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한글이 기계와 만나지 못하면, 산업화 시대에 뒤처질 것이다.
1446년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손으로 썼다. 1945년 해방됐을 때도 손으로 썼다.
하지만 지금은 1969년. 세계는 기계로 움직였다.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했다. 한글도 기계와 만나야 했다.
사흘 후, 공장에 외국인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서툰 한국어였다. 미국인이었다. 서른쯤.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 엔지니어.
"저는 제임스 존슨입니다. 한글 타자기 개발을 돕겠습니다."
"왜 도와주려고 하시죠?"
"한국 시장이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타자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를 봤다. 장사꾼의 눈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기술만 얻을 수 있다면.
"영문 타자기 설계도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존슨이 도면을 펼쳤다. 정교했다. 레버 구조, 스프링 배치, 리본 메커니즘. 100년간 발전한 기술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존슨이 한글 차트를 봤다.
"한글은... 복잡하군요."
"그래서 우리가 6개월째 고민하는 겁니다."
"음..."
존슨이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말했다.
"세 벌식은 어떻습니까?"
"세 벌식?"
"초성, 중성, 종성을 분리하는 겁니다."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ㄱ + ㅏ + ㄴ → 간 (초성) (중성) (종성)
"초성 키 14개, 중성 키 21개, 종성 키 14개. 총 49개 키면 됩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200개가 아니라 49개!
"하지만..."
영수가 말했다.
"타이핑이 느리지 않을까요? 세 번 눌러야 한 글자니까."
"빠른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훈련하면 됩니다."
"훈련..."
나는 칠판의 그림을 봤다. 세 벌식. 자모를 분해하는 것. 1446년 세종이 만든 바로 그 원리.
"해보죠."
두 달 후, 첫 시제품이 나왔다.
금속으로 만든 타자기. 49개의 키. 초성, 중성, 종성이 분리돼 있었다.
나는 종이를 넣었다. 손가락을 키 위에 올렸다.
땅! 땅! 땅!
ㄱ. ㅏ. ㄴ.
종이에 '간'이 찍혔다.
"됩니다!"
영수가 소리쳤다.
계속 쳤다.
땅땅땅! 땅땅! 땅땅땅땅!
"한글 타자기가 완성됐습니다."
문장이 나왔다. 느렸다. 서툴렀다. 하지만 분명히 한글이었다. 기계가 한글을 쓰고 있었다.
존슨이 박수쳤다.
"성공입니다! 이제 양산하면..."
"잠깐."
나는 타자를 멈췄다.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요?"
"너무 복잡해요. 초성 위치, 중성 위치, 종성 위치를 외워야 합니다. 일반인이 쓰기 어려워요."
영수가 타자기를 봤다.
"맞습니다. 키 배치가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
"또요?"
"그래. 또."
존슨이 당황했다.
"하지만 이미 작동합니다!"
"작동하는 것과 쓰기 좋은 건 다릅니다."
나는 타자기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키를 떼어냈다. 레버를 풀었다.
"한글은... 한국 사람들이 쓰는 겁니다. 엔지니어만 쓸 수 있으면 소용없어요."
영수가 웃었다.
"선생님은 완벽주의자이십니다."
"완벽이 아니라 사랑이야."
"네?"
"한글에 대한 사랑. 1446년 세종이 그랬듯이."
석 달 후, 네 번째 시제품.
키 배치를 완전히 바꿨다. 자주 쓰는 자음을 가운데에. 모음을 오른쪽에. 받침을 왼쪽에.
공장 직원들을 불렀다. 스무 명.
"테스트해 주세요. 편한지 불편한지."
직원들이 타자를 쳤다. 어떤 사람은 빨랐다. 어떤 사람은 느렸다. 어떤 사람은 자꾸 틀렸다.
"ㅐ와 ㅔ 위치가 헷갈려요."
한 직원이 말했다.
"종성 ㄹ이 너무 멀어요."
다른 직원이 말했다.
의견을 모았다. 다시 키 배치를 바꿨다. 일주일 후 다시 테스트.
또 의견. 또 수정. 또 테스트.
다섯 번째 시제품.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존슨이 지쳤다.
"박 선생님, 영문 타자기는 100년 걸렸습니다. 우리는 1년밖에 안 했어요."
"그럼 99년을 더 해야겠네요."
"농담이시죠?"
"아닙니다."
하지만 나도 지쳐가고 있었다. 1446년 집현전에서 세종과 신유가 한글을 만들 때도 이랬을 것이다. 수십 번, 수백 번 고치면서.
그날 밤, 공장에 혼자 남았다.
타자기를 보며 생각했다.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었나? 백성이 쉽게 쓰라고. 그게 전부였다.
그럼 나도 같은 이유로 타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쉽게 쓸 수 있도록.
1970년 5월, 서울 상공회의소.
"대한민국 기계산업박람회"
한글 타자기를 출품했다. 아홉 번째 시제품. 키 배치를 네 번 더 바꿨다. 디자인을 개선했다. 무게를 줄였다.
부스에 타자기를 놓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게 한글 타자기입니까?"
중년 남자가 물었다. 신문기자 같았다.
"네. 직접 해보세요."
그가 앉았다. 키를 봤다. 망설였다. 그리고 쳤다.
땅. 땅땅. 땅땅땅.
"대... 한... 민... 국..."
글자가 나왔다. 느렸다. 하지만 썼다.
"됩니다! 한글이 됩니다!"
사람들이 박수쳤다. 줄이 섰다. 모두 타자기를 쳐보고 싶어 했다.
한 여학생이 왔다. 스무 살쯤.
"이거 배우기 어려워요?"
"하루면 기본은 배워요. 한 달이면 능숙해져요."
"정말요? 영문 타자기는 석 달 걸린다던데..."
"한글은 과학적이니까요. 배우기 쉬워요."
여학생이 타자를 쳤다. 서툴렀지만 글자가 나왔다.
"신기해요... 기계가 한글을 쓰네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1446년 광화문, 백성들이 처음 한글을 배울 때의 그 감격이 지금 여기 있었다.
한글이 손에서 기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석 달 후, 경기도 부천.
공장이 세워졌다. 한글 타자기 생산 라인. 하루 100대씩 만들었다.
주문이 쏟아졌다. 신문사, 출판사, 관공서, 학교. 모두 한글 타자기를 원했다.
나는 생산 라인을 보며 섰다. 기계가 돌아갔다. 타자기가 조립됐다. 포장됐다. 트럭에 실렸다.
영수가 옆에 섰다.
"선생님, 해냈습니다."
"우리가 아니야. 한글이 해낸 거지."
"무슨 말씀이세요?"
"한글이 과학적이니까 기계화가 가능했어. 만약 한자였으면?"
"...불가능했겠죠. 수만 개 글자를..."
"그래. 1446년 세종이 이미 준비해 놨어. 한글이 기계 시대를 만날 수 있도록."
컨베이어 벨트 위로 타자기가 지나갔다. 반짝였다. 금속이 빛났다.
"선생님."
"응."
"다음엔 뭘 하실 겁니까?"
"다음?"
"타자기 다음이요. 세상은 계속 변하잖아요."
나는 창밖을 봤다. 서울이 보였다.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다. 도로가 뚫렸다. 자동차가 달렸다.
산업화. 한국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글이 있었다. 손으로 쓰던 글자가 이제 기계로 쓰였다.
"다음엔... 더 빠른 기계가 올 거야."
"더 빠른 타자기요?"
"아니. 타자기가 아니야. 전기로 움직이는... 뭔가 새로운 기계."
"그게 뭔데요?"
"아직 몰라. 하지만 올 거야. 그리고 한글은 그 기계와도 만날 거야."
영수가 웃었다.
"선생님은 미래를 보시는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1446년부터 이곳까지 건너온 내가. 다음은 디지털이 올 것이라는 것을. 컴퓨터가 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한글은 그것도 이겨낼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한글은 과학이니까. 체계니까. 완벽한 설계니까.
세종이 523년 전에 이미 준비해 놨으니까.
그날 저녁, 첫 번째 타자기가 신문사로 배달됐다. 기자가 받아 들었다. 무거웠다. 하지만 손에 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제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손으로 쓰던 시대가 끝나고, 기계로 쓰는 시대가 온다는 것을. 그는 종이를 넣었다. 손가락을 키에 올렸다. 그리고 쳤다. 땅땅땅! "대한민국" 글자가 찍혔다. 기계의 소리와 함께. 그 소리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한글이 산업과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