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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담는 자(소설)

5장 근대의 시련

by 한시을

22화: 해방과 한글의 부활


12,410일

1945년 8월 14일, 종로서 지하 감옥.

나는 벽에 새긴 선을 세었다.12,410일. 1911년부터 1945년까지. 34년.

벽은 흠집투성이였다. 손톱으로, 돌멩이로, 피로 새긴 선들. 매일 하나씩. 하루하루를 잊지 않기 위해.


영숙은 돌아오지 않았다.

1911년 그날 이후, 34년. 나는 그녀가 어떻게 됐는지 몰랐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 있는지. 헌병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영숙아..."

나는 매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둠 속에서, 홀로.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한, 그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하지만 군화 소리가 아니었다. 뛰는 소리였다. 급한 소리였다.

뭔가... 달랐다.


그날

간수가 달려왔다. 숨이 차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야... 야스다!"

일본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34년간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석현이 아니라 야스다. 조선 이름을 지우려 했다.


"뭐요?"

"일본이... 일본이 항복했소!"

심장이 멈췄다.


"뭐라고?"

"천황 폐하가 항복 방송을 하셨소. 조선은... 조선은 이제..."

간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이 떨렸다. 열쇠 꾸러미를 쥔 손이.


"열어요."

내가 말했다.

"뭐?"


"문을 열라고요."

간수가 나를 봤다. 34년간 나를 가둔 그 눈이, 이제는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열어요. 지금 당장."


열쇠가 자물쇠에 꽂혔다. 철컥. 문이 열렸다.

34년 만에.

나는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34년간 제대로 걷지 못했다. 하지만 걸었다. 한 걸음씩. 문밖으로.


복도가 보였다. 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34년간 어둠만 봤으니까.

"영숙..."

나는 복도를 걸었다. 다른 감방들이 보였다. 모두 비어 있었다. 아니, 하나만 빼고.


맨 끝 감방.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뛰었다. 다리가 비틀거렸지만 뛰었다.

"영숙!"


하지만... 아니었다.

노인이 누워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얼굴이 주름투성이인.

잠깐.


"영... 숙?"

노인이 눈을 떴다. 흐린 눈. 하지만 그 눈을 나는 알았다. 34년 전, 촛불 아래서 빛나던 그 눈을.

"선생님...?"


목소리가 나왔다. 가늘고 떨리는. 하지만 그 목소리도 나는 알았다.

"영숙아!"

나는 그녀를 안았다. 뼈만 남은 몸이었다. 34년의 고문이, 34년의 감옥이, 스물한 살의 여성을 쉰다섯 살의 노인으로 만들었다.


"선생님... 저예요... 영숙이..."

그녀가 울었다. 나도 울었다. 34년 만에 다시. 수많은 시간을 건너오면서도, 이렇게 우는 건 두 번째였다.

"미안해... 미안해... 너를 지키지 못했어..."


"아니에요... 선생님..."

영숙이 내 손을 잡았다. 앙상한 손이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우리... 이겼어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겼어."

"한글은... 살았나요?"


"살았어."

영숙이 미소 지었다. 주름진 얼굴에, 빠진 이빨 사이로. 하지만 그 미소는 34년 전 그때처럼 아름다웠다.

"다행이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손에 힘이 빠졌다.

"영숙아!"

"...피곤해요... 조금만... 자도 될까요..."


"잠들지 마! 지금 나가야 해! 햇빛을 봐야 해!"

"네... 햇빛... 34년 만에..."

나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웠다.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올랐다. 햇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광복

밖은 난리였다.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태극기가 나부꼈다. 34년간 숨겨졌던 깃발이 이제 온 거리를 덮었다.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울렸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춤췄다. 누군가는 땅에 엎드려 절했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영숙을 안고 그 한가운데 섰다.

"영숙아, 봐. 우리가 이겼어."


하지만 영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이 얕았다.

"영숙아!"

"선생님..."


가느다란 목소리.

"조선말... 들려요... 다들... 조선말을..."

그랬다. 사람들이 조선말로 외치고 있었다. 34년간 금지됐던 말을. 지하에서만 속삭이던 말을.


"우리... 해냈어요..."

"그래, 해냈어."

"선생님... 이제... 가르치세요... 많이... 가르치세요..."


"영숙아, 너도 가르쳐야지. 함께."

"아니에요... 전... 피곤해요..."

"잠들지 마!"


하지만 그녀의 눈이 감겼다. 손이 떨어졌다. 숨이... 멈췄다.

"영숙아! 영숙아!"

나는 소리쳤다. 사람들이 돌아봤다. 만세 소리가 잠시 멈췄다.


영숙이 내 품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평화로운 얼굴로. 34년 만에 처음으로, 고통 없는 얼굴로.

그녀는... 갔다.

하늘이 너무 푸르렀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사람들의 만세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영숙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유를 확인하며, 떠났다.


첫 수업

한 달 후, 광화문.

조선어학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34년간 폐쇄됐던 곳. 일본이 불태우고 부쉈던 곳.

나는 그곳에 섰다. 새로 만든 현판이 걸려 있었다.


"조선어학회"

한글로 쓴 간판. 34년 만에 대낮에 걸린.

"선생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스무 살쯤.

"누구시오?"

"김미래라고 합니다. 선생님께 한글을 배우고 싶어서요."


김미래. 34년 전 영숙과 같은 나이. 같은 눈빛.

"왜 배우고 싶소?"

"우리말을 제대로 쓰고 싶어서요. 34년간 일본어만 배웠어요. 조선어는 집에서 몰래 배웠고요. 하지만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나는 그녀를 봤다. 영숙이 겹쳐 보였다. 34년 전 그 밤, 촛불 아래서 한글을 배우고 싶다던 그 소녀가.

"좋소. 들어오시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이 있었다. 칠판이, 책상이, 의자가. 모두 새것이었다. 일본이 부순 것을 다시 만든.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교실에 오십 명이 앉아 있었다. 젊은이, 노인, 여성, 남성.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저는... 74년을 살았습니다. 평생 일본어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죽기 전에, 우리말을 제대로 쓰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도 손을 들었다.


"저는 제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우리말로 동화를 읽어주고 싶어요."

또 다른 사람.

"저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조선말로."


나는 칠판을 봤다. 새 칠판. 분필을 들었다. 34년 만에 대낮에, 떳떳하게.

"여러분."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오늘부터 우리는 한글을 배웁니다. 34년간 금지됐던, 하지만 죽지 않은 우리 글자를."

분필이 칠판에 닿았다.

ㄱ, ㄴ, ㄷ...


28자가 떳떳하게 쓰였다. 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졌다. 글자를 비췄다.

"이것이 우리 글자입니다. 1446년, 세종대왕이 만든. 1911년, 일본이 금지한. 하지만 1945년,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봤다. 누군가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는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이름을, 우리 생각을, 우리 꿈을."

교실이 조용했다. 하지만 그 정적은 34년 전 지하 학교의 두려운 정적이 아니었다. 희망의 정적이었다.

수업이 시작됐다. 나는 가르쳤다. 사람들은 배웠다. 햇빛 아래서, 자유롭게.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영숙아, 보고 있니? 우리가 해냈어. 너의 희생이, 34년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어.

한글은 살아있어. 너의 꿈대로.


그림자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창가에 섰다.

광화문 거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오갔다. 자유롭게. 조선말로 이야기하며.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거리 곳곳에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군복 입은 사람들. 하지만 일본군이 아니었다. 미군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쪽에는... 소련군이 보였다.

38선.


해방의 기쁨 속에서, 새로운 분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내 옆에 섰다. 젊은 남자였다. 서른쯤.

"선생님, 저는 리준혁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오?"

"선생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리준혁이 목소리를 낮췄다.

"북쪽에도 한글을 보급해야 합니다. 소련이 다른 것을 강요하기 전에."

나는 그를 봤다. 눈빛이 진지했다.


"위험한 일이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한글은 남북이 따로 없습니다."

그랬다. 한글은 남북이 따로 없었다. 1446년 세종이 꿈꾼 것은 모든 백성이었다. 남쪽도, 북쪽도.

"생각해 보겠소."


리준혁이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나는 다시 창밖을 봤다. 해방의 기쁨이 거리를 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로, 새로운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34년의 일제 치하가 끝났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오고 있었다.

분단. 전쟁. 그리고 또다시 한글을 지켜야 하는 싸움.


나는 칠판에 쓴 글자를 봤다. ㄱ, ㄴ, ㄷ...

1446년부터 시작된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할 것이다. 영숙이 남긴 그 약속을 지키며.


"많이 가르치세요."

밤이 왔다. 광화문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남아서 한글을 공부하고 있었다. 34년간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이.


나는 그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영숙이 본다면 기뻐할 것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알았다. 북쪽에서 다른 불빛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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