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현대의 폭발
1989년,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띠링!
컴퓨터가 부팅됐다. 모니터에 커서가 깜빡였다. 초록색 글자. MS-DOS 화면.
나는 이한빛이었다. 서른두 살, 프로그래머. 빛으로 분해됐다가 이 시대에 재구성됐을 때, 나는 알았다. 세종의 훈민정음을. 타자기의 땅땅 소리를. 그리고 지금 내가 풀어야 할 숙제를.
한글을 디지털로 만드는 것.
키보드를 두드렸다.
딱. 딱딱. 딱딱딱.
"한글 테스트"
입력했다. 엔터.
화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 ????
물음표였다. 한글이 깨졌다.
"제기랄."
얼굴을 찌푸렸다. 사흘째 같은 문제였다. 한글을 입력하면 깨졌다. 영문은 멀쩡한데 한글만 깨졌다.
"선배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수아, 스물여덟 살 신입 프로그래머.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
"또 깨졌어요?"
"그래."
"인코딩 문제일까요?"
"아마도."
나는 코드를 다시 봤다. 16진수 숫자들이 빼곡했다.
B0 A1 → 가 B0 A2 → 각 ...
"ASCII는 7비트야. 128개 문자. 영문 알파벳, 숫자, 기호 다 들어가."
"네."
"그런데 한글은 11,172개 조합이 가능해. 7비트로 어떻게 담아?"
"그래서 2바이트를 쓰는 거죠."
"맞아. 2바이트면 65,536개까지 가능해. 충분하지."
"그런데 왜 깨지죠?"
"표준이 없어서."
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준이요?"
"각 회사가 제멋대로 한글 코드를 만들어. 삼성은 삼성대로, 금성은 금성대로. 서로 호환이 안 돼."
"그럼..."
"삼성 컴퓨터로 쓴 한글 파일을, 금성 컴퓨터로 열면 깨져."
수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지금 한국 컴퓨터 산업의 현실이야."
다음 날, 회의실.
"한글 코드 표준화 회의"
팻말이 붙어 있었다. 스무 명쯤 모였다. 프로그래머, 언어학자, 정부 관계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박사가 발표했다.
"현재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조합형과 완성형."
프로젝터에 그림이 나타났다.
조합형: ㄱ(초성) + ㅏ(중성) + ㄴ(종성) = 간 → 실시간 조합 완성형: 가, 각, 간, 갇... → 미리 만들어진 글자 저장
"조합형은 자유롭습니다. 모든 조합 가능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물었다.
"처리 속도가 느립니다. 컴퓨터가 계산해야 하니까."
"완성형은?"
"빠릅니다. 이미 만들어진 글자니까. 하지만..."
"하지만?"
"2,350자만 지원합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2,350자? 그럼 나머지는?"
"못 씁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제 이름 '빛'도 못 쓴다는 얘기입니까?"
"네. 완성형 2,350자에 '빛'은 없습니다."
"말도 안 돼!"
한 언어학자가 소리쳤다.
"'꽃', '숲', '삶' 같은 일상 단어도 못 쓴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완성형 한계입니다."
회의실이 시끄러워졌다. 조합형을 주장하는 쪽과 완성형을 주장하는 쪽이 대립했다.
"조합형은 너무 느려!"
"완성형은 표현 못 하는 글자가 너무 많아!"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1446년 세종 때도 이랬을 것이다. 한글을 어떻게 만들까 논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결정했다. 백성을 위한 쪽으로.
지금도 그래야 한다. 사용자를 위한 쪽으로.
일주일 후, 사무실.
밤 11시. 나는 혼자 남았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딱딱딱딱딱!
코드를 짰다. 새로운 한글 엔진. 조합형과 완성형의 장점을 합친.
// 자주 쓰는 글자 → 완성형 (빠름) // 드문 글자 → 조합형 (정확) if (is_common_char(ch)) { return lookup_table[ch]; // 빠른 조회 } else { return compose(cho, jung, jong); // 실시간 조합 }
딱! 딱딱! 딱!
커피를 마셨다. 식었다. 신경 안 썼다. 계속 쳤다.
새벽 3시.
문이 열렸다. 수아였다.
"선배님, 아직도 안 주무세요?"
"응. 거의 다 됐어."
수아가 화면을 봤다. 코드가 빼곡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하이브리드 엔진. 조합형과 완성형을 섞는 거야."
"그게 가능해요?"
"모르지. 해봐야 알지."
수아가 옆자리에 앉았다.
"도와드릴게요."
"자도 되는데."
"저도 궁금해요. 한글이 컴퓨터와 만나는 거."
나는 그녀를 봤다. 스물여덟 살 젊은 프로그래머. 눈이 반짝였다. 1446년 집현전 학사들처럼.
"좋아. 함께하자."
우리는 코딩했다. 밤새. 커피를 마시며. 피자를 시켜 먹으며.
새벽 6시.
"됐다!"
수아가 소리쳤다.
"컴파일 성공!"
나는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화면에 입력창이 나타났다.
"한글 테스트"
입력했다. 엔터.
화면에 나타났다.
한글 테스트
깨지지 않았다! 멀쩡한 한글!
"됐어!"
나도 소리쳤다. 수아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손바닥이 따끔했다. 하지만 기뻤다.
"이제 '빛'도 써봐요!"
수아가 말했다.
입력했다. "빛"
화면에 나타났다. 완벽한 글자.
"선배님 이름이에요!"
수아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울의 아침. 디지털 시대의 새벽.
한글이 컴퓨터와 만난 순간이었다.
한 달 후, 전시회.
"서울 국제 컴퓨터 쇼 1989"
우리 회사 부스. "한글 워드프로세서 V1.0"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데모를 시작했다.
"한글을 입력해 보세요."
관객 한 명이 앞에 섰다. 중년 남자. 출판사 사장 같았다.
"뭐든지 써보세요. 깨지지 않습니다."
그가 입력했다.
"꽃, 숲, 빛, 삶, 몫..."
완성형에서 안 되던 글자들.
화면에 모두 나타났다. 깨지지 않고.
"오!"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이거 정말 됩니까?"
"네. 하이브리드 엔진입니다."
"가격은?"
"48만 원입니다."
"살게요!"
그 자리에서 주문했다. 다른 사람들도 줄을 섰다.
"나도!"
"우리 회사에 10개!"
수아가 옆에서 주문을 받았다. 손이 바빴다.
나는 모니터를 보며 생각했다.
1446년, 세종이 한글을 반포했을 때 이랬을 것이다. 백성들이 환호했을 것이다.
1969년, 타자기가 처음 나왔을 때도 이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1989년. 한글이 디지털과 만났다.
문자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었다.
두 달 후, 정부 청사.
"한글 코드 표준안 최종 심의"
우리 엔진이 국가 표준으로 채택됐다. KS C 5601-1989.
정보통신부 장관이 발표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모든 컴퓨터는 이 표준을 따릅니다."
박수가 터졌다.
나는 뒤에 앉아 있었다. 수아가 옆에 있었다.
"해냈어요, 선배님."
"우리가 아니야. 한글이 해낸 거지."
"또 그 말씀."
"정말이야. 한글이 과학적이니까 디지털화가 가능했어. 만약 한자였으면?"
"...불가능했겠죠."
"그래. 1446년 세종이 이미 준비해 놨어. 한글이 디지털 시대를 만날 수 있도록."
수아가 웃었다.
"선배님은 세종대왕 팬이시네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나는 팬이 아니라 목격자였다는 것을. 1446년 광화문에서 세종을 봤다는 것을.
"선배님."
"응."
"다음엔 뭘 하세요?"
"다음?"
"컴퓨터 다음이요. 세상은 또 변할 테니까."
창밖을 봤다. 서울이 보였다. 빌딩마다 컴퓨터가 있었다. 사무실마다 모니터가 있었다.
디지털 혁명. 한국이 달리고 있었다.
"다음엔... 네트워크가 올 거야."
"네트워크요?"
"컴퓨터끼리 연결되는 거. 전 세계가 하나로."
"그게 뭔데요?"
"아직 이름도 없어. 하지만 올 거야."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한글이 문제없을까요?"
"없을 거야."
"어떻게 아세요?"
"한글은 이미 준비됐으니까. 1446년에."
세종이 만든 한글. 28자.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그것이 타자기를 만났고, 컴퓨터를 만났고, 이제 네트워크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세계를 만날 것이다.
그날 밤, 사무실.
새 컴퓨터가 도착했다. 모뎀이 달려 있었다. 전화선에 연결했다.
삐뽀삐뽀삐뽀!
모뎀이 울었다. 연결됐다.
화면에 뜨는 글자:
PC통신 접속 완료 하이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첫 메시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한글로 인사드립니다."
엔터.
메시지가 전송됐다. 전화선을 타고, 서버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컴퓨터로.
1분 후, 답장이 왔다.
"한글 메시지 잘 받았습니다. 감동입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한글이 전선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빛의 속도로.
1446년, 세종이 꿈꿨던 것. 백성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
지금 이루어지고 있었다. 디지털로.
수아가 옆에서 봤다.
"신기해요. 글자가 날아가네요."
"그래.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야."
"뭐가 더 올까요?"
"모든 게 올 거야. 사진, 소리, 영상... 모든 게 디지털이 될 거고, 한글로 소통할 거야."
"세계가요?"
"그래. 세계가."
창밖을 봤다. 서울 야경이 반짝였다. 수백만 개의 불빛.
그리고 나는 알았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컴퓨터가 있고, 한글이 있고, 꿈이 있다는 것을.
1446년부터 시작된 여정이 이제 디지털 세계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날 밤, 대한민국 곳곳에서 한글 메시지가 오갔다. PC통신을 타고, 모뎀 소리를 타고. "삐뽀삐뽀" 연결음과 함께.
누군가는 친구에게, 누군가는 가족에게, 누군가는 낯선 이에게. 모두 한글로. 깨지지 않는 글자로. 그리고 그들은 몰랐다.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한글이 세계로 퍼져나가는 시작이라는 것을. 디지털 혁명이 한글을 날개 삼아 날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