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 네 분 어머니
박 노 빈
Ⅰ
한여름 새벽에 일어났다
어머니가 파를 써는 도마 소리
수수팥단지를 꼭 해달라고 다짐을 놓으면
여덟 마지기 궁한 살림에도
금방 쉬어 터질 그 떡을 생일이면 꼭 차려주셨다
무르팍이 성할 날 없는 아들을 위해
고향에서도 이사 와서도
학교 점심시간에 집으로 달려와 먹는 밥이 젤 맛있었다
나만 사랑받을 일이 생겼다
겨우내 감기가 계속되더니 폐렴이 되었다 낮에도 아랫목에 누워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하던 사학년 삼월
오남매 오분의 일로 만족해야 하는 전쟁에서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그때 먹어본 귀한 소내장 미역국
큰 병원을 찾아간 용인 김량장리
어머니 수양부모댁에서 처음 먹어본 소고기 장조림
기나긴 지옥을 지나자 혼자만의 천국이 열렸다
양지바른 곳 포실한 흙을 일궈 감자를 심고, 못자리에서 우렁을 잡던 때 빛나던 봄햇살의 생명력!
울도 담도 경계도 없어 밤늦도록 팔도 사투리가 악다구니로 싸우는 산동네에서
어머니는 상냥하고 친절하고 사교적이고 명랑한 오지라퍼가 되었다
그런 어머니를 고향에 묻고 온 우리는 믿기지 않아서 또 울음보를 풀었다
여동생이 서있는 중학교 운동장에서 어머니날에 자작시를 낭독했다
Ⅱ
할머니 기침 소리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에비오제와 요강 사탕이 늘 들어있던 할머니의 주머니
우리 동네 이웃 동네 잔칫날 제삿날 결혼식날 장례식날 회갑날 진갑날 사갑날에 우리 서울 친척들 6대째 이웃사촌 양씨네 친척들 머무는 날들과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설명절 머슴들도 모두 쉬는 대 명절에 또 며칠간 이어지던 보름달 밑 추석 명절에 수정산 절에 주은 동전으로 간신히 시주하고 누룽지 백설기 한가득 가져오시는 날에 일찌감치 미국 의사가 되어 큰절 하러 왔다는 진외가 진객들 인사를 큰집 아랫목에서 당당히 받으신 후에
고등학교 때 도시락 두 개를 먹고 집에 오는 한밤중
동네 어귀에 망부석처럼 꼭 나오셔서 나를 맞이해주신 할머니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고향엔 갈 수가 없었다 1분 1초라도
더 공부하는 게 할머니 소원이었으므로
Ⅲ
육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서른셋 꽃다운 나이에
노랑 치마저고리 입고 산동네 붉은 진흙뻘길을 개나리꽃처럼 찾아오신
새어머니
오줌싸개 중학생을 단 한번도 꾸중 않고
구 남매를 빨래하고 밥 먹이고 키워주신 분
허구헌날 이어진 아버지 술주정에서 날 구원해주신 분
산과 들을 다니며 땔감을 해오던 나와 어머니
아궁이 잉겅불이 고향처럼 따뜻했다
도둑놈처럼 발만 크다고 한탄하고 바느질이 제일 힘들다고 하시며
집 밖에서 활동하는 것을 더 즐겨하시던 분
- 아이구, 아버지!
밖에 모르는, 어머니를 일찍이 여의신 분
손이 어마어마하게 큰 분, 마음도 큰 분, 아쌀한 것을 좋아하고 이중성격을 싫어하신 분
가랑잎에 불 붙듯하는 화끈함을 좋아하신 분
이집 저집 딸라 이자를 바라고 돈을 빌려주지만, 채근하지 못 하는 일로 보시하신 분
한밤중에 산처럼 쌓인 빨래를 하며 하루에도 골백번 날 칭찬해 주신 분
-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만날 때마다 수백 번 되풀이하시며, 누구보다도 날 크게 위로해 주신 분
학교 문턱도 안 가보신
죄송합니다 온몸이 온통 자주색으로 변하던 다급한 때에 약으로 잠시 혈색을 되돌리고는 학생 시절의 가난한 내가 되어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식사를 병원 침대에서 맛나게 먹다니요? 평생 소원하신 면사포도 못 씌워드리고
지금 어떤 아가씨로 환생하셨나이까, 남정네들이 보는 순간, 모두 정신이 번쩍 날 만큼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나리라 노래부르시더니
Ⅳ
폐렴 든 날 어머니와 번갈아 업고
오릿길을 동행해 준 분
어머니보다 더 높은 등을 내밀어주신 분
항상 절간처럼 깨끗하게 부지런히 종손 집을 관리하신 분
서른에 홀로 되신 큰어머니와
고향에서 삼 년 사는 동안 겨우내 화롯불에서
바글바글 끓던 총각김치 청국장
맛있는 거무튀튀한 고추장도 원 없이 먹던 햇병아리 교사
밤마다 찐 밤을 먹어서 육십 킬로를 넘을 뻔한 행복 살
호박푸데기 찐빵 빈대떡 서로 특식을 겨루던 큰집과 작은 집
동차나 썰매 꼬챙이 만들기 선수였던 형의 특명으로
아슬아슬하게 까치발을 세워서 쥐도 새도 모르게
큰집에서 공구를 빌린다
동네 놀이 때면 장구채를 좌우로 치며 구성진 노랫가락을 멋드러지게 뽑으시던 큰어머니
감사합니다 제 결혼식날 친어머니 새어머니 대신 진짜 큰 어머니로서 자리를 지켜주셔서 그날만은 제 진짜 어머니가 되어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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