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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건축가 Nov 15. 2021

뜰집 이야기

제3화 스승의 마음

   며칠 후면 수능시험 날이다. 아침 클래식 음악방송에서 시험 감독을 가야 하는 선생님이 그 긴장감을 전했다. 그 선생님은 몇 년 전 시험감독을 하고 그날 밤에 위경련을 일으키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학생들이 실수 않고 시험을 잘 보고 자신이 그 시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애틋한 긴장감에 많은 교사들이 이런 일을 겪는다고도 했다. 

   월요일 아침, 화초에 물을 줘 보니 가을이 되어서 날씨가 건조해진 만큼 화초들의 흡수력이 커져서  주는 물의 양이 제법 늘었다. 학생들의 공부도 가을이면 좀 깊어가고 결실을 맺는가 싶다. 우리 건축과의 경우에도 각종 공모전이나 수업의 최종 성과를 표현해내는 과제전도 이 시기에 주로 있다. 그래서 이맘 때면 학생들은 물론 교수도 맘이 바쁘고 긴장된다. 지난해보단 좀 더 좋은 아이디어나 패널 표현이 되었으면... 싶어서 사실 안달도 좀 난다. 당연히 지도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잔소리나 채근(?)의 부담을 주게 된다.

   한가한 가을을 맞이한 나는 오늘 아침에야 생각이 든다. 나의 스승과 나 그리고 나의 제자들의 사이클을. 나의 지도교수님은 대단한 분이셨다. 그분의 세상은 민가 연구와 술이 다 차지한 듯했다. 새까만 얼굴에 비교적 마른 몸에 늘 증명사진 처음 찍는 사람처럼 굳은 표정으로 고개는 약간 아래로 한 채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계신다. 전통 주거 연구의 1세대로서 70년대 후반부터 매 주말마다 매 방학마다 전국을 답사 다니시고 후대를 위해 자료를 축적하셨던 분이다. 주민들의 간첩 신고로 경찰서를 몇 번이나 잡혀가셨던 에피소드로 가득한 그야말로 전설 같은 분이시다. 연구에 있어서 자신에게 철저히 성실과 고증의 완벽을 심으셨던 분이라 우리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을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대학원에서 매달 한 번 토요일은 최강의 긴장된 세미나 시간이 있었다. 연구실에는 이미 현직 교수님들이 세 분이나 계셨는데도 모두 그날의 세미나는 수능날 이상의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 연구 세미나 결과에 따라서 지도 교수님의 불호령과 냉소적 비난을 연구원 모두가 있는 곳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비교적 차수가 어릴 때는 연구의 깊이가 얕으니 좀 낫지만 고 차수로 올라갈수록 도살장에 끌려가는 맛이랄까. 그날 유독 지도교수님의 얼굴은 더 새까매져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청송의 그 작은 뜰집을 내게 소개하시던 지도교수님의 표정은 6살 개구쟁이가 그동안 숨겨둔 구슬 통을 동생에게 자랑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짓궂고 설레는 눈빛에 입꼬리를 씰룩이시며 뜰집 안으로 팔을 벌려 안내하는 어색한 제스처를 취하시기까지 하셨다. 물론 나는 책으로는 배워보지 못한 새롭지만 세세대대 전해져 온 우리의 뜰이라는 공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렇지만 현대 건축물의 설계 작업을 3년이나 하고 건축 비평을 하고자 했던 나로서는 뜰집 공간이 그냥 신기하고 재미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의 연구대상은 전통 민가로 바뀌었고 길고 긴 전통 주거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9할은 지도교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지도교수님은 한결같이 지휘관으로 군림하시면서 우리 모두를 대하셨고 연구 내용 외에는 대화나 질문조차 거의 없으셨다. 그 시절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가 시작된 시기이어서 형언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는데 한 번도 개인사로 인해 일정 조정이나 배려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연구 실원이 아닌 다른 사생활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공식 룰이었다. 처음엔 미어캣이 되어 눈치도 보았지만 그것으론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고 결국 부지런히 답사를 다니고 곰처럼 앉아서 도면들과 시름하며 연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부럽지 않게 게으르고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던 나였지만 엄청 센 지도교수님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공부가 어떤 것인지 조금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지도교수님이 제대로 맘껏 웃으시는 모습을 박사논문을 발표하고 난 직후에 보여주셨다. 한 번씩 웃으며 생각한다 이건 누가 이긴 싸움이었을까.

   아마도 지도교수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공부를 다 마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당신이 모든 것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유일한 것을 부정하는 것 같아서 감히 중간에 그만두겠다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덕분에 이를 악물고 내 인생에 어려운 산을 하나 넘는 큰 경험을 한 것이다. 

   대물림처럼.. 배운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우리 학생들에게 꽤 힘든 교수였던 것 같다. 학생들이 이룰 수 있는 최대치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 많이 다그치고 밀어붙인 면이 많았다. 덕분에 좋은 결과를 내기도 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어려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좀 더 편하고 재미있게 잘해줄 수 없었을까 후회도 해보지만 이런저런 변명도 떠오르며 지금도 정확한 판단은 잘 안된다. 무엇이 나은 길이고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스승의 마음은 성향에 따라 각 표현은 달라도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최대한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은 맞을 것이다. 괜히 우리 모두가 서로 마음의 뜻을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꼰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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