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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라떼 들어 보셨나요?

by 분홍소금



아들 딸과 함께 외식을 하러 가는 데 아들이 외삼촌하고 이모가 요즘에도 시골에 일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응, 봄에는 고사리 꺾으러 가고 여름에는 감나무 밭에 풀 베러 가지. 며칠 전에도 갔다 왔어.

-외삼촌하고 이모하고 시골 갈 때 지리산 반달곰 조심하라고 해.



고향 시골의 산 자락이 지리산과 연결되어 있어서 반달 곰의 이동 경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반달 곰의 개체 수가 많아져서 통제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곰들이 지리산 등성이를 타고 다니다가 시골 마을의 산에 불쑥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모 한테 호루라기 가지고 다니라고 하면 안될까?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먼저 알려주면 곰들이 알아서 도망갈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고 있어. 우리나라 반달곰은 북미 지역의 불 곰처럼 공격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곰은 새끼 보호 차원에서 위협을 하거나 공격을 할 수도 있대. 어른 곰은 호루라기 소리만 듣고도 알아서 도망가겠지만 곰생 경험이 없는 사춘기 곰들은 호기심에 공격할 수도 있잖아.

-곰이든, 사람이든 사춘기를 조심해야 되는 거네.


우리 형제 자매는 부모님이 돌아 가셨는데도 시골에 자주 가는 편이다. 오빠와 언니, 남동생은 최근에도 시골에 다녀왔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감나무 밭에 가서 그동안 무성해진 풀을 베느라 예초기 작업을 했다고 한다. 봄에 갔을 때도 작업이 만만치 않았는데 땡볕에서 일하느라 땀으로 샤워를 했을 것이다.



-언니야 00보고 조심하라고 해. 이제 00이도 늙었다아이가. 나이 들면 집중력도 떨어지고 금방 지치잖아. 자주 쉬고 물도 자주 마셔야 된다.

-내가 옆에서 잘 챙길게

-근데 이제 풀 좀 그만 베면 안되나? 가을에 시장에 가서 몇 개 사 먹고 말지 왜 한 여름에 그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어.

-별로 한 힘들다. 감을 먹는 게 아니라 고향을 먹는 거니까


내 말이 씨가 먹히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여전한 방식으로 그 밭에 가서 풀을 베고 감을 따고 밤을 줍고 내년 봄에는 고사리를 꺾고 쑥을 뜯을 것이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심지어 겨울이라도 시골에 가면 느긋하게 쉬는 법이 없다.


우리 동네는 강을 끼고 있는 데다가 생태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강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둘레 길을 산책이라도 한다면 심신의 힐링이 절로 될 터인데 그 사람들은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산골짝에 난 길을 따라 올라가 감나무 밭에서 풀을 베고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한다.



"감 밭 농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따지면 감을 한 트럭을 사고도 남겠네, 일 못해서 죽은 사람 있나, 확실히 일 병에 걸렸어, 불치병이다. 몸땡이에 흙 좀 그만 묻히고 좀 쉬다가 가면 안되나?"고 아무리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가성비 그런 것 모른다. 일하는 게 쉬는 거다. 일을 해야 힐링이 되는 걸 우째?" 하면서 연장부터 챙긴다.


봄이면 밭 근처에서 고사리와 산나물, 쑥을 뜯으며 "이건 나물이 아니라 약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 약을 먹었네, 먹을 게 없어서 먹은 것 중에 그래도 쑥 밥은 먹을 만 했제,우리 산에서 나는 고사리 향이 최고다. 이 쑥은 삶아서 냉동실에 넣고 1년 내내 먹어도 까딱 없다."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신나 할 수가 없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다. 내면 깊숙한 데서 솟아 오르는 즐거움과 행복을 주체하지 못한다. 산과 밭에서 뜯어온 각종 푸성귀와 나물거리로 즉석에서 음식을 만들어 양 껏 먹고 큰 소리로 떠들며 마음껏 웃는다.


-언냐, 농자 천하지 대본이 아니라, 농사는 천하에 해서는 안될 몹쓸 일처럼 징글 징글해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는 고향의 밭 한 뙈기에 왜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

-고향은 배신하지 않잖아. 고향은 엄마 아버지 대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지켜봐 주는 것 같아서 좋은 것 아닐까?


최근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 <건강하다>는 가족을 두었다면 자신의 아픔을 숨겼을 수 있고 이를 조금이라도 느끼는 데 죄책감을 느꼈을 수 있다. 부끄러워 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른다. 내 가족은 아주 잘 지내. 그런데 내 기분은 왜 이렇게 나쁘지? 역기능 가정을 둔 것도 아닌데, 나는 뭐가 문제일까?


우리 집은 남들이 보기에도 역기능 가정이었다. 술꾼인 아버지와 우울한 엄마 밑에서 성장 과정마다 필요한 돌봄과 사랑, 지지와 존중과 인정, 격려와 칭찬을 받지 못했다.


어떤 교육학, 심리학이 복잡 미묘한 인간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그럼에도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제시한 인간의 욕구 5단계에 따라 나와 형제자매에게 있을 법한 마음의 빈자리의 실체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부모님은 매슬로의 5가지 욕구 중, 1단계인 생리적 욕구 즉 의식주 해결이 지상 과제였으므로 우리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님과 같은 마음이었다. 농사를 걱정했고, 보살핌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어른들의 고생을 덜어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가난과 장날이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 보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전은 커녕 불안불안한 날을 보낼 때가 많았다. 2단계인 안전에 대한 욕구도 구멍이 난 셈이었다.


3단계인 사회적 욕구(소속감과 애정의 욕구)에 대한 실상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의견이나 질문은 바쁘다는 이유로 묵살 되었고. 좋고 싫음의 감정 표현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지지 받고 수용 받지 못하는 감정은 억눌렸고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니 좋고 싫은 것조차 점점 희미해졌다. 상위 욕구인 4단계 존경의 욕구, 5단계 자아 실현의 욕구는 말해 무엇하리.


우리의 결핍을 채우려고 고향에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가지는 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버지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머리와 가슴에서 이해했다고 해서 결핍 자체가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 법이니까.


우리는 아직도 아니, 이후로도 오랫동안 결핍이 불러온 자기 연민과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연민은 피해 의식의 다른 이름으로 사소한 갈등과 의견 차이에도 폭력과 분노와 화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들어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한다. 나도 물론이고 우리 형제들도 연민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병적인 열심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인정에 대한 목마름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심신이 지친 우리에게 고향은 우리를 무장 해제 시키며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방어 기재와 인격의 가면을 내려놓고 잠시 쉼을 얻었던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을까? 따라서 완벽한 가정도 완벽한 부모도 없다. 고향에 가지 않아도 결핍이 불러오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해방되었으면 좋겠다.


잠시의 쉼이 아닌 지속 가능한 해방의 지름길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일 테다.


나는 인정한다.

나는 욕구가 있었으며 불가항력 적인 나쁜 환경으로 인해 내 욕구는 묵살 되었다. 결핍과 연민과 피해의식이 불러온 부정적인 감정이 내 안에서 언제든지 급 발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은 연약하고 언제든지 실수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우리의 짐을 깨뜨릴 수 있다. 오래된 무거운 짐을 깨뜨려야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밝음과 온순함과 자유로움, 평안함을 회복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나는 부모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부모님은 최선을 다했고 수고했고 견뎌냈다. 부모님들이 보여주신 생존을 위한 수고 자체가 우리를 향한 최고의 사랑의 언어였으며 존중이었으며 그분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도 물론 잘 살아 냈다. 무척 애썼으며 지금도 애쓰고 있고 앞으로도 애쓸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끝으로 새로운 라떼를 외치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나와 우리 형제 자매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욕도 가끔 하면서.


-라떼는 말이야 주위에 공부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 공부를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걸까? 공부 좀 안 하면 안되겠니?

-어머, 너 그,치마 참 잘 어울린다. 라떼는 말이야, 짧은 치마가 없어서 못 입었어. 더 짧아도 예쁠 것 같은데.


비난인지 칭찬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욕도 슬쩍 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재밌는 이모티콘이 있었던 거야? 너 이제 보니 아주 설탕 같은 녀석이구나!

-아니, 이렇게 가성비 좋은 것을 인터넷에서 샀다구, 야, 이 소금 같은 녀석아, 너는 왜 하는 짓거리 마다 내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일을 척척 하는 거야?(너무 오글거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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