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by 솜)오빠는 최근에 오빠의 삶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예 작가로서 모임에 가서 붓글씨도 쓰고 난도 치고 텃밭도 가꾸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 오빠의 팍스 로마나 시대라고나 할까.
대단한 재력가는 아니지만 일찍이 독립하여 혼자 힘으로 일궈냈으니 오빠의 성취를 자수성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오빠가 가끔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
"너는 우리 집 쪽을 향해서 날마다 절해야 된다."
오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를 업어서 키웠다고 했다. 보통은 누나나 언니가 동생들을 돌보았는데 나는 바로 위에 언니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서 오빠 차지가 된 것이었다. (대신 언니는 남동생을 주로 돌봄)한창 뛰어놀 나이에 동생인 나를 업고 다녀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고 성가셨을까.
엄마가 우리 집 일을 할 때는 시간 조절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그러나 품앗이로 남의 일을 하러 갔을 때는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특히 모내기 철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새참 시간과 점심시간에 맞춰서 나를 업고 엄마한테 가야 하고 엄마가 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온종일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엄마가 젖을 먹이고 나서 보니 오빠가 사라지고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골짜기가 떠나가도록 오빠 이름을 불렀다. 엄마는 화가 나고 애가 탔지만 뒤늦게 울면서 나타난 아들을 보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겨우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오빠는 장남으로서 가난으로 인한 시련을 훨씬 많이 오래 겪어야 했다. (고향 이야기의 산 증인으로 고증을 해주고 있음)
농사철이 되면 엄마와 아버지는 낮에는 남의 일을 했다. 남의 집 품을 열심히 팔아 품삯이라도 받아야 그나마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 집 농사는 새벽이나 저녁에 할 수 밖에 없었다. 히붐할 때 논에 가서 벼를 벤 후 낮에 품을 팔고 와서 저녁이 다 되어 다시 우리 논에 갔다.
논에 가서 적당하게 건조 된 나락을 묶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골짜기에 있는 논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협소한 데다가 바위 틈을 지나가야 했고 거기에다 길 군데군데에 돌부리가 박혀 있었다. 아버지는 볏단을 지게에 지고 엄마는 머리에 이었다. 오빠는 맨 앞에서 오빠 몸에 맞춘 작은 지게에 볏단을 얹어서 지고 길을 밝히기 위해 횃불을 들었다.
사실 볏단을 이고 지고 마당까지 운반해 와서 타작을 해 봤자, 소출은 보잘 것 없었다. 벼의 품종 개량도 없는 데다가 지금처럼 농약이나 비료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거기다 자연 재해는 기본으로 따라 다녔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 가뭄이 들지 않으면 벼 이삭이 다 팼는데 태풍이 와서 낟알이 제대로 여물지 못했다.
아니면 벼 멸구 같은 병충해가 들어 농사를 망쳐 버렸다. 풍년이 들어 제대로 된 수확을 해도 시원찮은데. 적은 소출로 보릿 고개에 장려 내어 먹은 곡식까지 갚아야 했다. 봄에 빌려온 한 가마를 가을에 두 가마로 갚아 주고 나면 그 해 수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빈곤의 악순환의 굴레 속에서 헤어 날 길은 요원해 보였다.
밤에는 횃불을 들고 부모님과 함께 나락을 져 나르던 오빠는 사실은 학교에서 전교 회장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등생이었고 각종 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는 달리기 선수이기도 했다. 오빠와 같은 반 언니들이 언니와 내가 지나가면
-너거 오빠는 언제 공부 하노?
하고 물었다. 어떤 날은 선생님들이 오빠 이야기를 하며 수군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오빠가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반짝하고 잘 나가던 시절도 끝이 났다. 지금이야 중학교는 의무 교육이지만 그때는 인근 도시의 중학교를 들어가려면 시험을 치던 시절이었다. 오빠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어이없게도 학비가 없어서 진학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로 우리 식구들은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14살 소년은 이제 전업 농부가 되었다. 오 이럴 수가.
14살, 전업 농부의 생활처럼 지루하고 막막하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뭐 어쩔 수가 없었어. 살던 대로 살 수 밖에. 농사일 말고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오빠는 아버지처럼 일찍 일어나 꼴을 베오고 나서 아침 밥을 먹고 모가 자라는 논에 논을 매러 갔다.
-논 매기 진짜 힘들어 보였어요. 논 매고 와서 점심 먹을 때, 아버지하고 오빠 발목 근처에 거머리가 붙어 있었던 게 기억나요.
-모내기도 힘들지만 논 매기는 더 힘들어.
-그때는 장화나 장갑도 없었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노? 맨발로 들어가 맨손으로 논 바닥을 휘저었지.
-모를 심고 나서 추수할 때까지 몇 번 정도 매는 거에요?
-기본으로 3번은 매지, 초 벌, 두 벌, 세 벌
-14살이면 아직 아이인데, 하루 종일 어떻게 그런 중 노동을 할 수가 있었는지 몰겠어요?
-초 벌은 모가 작아서 그나마 낫다고 봐야지, 두 번째부터는 모가 눈을 찌르고 목도 찔러 대, 논을 매고 나서면 피부가 벌갰어.
모내기는 여럿이 하고 새참도 주고 점심도 잘해 주니까 허리 아픈 것도 참을 만 하지, 논 매는 건 우리 식구끼리 하고 점심도 얄궂게 먹으니까 재미도 하나도 없는데 허리는 끊어지듯이 아프더라고, 아마 요즘은 그런 일 하루 하고 나면 일주일은 드러누워야 할 걸.
힘든 것보다 더 기가 막힌 건, 뼈 빠지게 일해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 거였어. 비 효율도 그런 비 효율이 없었지.
-겨울에 농한기가 있잖아요.
-겨울에는 나무를 하러 다녔어. 세모하고 네모하고 같이 갔어. 그런데 세모네 친척 중에 백곰이라는 아재가 있었는데, 젊었을 때 부터 머리가 벗겨져서 별명이 백곰이라, 그 백곰 아재가 울산에 있는 00철강에 다니고 있었거든. 세모가 농사나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모를 00철강에 취직시켜준다고 데꼬 가 버렸어. 시골에는 나랑 네모만 남았어. 이가 하나 빠져 버린 셈이지. 둘이서 나무 하러 00골 산꼭 대기에 올라가면 신작로에 도시로 가는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 버스가 지나가고 먼지가 보얗게 올라오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나도 빨리 저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가야 하는데' 했지.
17살이 되던 해에 오빠도 어찌저찌해서 도시로 갔다. 제일 처음 일한 곳이 봉제 공장이었다. 열심히 일한 덕에 금방 재단사가 되었다. 오빠는 공장에서 봉급을 받는 족족 모아서 집으로 보냈다. 집에서는 그 돈으로 소도 사고 집도 새로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그리고 내가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부모님이 대 줄 수 없는 학비를 보내 주었다. 게다가 때마다 참고서까지 직접 사서 보내 주었다. 나는 오빠 덕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가방끈이 긴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고향과 동생들을 돌보면서도 오빠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명석함으로 오랫동안 일과 공부를 병행했고 그런 노오력이 결실이 있어 머지 않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 났다. 만세!
-오라버니, 우리의 친애하는 가난에게 한 말씀하시죠.
-가난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있나? 절대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지. 나는 가난은 악의 축이라고 생각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들으면 니가 고생이 뭔지 아냐? 하고 묻고 싶었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난 한 것 말고는 별로 부족한 게 없던 시절 같기는 해.
그 시절에는 밤에 사람이 나타나면 무서움이 없어지고 든든했어. 배 부르게 먹기만 해도 행복 지수가 급 상승했지. 엄마 아버지도 돈이 없으니 우리한테 부모님의 권위를 부리지 않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하고 살았어. 아픈 데 없이 건강했고, 뭐니 뭐니 해도 가난하니까 우애가 있네. 우리 형제들 간에 돈 가지고 다툴 일이 없으니까 여태 잘 지내잖아 옛말 하면서. 말하다 보니까 친애하는 가난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