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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의 후한 선물

by 분홍소금


(일러스트 by 솜)


아버지를 생각하면 시간이 갈수록 원망보다 죄송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원망과 죄송의 비율이 70대 30이던 것이 30대 70쯤으로 뒤집어 졌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도 죄송한 것은 친정에 갈 때 옷차림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간 것이다. 아버지는 "사람이 입성이 좋아야 어디가서 밥이라도 얻어 먹는다." 하시며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걸 언짢아 하셨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 돌본다는 핑게로, 아이들이 커서는 과일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라며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의 후줄구레한 모습에 얼마나 속이 상하셨으면 자식들에게 좀처럼 간섭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다. 아버지의 심정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1960년대 대다수의 한국 농민들은 가난으로 허덕였다. 그 암울했던 우리의 삶에 아버지는 희망은 커녕 암울한 삶을 더 어둡게 만드는 존재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초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이 '아버지'라고 제목을 정해 주면서 시를 지으라고 했다. 시 제목이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순간 나의 어린 마음이 적잖이 당황하고 상당히 복잡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와 함께한 좋은 순간이라든가, 아버지가 내게 베풀어준 좋은 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였다. 나는 할 수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렸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신다. 아버지는 장에 가면 술이 취해서 온다. 술이 취하면 똑바로 걷지 못하고 비틀비틀한다. 비틀거리면서 마당에 들어서서 고함을 지른다. 아버지가 무섭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나와 언니는 고모 집에 숨는다. 엄마도 숨으러 간다.

그렇게 쓰고 나서 마무리를 해야 겠는데 이번에는 마무리 지을 말이 또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속마음에는



-아버지가 밉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제일 싫다. 아버지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로 꽉차 있는데 차마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고작 초2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마음에도 그렇게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쓰면 내가 너무 나쁜 자식, 나아가 후레자식이 될 것 같고, 우리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온 동네 방네 소문을 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고심 끝에 아버지는 고약하다. 라고 마무리를 했다.

아버지는 나쁘다 라고 써 놓으니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나쁘다 란 말보다 좀 센 말이 뭘까 고민하다가 고약하다가 벌컥 생각이 나서 그렇게 썼다.

(나쁘다 : 좋지 아니하다. 고약하다 : 성미, 언행 따위가 사납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선생님은 내가 쓴 시를 보고 웃으면서 아버지한테 고약하다가 뭐꼬? 했다.


아버지가 하도 술을 드시고 가족들을 힘들게 하니까 엄마는 궁리 끝에 술을 끊는 약을 구해 왔다. 아버지의 술버릇을 알고 있던 오빠 친구(공의,면 소재지 의사)가 지어주었다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 몰래 아버지가 먹는 밥에 약을 살짝 섞었다. 아침에 엄마가 무쇠 솥에서 아버지 밥을 펄 때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밥 공기에 밥을 담고 나서 밥 위에 가루약을 섞었다. 그리고 그 위에 밥을 한 숟가락 정도를 덮어 놓았다.



나는 아버지가 술약이 들어있는 것을 알아 채지나 않을까, 눈치 채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살짝 긴장한 채 밥상을 받은 아버지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첫술에 약(술약이라 부름)이 밥과 함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술 약은 효과가 직방이었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엄마 그 때 아버지가 술약을 밥에 섞은 것 진짜 몰랐을까?

-왜 몰랐겠노? 다 알고 있었을 끼다. 알고도 모른 척 넘어 갔겄지.

-엄마 그렇게 효과 빠른 약 처음 봤다. 그 약, 혹시 지금도 구할 수 있을까?

-그건 왜 묻노

-내 주위에 알콜 중독 못 끊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한테 소개해 주고 싶어서

-미친 소리 그만해라. 그 약은 잘못 먹으면 죽는 약이다.

-응?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좋은 시절이었을까, 아니면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한 날들이었을까. 가난과 아버지의 무능과 엄마의 우울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좋은 일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해코지를 한 적이 없으셨다. 오히려 해코지를 당하셨다. 글자 깨나 알고 돈 푼이나 있고 행세 깨나 하는 사람들에게 평생 무시 당하고 이용 당했다. 전문 사기꾼이 아니고 일가이고 친척인 사람들에게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당했다. 아버지는 심지어 자식인 우리한테도 대접을 받지 못하셨다. 우리는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커서는 아버지를 무시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를 무시하는 자식들을 좀 어려워 하셨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아버지의 권위로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일이 없었다. 권위라는 말이 있는 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잔소리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 따위는 없었다. 자녀 교육에 흔히 쓰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애초에 필요치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에 무엇에도 생색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가진 것이 없어 자식들에게 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듯 했다.



아버지는 건강하고 부지런했다. 말 술을 마시고 와서도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지게를 지고 꼴을 뜯으러 가셨다. 밥 한 공기를 열무 김치와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드신 후 곧바로 논 일을 했다.



점심 때 집에 오셔서 바지를 걷어 올리면 아버지 발목 근처에 거머리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빨아 먹고 통통해진 거머리를 떼내면 피가 낭자했다. 피를 대충 닦아내고 소독도 안하고 내버려 두어도 금방 나았다. 엄마는 "너거 아부지 살성 하나는 알아줘야" 된다" 했다.



92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 흔한 한약 한 제 드신 적 없어도 성인병은 고사하고 잔병 하나 없으셨다.

결혼 후 부산에서 잠깐 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오셔서 태종대를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아부지 여기가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데라예.

-유명한 데라꼬? 나는 촌에서 보는 경치랑 똑 같아서 좋은지 모리겠는데.

아버지와 함께 태종대 둘레 길을 걷는 데 아버지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아부지 같이 가요. 혼자 내빼면 우째요?

-젊디 젊은 것이 걸음을 와 그리 못 걷노?

돌아가실 때까지 눈이 얼마나 좋은지 바늘에 실을 직접 끼워서 필요한 것을 꿰매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단히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MBTI검사를 했다면 분명 ENFP였을 것이다. 그 때는 그것도 싫어서 아버지가 농담을 할 때마다 뭐 저런 실없는 소리를 하시나 하고 판단했지만 매사 걱정 근심으로 수심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다 한들 없는 돈이 생겼을까 싶다.



아버지는 삶에서 금보다도 귀한 건강을 물려주셨다. 부지런함과 낙천적인 성품, 괜찮은 두뇌도 아버지로 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다. 아버지는 마지막 가실 때까지 자식들에게 짐이 될 만한 것을 아예 만들지 않으셨다. 돌아가실 때도 어떤 노환도 없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고목 나무가 스러지듯이 평생 살던 집에서 깨끗하고 고운 모습으로 소천하셨다.

나는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내 아픔에만 눈이 가려서 아버지께 그 어떤 고마움도 표현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 그것도 후한 선물을 남겨 주셨음에도 그 진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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