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2017)는 2011년 맨부커 상을 수상하며 영국 문단에서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줄리언 반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토니 웹스트 역의 짐 브로드벤트, 베로니카 역의 샬롯 램플링, 젊은 토니웹스트역의 빌리 하울이 연기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인데도 산만하거나 혼란스럽지 않아서 몰입은 물론이고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에 지장이 없습니다.
토니는 과거의 사실에 대해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붙잡은 채 자신이 근사한 사람인 양 착각하며, 현실에서는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은 등한히 합니다.
영화 초반에 역사 강의 수업 장면이 나오는데 교수와 학생 간의 자유로운 토론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조 헌트 선생님은 학생의 어떤 발언이라도 받아 주고 존중해 줍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 입니다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 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의 원작이 되는 책에서 토니 웹스터는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토니는 평범한 학생인데 반해 베로니카는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매력을 가졌지요. 베로니카는 순진한 토니의 애를 태웁니다. 토니는 베로니카를 좋아하지만 베로니카의 알 수 없는 태도를 보며 불안하기만 합니다.
토니의 동창인 아드리안은 전학 온 첫날부터 조 헌트 선생님의 질문에 수준 높은 대답을 하며 친구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범상치 않은 면모를 가진 친구입니다. 후에 아드리안은 토니에게 토니의 여자친구인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되는지 묻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드리안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토니는 마거릿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마거릿과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토니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베로니카의 엄마가 죽으면서 유산으로 토니에게 아드리안의 일기장을 함께 남겼다는 내용입니다. 토니는 아드리안의 일기장을 넘겨 받기 위해 옛 연인이었던 베로니카와 재회하게 됩니다.
-너도 알겠지만 어머님이 내게도 뭘 남기셨더군
나한테 남기신 게 아드리안의 일기장이라구
-나한테 없어
-뭐라고?
-태워버렸어
베로니카가 과거의 일 따위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듯 합니다.
다시 만난 베로니카는 냉정하게 말하는 것은 그대로 이지만 옛날처럼 톡톡 튀는 매력은 온 데 간 데 없지요. 헤어 스타일이나 옷차림도 수수하기만 합니다.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아드리안의 일기장 대신 편지 한 통을 건넵니다.
그 편지는 과거에 두 사람이 사귄다고 했을 때 보낸 편지였지요. 토니는 둘이 사귀는 것에 대해 쿨한 태도를 보이며 상관없다고 쓴 엽서를 보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배신감으로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드리안과 캐롤라인에게 악담과 저주로 가득찬 편지를 써서 보냈지요. 토니가 받은 것은 바로 그 편지였습니다.
베로니카가 전해준 편지 한 통으로 토니는 과거에 관한 잘못된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와 형편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직면하게 되지요.
토니는 자신이 저주했던 베로니카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합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못된 말과 행동이 베로니카의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을 받았던 것이지요. 베로니카의 현실은 본 토니는 자신의 예감이 빗나가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토니는 베로니카가 사회생활을 하기에 부족한 청년을 복지 시설에 맡기는 것을 봅니다. 당연히 베로니카와 아드리안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 여기지만 직원을 통해 아드리안과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사이에서 난 베로니카의 동생임을 알게 됩니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연인과 어머니 사이에서 난 아들, 즉 남동생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모든 상처를 뒤로 하고 어머니와 연인 사이에 난 장애인 남동생을 돌보는 베로니카, 과거의 왜곡된 기억을 붙들고 현재의 일에 소홀한 토니가 대비가 됩니다.
그것은 토니의 전처 마거릿의 말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당신은 항상 코앞의 문제를 못 봐, 예를 들면 지금 옆방에서 당신 딸이 앓고 있다는 거
영화에서 노년에 들어선 두 여성의 성숙한 모습이 돋보입니다.
베로니카는 젊은 한 때의 격정으로 인해 말 못할 역경을 겪었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 들이지요. 장애가 있는 남동생을 기꺼이 돌봅니다.
토니의 전처 마거릿은 과거의 왜곡된 기억에 얽매여 혼란스러워 하며 도움을 청하는 토니의 말을 잘 경청해 줍니다. 자신에게 진심인 마거릿을 보며 토니는 마거릿과 딸 수지에게 소홀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마거릿과 수지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사랑을 전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토니가 과거의 잘못을 끝낼 예감(원제 : The Sense Of an Ending)을 준답니다.
저는 과거가 아니라 며칠 전의 일도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제 기억이 맞다고 우길 수가 없지요. 저도 토니 처럼 과거의 왜곡된 기억을 붙잡고 나 자신과 타인을 괴롭게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맞다고 확신하는 기억이 사실은 틀릴 수도 있다, 과거에 매여 소중한 현실을 소홀히 하지 마라, 와 같은 깨달음을 전해주는 좋은 영화입니다.